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알쓸잡

[욥기 9장 강해설교말씀] 욥-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욥 9:1-35)

복음의 능력 2021. 12. 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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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장에서 욥은 빌닷의 인과응보적 말에 대답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쟁변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입니다. 인간은 그릇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닥쳤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욥-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욥 9:1-35)

 

1-15, 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

[1-4]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 . . .

욥은 친구들이 옳은 말을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다 진리이지만, 단지 그 적용이 적절치 않았다. 욥은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고 말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표준이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64:6). 의인은 하나도 없다(3:10).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3:20-22).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5:20). 그 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뿐 아니라, 성도의 성심의 율법 준행도 내포한다고 본다.

욥은 또,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유한한 죄인인 인생이 어떻게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말로라도 다툴 수 있겠는가? 인생은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고 실천하고 또 기도에 힘써야 할 뿐이며, 하나님과 다투려 해서는 안 된다.

욥은 또 말하기를,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고 한다. 사람이 그의 마음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그는 형통한 자가 될 수 없다.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와 오는 세상에서 결코 아무 좋은 것도 기대할 수 없다.

[5-11]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 . . .

욥은 또, “그가[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린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악에 대하여 노하시면 산을 무너뜨리시고 옮기시며 땅을 움직이실 것이다. 그는 지진을 주실 것이다. 성경은 세상 종말의 징조들 중의 하나로 지진을 말한다(24:7; 16:17-20).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앙이다.

욥은 또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낮에도, 밤에도 어두움을 주실 수 있고 또 주신다. 출애굽기 10:23에 보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들 중 아홉 번째 재앙에서 하나님께서는 애굽 온 땅에 3일 동안 캄캄한 흑암을 주셨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셨을 때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27:45).

욥은 또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홀로 창조하셨고 바다도 주장하신다. 욥은 또 “[그가] 북두성(곰 자리)과 삼성(오리온 자리)과 묘성(황소 자리)과 남방의 밀실(별 자리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을 주관하는 자이시다. 또 그는 기적의 하나님,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음을 증거한다.

욥은 또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영이시므로 그의 지나가심과 활동을 사람이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지금도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 . . .

욥은 또,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는 천지만물을 주셨고 우리의 생명을 주셨고 우리의 가족을 주셨다. 그는 우리의 건강을, 우리의 재물을, 우리나라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좋은 환경여건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빼앗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물이므로 하나님은 그 주신 모든 것을 빼앗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주로 사람의 죄에 대한 징벌로, 주신 것을 빼앗으신다. 그러나 간혹 성도의 훈련을 위해 그것을 빼앗기도 하신다. 그는 생명을 빼앗아 죽게도 하시고, 가족을 빼앗아 고아와 과부가 되게도 하시고, 건강을 빼앗아 아프게도 하시고, 재물을 빼앗아 가난하게도 하신다. 그는 국가를 빼앗아 나라 없는 설움을 당케도 하시고, 좋은 환경을 빼앗아 고난을 당케도 하신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빼앗으시는 것, 곧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피하거나 막아낼 힘이 없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죽이시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고 가족을 취하시면 고아와 과부가 될 수밖에 없고 건강을 취하시면 아플 수밖에 없고 재물을 취하시면 가난할 수밖에 없고 나라를 취하시면 방랑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는 자는 없다.

,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

[13-15]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 . . .

욥은 또 말한다.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혹은 아니하시면[KJV]) 라합[바다 괴물]을 돕는 자들[라합의 동류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라.”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는 참으로 두렵다. 바다 괴물과 그 동류들도 그 앞에 굴복할 정도로 두렵다. 하물며 연약한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그 위엄 앞에 어떻게 서서 감히 하나님 앞에 무어라고 대답하며 변론할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가 의로울지라도 하나님 앞에 대답할 수 없고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 엄위하신 그에게 간구할 수 있을 뿐이다. 욥은 하나님의 엄위하심, 하나님의 능력, 특히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를 알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의 의()가 내세울 것이 없는 의(義)임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 보잘것없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의 의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지 못한다.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빌립보서 3:9,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했다. 또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뿐이다. 우리의 담대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이다. 물론 여실한 순종은 더욱 평안과 담대함을 줄 것이지만(요일 3:21-22).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 욥은 친구들의 말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엄위하신 심판자이시다. 그는 지혜와 힘이 강하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를 거역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다. 그가 빼앗으시면 막을 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엄위하신 절대주권자이심을 알자. 또 우리는 우리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임을 알자.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십자가 의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

16-24, 고난 중에 하나님만 바라보자

[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 . . .

