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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3장 16절] 거듭남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복음의 능력 2020. 8. 2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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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거듭남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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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거듭남과 하나님의 사랑

본 문 :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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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말

 

 

칼빈은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공관복음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고 있다면, 요한은 주님의 영혼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였다. 공관 복음서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을 보다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비하여,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직분과 죽음과 부활의 능력 등에 관하여 교리적인 해석에 더 치중하고 있다. 그리하여 요한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여 신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공관 복음서가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건을 연대기 별로 기술하고 있음에 비하여, 요한복음은 주제별로 기술하고 있다. 이점에서 요한복음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주해 서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요한복음을 매우 귀중히 평가하여 '내적 정경'으로 여겼으며, 이 복음서에 수록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메시지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요한복음은 구원의 지식과 위로와 확신을 주는 다함이 없는 영적 샘물로 여겼다.

 

 

요한복음의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1, 표준새번역).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요소들을 가르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본문 요 3:1-16이다. 여기에는 중생의 진리가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대속,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신비롭게 이루어짐을 잘 가르쳐주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은 성경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본문의 구조

 

중생의 필연성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1. 중생의 사역자 ; 성령

a. 니고데모의 인격과 신분 ; 1

b. 니고데모의 질문 ; 2, 4, 9

c. 예수님의 대답 ; 3, 5-8, 10

 

2. 중생의 공로적 근원 ; 성자의 대속적 희생

a. 사람들의 불신 ; 11, 12

b. 그리스도의 모형 ; 13, 14

c. 그리스도 죽음의 필요성 ; 15

 

3. 중생의 창시적 근원 ; 성부의 사랑

a.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 ; 16

 

. 본문에 대한 논쟁점들

 

. 예수의 말씀과 요한의 해석

 

먼저 제기되는 질문은 요한이 이 대화를 어떻게 입수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본문 중에는 대화 참여자로서 요한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복음서 끝에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또 이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21:24, 표준 새번역)고 하였다. 혹자는 성령의 영감에 의하여 이 대화가 기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너무나 추상적이다. 아마도 요한은 주님께서 가까이하셨던 제자로서 이 대화를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을 수도 있으며, 다른 가능성은 니고데모로부터 그날 밤의 대화를 들었을 수도 있다. 니고데모와 예수의 제자들은 이후로도 계속적인 교제를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어느 경우든 요한은 일차적 자료에 근거하여 자신의 신학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어디서 끝나는가? 본문에는 예수의 말씀들이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요한 자신의 신학적인 주석으로 흘러간다. 니고데모는 서론 격인 진술(2)과 함께 다만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4, 9). 나머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요한의 해석과 함께 있다. 어디에서 예수의 말씀이 끝나고 있는가? {새 국제판 성경}(NIV), {예루살렘 성경}(JB), 그리고 {새 영어 성경}(NEV)3:1-21절 전체 부분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직접적 인용으로 취한다. 그러나 {개역 영어 성경}(RSV)15절로 예수님의 대화는 끝났다고 보고 있으며, 새 생활 성경(The Good News Bible)14절까지만 취하고 있다. 나머지 구절들은 요한의 해석으로 보는 것이다.

 

 

. 대화의 시기

 

요한복음에는 모두 11개의 예수님의 대화의 말씀이 있는데, 그중에 첫 번째가 본문에 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이다. 이것이 과연 연대기적으로 첫 번째 대화인가?라는 데에 학자들은 의문을 던진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요한은 예수의 중요 언행을 연대기적인 순서가 아니라, 신학적 주제별로 용의주도하게 배열하였다. 그렇다면 본문의 대화는 그 중요성 때문에 맨 처음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목적이 죄인의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중생은 바로 첫 관문이기 때문이다.

 

 

이 대화는 예수님의 생애의 초기나 중기가 아니고, 즉 첫 대화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앞에 둔 말기에 속하는 대화로 보인다. 그 이유로는 첫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점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사역 후기에 박해로 인하여 밤에 숨어서 찾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둘째, 니고데모가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2). 요한복음 3장 이전에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은 2장에 나타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뿐이다. 그런데도 니고데모는 예수의 여러 표적들을 통하여 그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 대화가 예수의 생애 후반 즉 여러 표적과 기사를 행한 후에 있었다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셋째, 예수님께서 이미 여기서 자신의 십자가 고난을 언급한다는 점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14)고 하심으로 자신의 고난을 말씀하셨다. 십자가에 대한 언급은 다른 복음서에는 적어도 중기 이후에, 그리고 후기에 집중되어 있다.

