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10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성육신 하셔서 죄인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롬 10:4-10)
4절 텔로스 가르 노무 크리스토스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판티 토 피스튜온티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칭의'의 근원이며 이유이다. 즉, 의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은 뒤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을 한정시키는 말로 '율법의 마침'은 그 목적이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는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자'들,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공평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멸망을 받으며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실로 '의'(디카이오쉬넨)은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칭의의 의를 끝까지 불신한 것이다.
율법의 마침 - 혹자는 여기서 '율법'(노모스)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이나 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Meyer, Sanday and Headlam). 또 혹자는 본문의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특히 9:31)에서 볼 때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침'을 가리키는 헬라어 '텔로스'는 (1) 문제의 종결(end), 종료(termination) 혹은 (2) 목적(aim), 의도(intention), 목표(goal)등 양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이다(13:10;Calvin, Erasmus, Lenski, Murray, Harrison). (2)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제 의미이며 목적과 의도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Cranfield). 그중 (1)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 이유인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하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實體)로 인해 그 기능이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 역사상에 주어졌던 것이고 이제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5절 모세스 가르 그라페이 텐 디카이오쉬넨 텐 에크 투 노무 호티 호 포이에사스 아우타 안드로포스 제세타이 엔 아우토이스
롬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10:5
모세가 기록하되 - 레 18:5에서 인용된 것으로 모세의 말이 인용된 것은 모세가 유대인의 율법을 세운 자였기 때문이다. 이기에서 모세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하나님의 율례'라는 표현을 통하여 구약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느 9:29; 겔 20:11, 13, 21) 또한 신약에 넘어와서도 그 사상을 계승되고 있다(7:10; 마 19:17; 눅 10:28; 갈 3:12). 하지만 문제는 누가 과연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연약한 인생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3:9-18).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시고(8:3, 4)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 유일한 분이시다(히 5:8, 9). '기록하되'를 가리키는 헬라어 '그라페이'는 6, 8절에 나오는 '말하되'의 헬라어 '레게이'와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레게이'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 반면 '그라페이'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6절 주석 참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 '말미암은'의 헬라어 '에크'(* )는 '...에서 나온'이라는 뜻으로 그 출신을 나타낸다. '율법에서 난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이다. 이는 9:31, 32에 나오는 '행위에서 나온 의의 법'을 말한다.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며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결을 받는 길이었다(레 18:5; 겔 20:11, 13, 21; 눅 10:28). 따라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며 행할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罪性)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갔지만 법이 요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9:31).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율법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율법을 성취하여 그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고 보았다(Strack-Billerbeck).
그러나 율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렘 31:33) 오순절의 성령 보내심으로 성취되었다(욜 2:28 ff.).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믿는 자들의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6절 헤 데 에크 피스테오스 디카이오쉬네 후토스 레게이 메 에이페스 엔 테 카르디아 수 티스 아나베세타이 에이스 톤 우라논 투트 에스틴 크리스톤 카타가게인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 본 구절은 앞절(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를 이루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나타났음은 바울의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며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가르침의 기본 구조이다(Ridderbos).
그리스도의 죽음은 종말론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며 의롭다하는 판결의 표시이다. 옛 시대(old aeon)와 옛사람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을 받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했다.