욥은 또 말하기를,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한다. 욥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교훈하셨다(눅 18:1).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했고(살전 5:1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했다(4:6-7).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영적 호흡과 같다.

또 욥은 기도의 응답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우리의 기도는 응답된다. 기도는 응답을 받는 데 가치가 있다. 시편 65:2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고 증거한다. 주께서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7:7-8),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다(14:14).

본문은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을 때 교만치 말아야 할 것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특히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비천한 피조물이며 부족하고 누추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을 받았어도,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생각하면 감히 무엇을 자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겸손과 두려움으로 감사해야 할 뿐이다. 기도의 응답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영적 교만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7-20]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 . .

욥은 또,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큰 고통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중에라도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그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욥은 또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고 말한다. ‘그를 호출한다는 원어(요이데니)는 ‘나를 호출한다는 뜻이다(MT, BDB, KJV). 본문은, 내가 호출을 당하여 엄위하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욥은 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고 말한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느낀다. 엄격한 기준으로 보면, 나는 죄인이며 내 속에는 사악함과 부패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실상 항변할 자격도, 항변할 담력도 없는 인생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라 할지라도 그것을 달게 받고, 또 훈련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 베드로전서 4:12-13,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우리의 위로자와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21]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 . . .

욥은,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라고 말한다. “나는 순전하다마는이라는 말은 문맥상 나는 순전할지라도라는 뜻 같다(KJV, NIV). ‘순전함이라는 원어( ם󰚛)완전함, 흠 없음이라는 뜻이다. 욥은 양심에 가책되는 것이 없는 순전한 삶을 살았다. 욥기 6:10,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욥기 6:29,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욥기 9: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원문은 나는 나의 영혼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가 지금 왜 이런 처지에 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 결말이 어떨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든지, 혹은 앞절과 더불어 그가 자신의 온전함과 의를 하나님 앞에서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든지, 혹은 뒤따르는 구절과 함께, 고난 중에 심히 피곤해서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며 존중할 힘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또 그는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멸시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가망성이 없고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살고 싶은 의욕도 버리고 있었다. 욥은 욥기 6:8-9에서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고 말하였고, 7:15-16에서는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뼈의 쑤심]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22-24]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 . . .

욥은 또 말한다.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홀연히 재앙(쇼트)[, 채찍]이 내려 도륙될[사람들을 죽일]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맛사)[절망(BDB, KB, NASB, NIV) 혹은 시련(KJV)]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그가 그 재판관들의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때때로 고난과 재앙을 내리신다. 그는 악인에게 주시는 것과 비슷하게 의인에게도 고난을 주신다. 의인도 자연적 재해나 교통사고 등을 당한다. 또 악한 세상에서 의인이 불의한 재판을 받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또 보통 그 재난이 욥의 경우처럼 일시적이지만, 어떤 경우는 순교의 죽음으로 끝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성도에게 닥친 이런 고난은 이해하기 어려운 불행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큰 일이나 큰 불행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믿음을 증거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고 진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참 믿음, 순수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16:24).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악인들을 공의로 심판하신다. 시편 58:11,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기도의 응답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에도 교만치 말아야 한다. 인생은 비천하고 누추한 존재이므로 항상 겸손과 두려움으로 처신해야 한다.

모든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다.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의를 주장할 수 없고 나의 패괴함을 느낄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을 달게 받고 하나님만 바라야 한다.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생각나는 죄가 없으면 참고 인내하자.

25-35, 고난의 해결책

[25-26]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복을 볼 수 . . . .

욥은 또, “나의 날들이 체부(루츠)[달리는 자]보다 빠르도다. 그것들은 질주하며 복을 보지 못하도다.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게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라고 말한다.

욥은 고난 중에 자기의 날들이 빨리 지나감을 고백하였다. 그는 그의 날들이 달리는 자보다 빠르며 빠른 배와 같고 먹이를 낚아채려고 날아 내려오는 독수리와 같다고 말한다. 시편 90:5는 사람의 일생이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는 풀 같다고 말하고, 시편 90:10은 사람의 날들이 신속히 가니 날아간다고 말한다. 옛 사람들은 세월이 화살 같다고 표현하였고 흐르는 물과 같다고도 하였다.