 

 

. 물과 성령

 

중생의 방법에 대하여 예수님은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5)이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에 의한 중생에는 아무런 이의가 있을 수 없지만, 본문에서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다.

 

1. 물은 세례(침례)를 의미한다는 견해

 

성서적으로 볼 때 물세례가 주는 교훈은 죄를 회개함으로 씻음 받고, 육적인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한다(롬 6:3-8). 물세례를 통해 새사람 즉 중생한 것을 나타낸다. 여기에 근거하여 물세례 받으면 중생한다는 교리 즉 '세례에 의한 중생'(Baptismal regeneration)의 교리가 성립된다. 이는 천주교회와 성공회의 주장이다. 저들은 성례는 그 자체로서 효력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물을 세례로 해석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인가? 둘째, 그렇다면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셋째,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면 이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서 교훈에 모순되지 않느냐?라는 점이다.

 

 

2. 물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견해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역하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따라서 중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뜻을 정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 주셔서, 우리를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약 1:18, 표준 새번역). "너희가 거듭난 것이 ㅆ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ㅆ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개역성경).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중생시키실 때 사용하는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3. 물이 회개를 의미한다는 견해

 

2:6에는 "유대 사람의 정결 예법을 따라 거기에는 돌로 만든 물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는데"라고 하였으니 물은 깨끗게 하는 것 즉 회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특히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물세례였다(막 1:4). 물은 깨끗게 씻는 것이고, 물로 세례를 주니까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고 성령을 받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엡5:26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구절도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된다.

 

 

4. 물이 성령을 의미한다는 견해

 

칼빈은 본문의 물을 성령이라고 보아 본문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이중으로 강조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물이라고 하는 [우라토스]와 성령이라고 하는 [프뉴마토스]앞에는 모두 관사가 없고, 다만 그 앞에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하는 [엑스]라는 전치사가 하나 있다. 정관사 없이 전치사가 두 개의 명사를 이끌고 있다. 이것이 문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물을 성령으로 본다. 이 성령은 회개와 죄 사함의 사역을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성령은 예수를 믿게 하는 사역의 성령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물과 성령은 성령의 다른 사역을 나타내는 동의어로서 이중적인 강조 용법으로 보았다.

 

 

. 본문 주해

 

< 1>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의 관원이었다. 바리새인은 당시에 위선자라는 말로서 사용되기도 했으나, 원래 그들은 경건한 신앙인들이었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를 의미하였다. 즉 그들은 속된 세상의 일반인들과는 구분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종교 본래의 의미보다는 종교의 의식과 규례를 더 중히 여길 때 그들은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라고 책망받았으며(마 23:13-29),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마 16:6). 니고데모는 당시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많이 공부해야 바리새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유대 지도자였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백성의 정복자'이다. 그는 산헤드린의 의원으로서 오늘날 국회의원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다.

 

 

< 2>

 

`밤에 예수께 와서'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 해석과 부정적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긍정적 해석으로는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을 택하여 왔다는 것이다. 주님은 낮동안 너무나 분주하셨다. 그리고 니고데모 자신도 그의 종교적 정치적 업무로 인해 낮 동안은 조용한 시간, 신앙의 깊이 있는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용한 밤 시간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보다는 부정적 해석이 우세하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에 밤에 예수를 찾은 것이다. 당시에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을 핍박했기 때문에 두려워서 밤에 찾아왔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밤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과 니고데모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어둠의 세상에 빛이신 예수가 찾아온 것이다(요 1:9,10).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고"(요 1:5), "빛이 세상에 있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요 3:19) 바로 그러한 시대에 니고데모는 빛을 찾아 나선 구도자였다.

 

 

< 2-8>

 

`진실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으로서 '확인한다', '동의한다'는 뜻이다. 주님께서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이 말을 사용하셨다. 이 말은 당시의 유대인의 표현법이 아니었으며, 제자들이나 성도들이 사용한 기록이 없다. 오직 주님만이 사용하셨다. 여기에서 이 말은 중생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아노센]은 "거듭난다" 또는 `위로부터'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옛것의 반복이 아니라 완전한 새것, 새사람을 의미한다. 성서에서 중생은 문자적 의미에서 "낳다", "거듭나다", "출생하다", "소생시키다" 그리고 "새사람"의 의미를 가진다(요3:3, 1:13, 벧전1:23, 요일2:29, 약1:18, 엡4:22, 골2:13, 엡2:5). 이런 말들은 내적이고 도덕적인 변화에 대하여 적용되어지며, 그 변화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거듭난다"(요3:3, 5:7). "하나님께로 난다"(요1:13, 요일3:9, 4:7, 5:1, 4, 18), "성령으로 난다"(요3:5, 6), "살리셨다"(엡2:1, 5),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5:24, 요일3:14)등이다. 이런 표현들은 재생(reproduction)이나 혹은 회복(restoration)으로 이해할 수 있다.