이같이 말하되 - '믿음에서 난 의'를 의인화시켰다. 이런 수사법은 바울 당시 철학적 연설을 할 때 종종 쓰였다. 의인화 용법으로써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대조하여 '믿음에서 난 의'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 본 구절은 70인 역(LXX)의 신 30:12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본 구절은 구약적 문맥에 비추어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는 것은 (1) 사람으로서 불가능할 뿐 아니라, (2) 이런 교만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율법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과 그들의 망상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근본 핵심은 버리고 자신들의 유전과 행위를 통해 하늘, 즉 의에 이르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마음에...하지 말라 -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에이페스'는 '말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믿음을 통한 의'는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이것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하였다. 이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들 중에 오셔서 생명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7절 헤 티스 카타베세타이 에이스 텐 아뷧손 투트 에스틴 크리스톤 에크 네크론 아나가게인
롬 10: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10:7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 '음부'(아뷧손)는 6절의 '하늘' (우라논)과 그 높고 깊음에서 대조를 이룬다. 음부의 헬라어 '아뷧소스'는 히브리어 '테홈' 대신 사용된 말이다. '테홈'은 '물들의 깊음'(창 1:2)이나 '바다의 깊음'(시 107:26)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본문의 의미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땅의 깊은 곳'(시 71:20), 즉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스올'(Sheol)을 의미한다(시 139:8;암 9:2;Murray, Hodge, Cranfield). 음부에 내려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당하신 죽음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無效)로 하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 '모셔 올리는'의 헬라어 '아나가게인'은 부활을 언급할 때 쓰인다(히 13:20).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은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8절 알라 티 레게이 엥귀스 수 토 레마 에스틴 엔 토 스토마티 수 카이 엔 테 카르디아 수 투트 에스틴 토 레마 테스 피스테오스 호 케륏소멘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앞에서 부정적인 진술을 계속하였지만, 이제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로 돌아온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 신 30:14의 인용인데, 70인 역에는 '심히'에 해당하는 '스포드라'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생략하였다.
구약의 문맥에서는 율법을 통해 드러난(reveal) 은혜로운 면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던 것이다(시 1:2).
여기서 '말씀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와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낸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이 부분은 인용구에 바울이 첨가시킨 삽입구이다. '전파하는'의 헬라어 본문 '케륏소멘'는 '가르치다', '설교하다', '선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을 뜻한다.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한정구는 '말씀이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 바울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이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Calvin, Cranfield).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한다(Cranfield). 바울이 신 30:14에 나오는 '말씀'을 칭의(justification)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9절 호티 에안 호몰로게세스 엔 토 스토마티 수 퀴리온 이에순 카이 피스튜세스 엔 테 카르디아 수 호티 호 데오스 아우톤 에게이렌 에크 네크론 소데세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네 입으로', '네 마음으로'는 8절의 '네 입에', '네 마음에'와 병행을 이룬다.
예수를 주로 - 이는 '예수는 주이시다'(Jesus in Lord)란 말이다.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이었다. 또한 신비 종교(Mystery Religion)의 신들이었던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에게도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통치자에게 이 명칭을 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칭호 '야웨'는 칠십인 역에서 항상 '퀴리오스'로 번역했다. 즉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의 형태로서(행 2:36; 고전 12:3) 예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경배의 대상이며 승천하신 구주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 '살리신'의 헬라어 '에게이렌'는 '일으키다'라는 말로서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아파르케)가 되셨다는 뜻이다(고전 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소망케 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다시 사심을 고백했고 믿었던 것이다(빌 2:9-11).
네 마음에 믿으면 -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에서 믿는 만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신앙 고백을 전제한 것으로서 외식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입-> 마음의 순서는 인용문 신명기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10절에서는 그 바른 순서, 즉 마음속에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자연적인 순서로 말한다.
구원을 얻으리니 - 헬라어 본문 '소데세'는 미래형으로 종말론적 구원(eschatological salvation)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입으로 시인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10절 카르디아 가르 피스튜에타이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스토마티 데 홀몰로게이타이 에이스 소테리안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10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입', '믿는 것'-'시인하는 것'은 문장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은 본문에서 역으로 사용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본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구절을 기억시키는 내용으로서 믿고 시인함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믿어'와 '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와 '호몰로게이타이'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시인에 이르게 됨을 나타낸 것이다(고후 5:14-15).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어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이다(마 10:32;막 8:38; 눅 12:8). 특히, 시인(是認)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 탄압과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구원을 정직하게 표명(表明)하는 차원까지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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