욥은 그 고난의 날들의 빠른 흐름 속에서 이제는 행복을 볼 수 없었다. 사람의 일생은 고난의 길이다. 우리의 세월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 빠른 세월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인간의 정로(正路)요 복된 삶인가? 에베소서 5:15-17,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의 뜻이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다. 성경의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성경에 명하신 선한 일들에 힘쓰는 것이다. 그것은 전도와 구제 등을 포함한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한 선한 봉사의 일들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시다(딛 2:14).

[27-28]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 . . .

욥은 또 말한다.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혹은 불평]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두 가지 가능한 대책을 언급한다. 하나는 그의 원통함 혹은 불평을 잊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얼굴빛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 즉 마음을 기쁘게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대책은 잠시 도움이 되거나 많이 수련하면 약간은 도움이 될지 모르나, 참된 대책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대책일 뿐이다.

계속 그의 몸이 아프고 계속 그의 환경이 심히 어려운데, 어떻게 그것이 참된 대책이 되겠는가? 그는 그의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무죄(無罪)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죄인처럼 고통 가운데 버려두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망각이나 인위적 기쁨은 대책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참된 대책, 완전한 대책은 어디에 있는가? 참되고 완전한 대책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심령에 참된 평안과 위로를 주셔야 가능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의 환경을 회복시켜 주셔야 참 대책이 될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참 대책, 완전한 대책이 되신다. 주께서는 친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14:27). 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원하였다(살후 3:16).

[29-31]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 . . .

욥은 또,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욥은 본문에서 인간의 죄책(罪責)의 문제를 말한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정죄하심 같다고 표현한다. 죄인에게 고난의 징벌을 주시듯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난을 벗어나려는 모든 수고, 예컨대 망각하는 것이나 마음과 얼굴을 기쁘고 즐겁게 가지는 것 등이 헛될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이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 즉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을지라도 주께서 그를 개천에 빠지게 하실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가지는 죄악된 생각, 죄악된 감정, 죄악된 말, 죄악된 행위들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 같고, 더욱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 그것을 증거하는 것 같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깨끗한 옷을 더러운 몸에 입지 않듯이, 그의 옷이라도 그의 죄악된 몸을 싫어할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인간의 고난의 해결책, 인간의 죄책의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인간 속에나 인간의 행위나 노력에 있지 않다. 인간의 고난의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고, 인간의 죄책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와 성령의 위로에 있다. 사도 바울은 담대히 증거하기를,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다(8:33-34).

[32-35]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 . . .

욥은 또 말한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은 하나님께서 육신이 아니시고 영이시며 크신 위엄을 지니신 영이시므로 단지 육신적으로 대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위엄 앞에서 감히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질하여 재판할 수 없다는 말은 함께 법정에 갈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원고가 되시고 욥이 피고가 되든지, 아니면 욥이 원고가 되고 하나님께서 피고가 되시든지 간에, 그가 법정에 가서 자신의 고난의 정당성을 따져볼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또 그 둘 사이에 판결할 자도 없다고 말한다.

욥은 또,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고 말한다.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다’(웨로켄 아노키 임마디)는 말은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도다라는 뜻이다(MT, KJV, NASB, NIV).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의 막대기로 그를 치셨고 그를 누르시며 그 위엄으로 그를 두렵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그에게 감히 무슨 말씀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 막대기를 그에게서 떠나게 하시면 그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으나 지금 그의 처지는 그렇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욥의 심적 고통과 방황의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그 고난과 징계의 막대기를 거두시는 데 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강과 위로를 주시는 데 있다.

고난 중에 망각과 인위적 기쁨은 참된 대책이 되지 못한다. 고난 중에 참된 대책과 해결책은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죄사함으로 인한 내면적 평안과 위로를 주시고 육신적, 환경적 구원과 회복을 주실 수 있다. 인간의 죄책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와 성령의 위로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긍휼만 바라자.

우리는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지혜롭게 또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선한 일들을 힘쓰자.

[사도행전 7장 강해설교말씀]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행 7:1-60)

 

[사도행전 7장 강해설교말씀]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행 7:1-60)

사도행전 7장에는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대제사장 앞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구원자라는 것을 증거 합니다. 이스라엘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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