 

 

중생의 본질에 대하여 요한 웨슬레는 "중생은 하나님께서 인간 심령 속에서 일으키는 큰 변화이다. 이것은 죄로 죽은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아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 나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중생의 필요성은 첫째로, 영적인 새 생명을 얻기 위하여 필요하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직후 아담은 영적인 죽음을 당하였다. 성서는 죽음을 "분리로 말하였다. 육신이 영혼과 분리될 때 죽는 것처럼 영혼은 하나님과 분리될 때 죽는 것이다. 아담의 모든 자손은 영적 죽음을 지닌 채 태어난다. 이러한 영적 죽음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즉 영적 분리가 영적 교제의 회복과 연합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둘째로, 중생은 성결을 위해서 필요하다. 창조 시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원의를 소유하였으나, 타락함으로 모두를 상실했다. 이제 인간은 상실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의 본성과 기질이 의와 거룩함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셋째로, 중생은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도덕적으로 아무리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도 중생하지 아니하면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지고, 불못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웨슬레는 말했다. 그러므로 중생은 구원을 얻는데 가장 기본적인 단계이며, 구원의 문이다. 넷째로, 중생은 내세에서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이다. 왜냐하면 사악한 인간은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영혼 속에서건 죄가 지배하고 있는 한 그 속에 행복이 있을 수 없다. 행복은 우리가 중생하고 악한 본성이 변화될 때에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다.

 

 

중생의 방법은 성령에 의한 것인데, 성령이 인간의 영혼 속에서 어떤 방법으로 작용하는지 그 과정은 어느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주님께서도 바람의 향방은 알 수 없는 것처럼 중생의 과정은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프뉴마]라는 단어로 이점을 잘 설명하셨다. [프뉴마]`' spirit이라는 말도 되지만 또한 `바람'이라는 말로도 사용된다.

 

 

< 9-10 >

 

바람의 움직임이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령에 의한 중생의 사건도 육신의 눈으로는 알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6)라는 말씀처럼 거듭나기 이전의 옛사람 즉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알지 못한다. 자연인은 완전히 타락하여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인간이다. 영적으로 수면상태에 있으며, 영적인 것에는 전혀 무지하다. 그는 진노의 자식이요, 죄의 종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자연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모든 죄인에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성령)이 이미 임의로 불고 있기 때문이다(8). 은총에 의해 치유된 눈(grace-healed eyes)에만 성령의 사역은 보여진다.

 

 

밤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는 아직 영적인 일에 대하여 깜깜하였다. 그는 중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하여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라고 대답함으로 자신의 영적 무지를 나타내었다. 그는 비록 "이스라엘의 선생"(10)이었지만 중생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요, 권위 있는 성서 해설자로서 니고데모도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 11-13 >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중생의 도리를 이해 못하자, 예수님은 또다시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심으로 사안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하늘의 일'을 예증하기 위하여 '땅의 일'즉 바람과 같은 것을 사용하여 교훈하시지만 회의론자는 믿지 못하였다. 주님은 성령에 의한 중생의 확실성을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11)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하늘의 일들에 대하여 말하셨다. 우리는 스스로 하늘로 올라갈 수 없지만, 하늘이 보내준 인자를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받고 믿어야 한다. 스스로를 '인자'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거 하셨다.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메시아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되었다.

 

 

< 14-15 >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무서운 불뱀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이 물려 죽게 되었다. 모세가 그들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이스라엘 진영 한가운데 세우라고 하셨다. 그것을 쳐다본 자는 즉시 해독되어 죽음을 면하였다(민 21:4-9). 놋뱀에 치료 효과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쳐다본 자는 구원을 얻었다. 이는 기독교의 구원의 인간의 행위(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고 하였다.

 

 

여기에서 구리뱀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주님께서 불뱀의 독 같은 죄에서 우리를 치유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문제는 믿음이다. 놋뱀을 쳐다보면 낫는다는 믿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다(15).' 주님의 십자가만이 죄에 물든 인간을 위한 유일하고도 충분한 치료책이다.

 

 

< 16>

 

아마도 이 구절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이 가장 좋아하고 암기하는 성구일 것이다. 루터는 이 구절을 '작은 복음서'라고 불렀다. '작은 복음서'는 사복음 전체를 축소한 한 마디이다. 여기에는 사랑의 기원, 대상, 넓이와 깊이, 구체적 표현, 목적 등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찾아오시는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주셨음이라"요일 4:10).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대신 죄인을 양자 삼으셨다.

 

 

예수님은 이런 사랑이 구체화되어 나타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믿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사라지고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아픔이 극대화한 것이다. 사랑은 주체가 있으면 객체 즉 대상이 있어야 사랑의 꽃이 핀다. 한 편만 있는 사랑은 짝사랑이다. 하나님에게 짝사랑의 괴로움을 주지 말자. 독생자를 믿으므로 영생을 얻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사랑을 주고받자.

 

 

.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

 

거듭남의 중요성 : 타락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들어갈 수 있다. 타락한 본성이 변화되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금 회복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엡 4:22-24). 거듭남은 구원의 시작이요, 성도의 삶의 출발이며,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과 특권을 얻는 축복이다. 거듭남은 천국의 문안으로 들어서는 첫 순간이다.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속 사람이 거듭나서, 전인격적인 새로움을 받아야 한다.

 

 

성부의 사랑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라는 말은 기독교 신관의 중심을 표현해 준다. 사랑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시는 것이다. 사랑이 죄인에게 주어질 때, 이것이 은혜이다. 사랑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요 관계적이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사랑은 언제나 대상을 요구하며 관계적 상황이 필요하다. 관계적인 사랑은 동시에 역동적이다. 이것이 사랑이 역사하는 힘이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실제적인 힘이요 능력이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은 중생의 창시적 원인이다.

 

 

성자의 대속 : 예수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내신 그리스도(구세주) 임을 고백하는 데에 기독교 신앙이 있다. 이것이 부인될 때, 기독교 신앙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적 기독교의 중요성도 몰락한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과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하다.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만남이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기독론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다. 성자의 대속은 중생의 공로적 원인이다.

 

 

성령의 사역 : 성서에서 죽음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분리 또는 소외이다. 육체의 죽음이 나의 영과 몸의 분리이듯이, 영적 죽음은 나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관계 단절이다. 중생은 육체가 아닌 영적 탄생 즉 성령과 나의 영의 재연합, 재교제이다. 태초에 흙으로 된 인간에게 성령이 생명을 주셨듯이, 오늘도 성령은 새 생명을 주신다. 성령은 중생의(구원의) 행위자(agent)이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위하여'(for me) 하신 일은 성령을 통해 내 안에서 (in me) 이루어진다.

 

 

오직 믿음으로 : 은혜는 구원의 근원이요, 믿음은 그 조건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창시자 또는 원소유자이시고, 나는 그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소유하는 주체자이다. 이점에서 나의 믿음이 중요하다. 진실로 아들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진다(요 1:12).

 

 

중생 이후의 성장 : 성경과 우리의 경험은 함께 구원은 즉각적이기도 하며 또한 점진적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구원은 중생에서 시작하여, 성화를 거쳐 영화에서 완성된다. 비록 성화(성결)에 대한 견해 차이는 있지만, 어느 교파도 성화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칭의 되고 중생함과 동시에 성화는 시작된다. 성화의 과정은 성도의 삶이요, 성장이다. 중생한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고전3:1-3)는 성장하여(벧전2:2) 어른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요일2:12-14, 고전13:11).

 

 

자연적 출생과 중생 : 중생은 마치 자연인의 출생과 비슷하다. 웨슬레는 "이 유사점들을 하나하나 비교하면 어찌 그렇게도 꼭 들어맞나!"라고 감탄한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즉 중생하기 전에는 영적 의미에서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그의 다른 영적 감각들도 잠자고 있다. "그는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산 인간이지만 죽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가 중생하면 모든 것이 변화된다. 그는 이제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고,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천사들의 찬양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영적 변화가 중생이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갈라디아서 6장 설교문] "믿음을 심어야 영생을 거둔다"(갈 6:7-9)

안녕하세요. 오늘은 갈라디아서 6장 설교문 중에서 믿음을 심어야 영생을 거둔다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제 목 : "믿음을 심어야 영생을 거둔다" 구 절 : 갈 6:7-9 ▶ 오늘의 말씀 ◀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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