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요한복음 1장 주일설교 말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성도(요 1:19-28)

복음의 능력 2020. 9. 2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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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1장 주일설교 말씀 중에서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성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성도(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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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1:19-28(19)

 

 

1.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증언이라고 하겠습니. 19절에 보니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냈다"라고 합니다. 여기 보낸 사람들이 있고 요한에게 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맡아보던 사람들이었고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맡아보던 사람들입니다. 24절을 보니깐 이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여러 당파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리새파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회적인 계급으로 보면 중간계층의 출신이었고 율법이나 전통이나 관습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율법주의를 주장하다가 형식주의 외형주의로 빠지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번번이 주님과 대결하는 모습을 우리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세례 요한에게 파송받아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이러한 아주 완고한 바리새파에 속해 있던 사람들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바리새파에 속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누가 요한에게 보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그냥 유대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유대인이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는 5, 마가복음에서는 7, 누가복음에서는 5번이라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무려 70여 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즉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유대인들은 예수의 사역을 반대하는 자들로써 묘사되고 있습니다.

원래 유대인이란 말은 유다 지파를 가리키는 단어였는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을 때에 남쪽 유대에 속했던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함께 묶어서 유대인이라고 했고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켜서 유대인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일반 유대 시민이나 특히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를 가리켜 유대인이라 불렀습니다. 렇기 때문에 성서학자들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낸 사람들은 산헤드린이었다고 합니다.

 

 

산헤드린이란 포로기 후기에 생긴 것으로 예루살렘에 있었고 유대교적 최고의 평의회였습니다. 회원은 모두 71명이었고 그 구성원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산헤드린의 구성원이었습니. 이 산헤드린은 사법적 기능은 물론이고 입법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까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를 대표하는 자들로서 종교에 관계된 모든 문제를 심리하였습니다.

 

 

이만한 힘을 가진 자들이 지금 바리새파에 속해있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낸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세례 요한과 면담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다음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세례 요한의 명성은 대단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중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오해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눅 3:15, 행 13:25) 세례 요한의 사역은 그렇게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고 흥분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몰려와서 저들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라고 하는 말을 세례 요한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심판을 예고할 때에 저들은 무서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 언약 맺은 백성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잘못된다 하더라도 형벌을 면제해 줄 것이라고 자만하면서 이기심과 탐욕에 매여있었으며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고 회개를 재촉하므로 저들의 양심을 각성시켰습니.

 

 

이러한 소문은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요한과 그의 개혁을 시기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며 자기들은 회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는 세례 요한의 회개의 외침은 부당하고도 모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낸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히브리 예언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들을 위하여 위대한 통치자, 다윗과 같은 구원자가 올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열렬한 기대 속에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보내시는 구원자가 분명히 올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도 저들은 세례 요한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던 것입니다.

 

 

2.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세례 요한을 향하여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네가 도대체 어떤 놈이냐? 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 사람들이 호기심에서 그랬든지 또는 질투심에서 그랬든지 "네가 누구냐?"라고 질문한 그 질문 속에는 알고자 하는 탐구심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질문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평생 질문만 하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질문이 없는 인생은 발전이 없고 질문만 하고 사는 인생은 의문만 자꾸 커져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발전적이고 건강한 사람은 믿음 안에서 질문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도 질문이 없는 사람은 '태어났으니까 사는 날까지 사는 거지 뭐. 신경 써가면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 이렇게 묻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질문만 하는 사람은 '인생은 왜 고생만 해야 되나? 살고 살면 무엇이 되나 결국은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 아닌가? 산다는 것이 뭐야? 내가 날마다 돈 벌려고 이렇게 수고하고 땀 흘리고 해서 벌은 돈을 가지고 뭘 하는 거지 아무리 수고해도 결국 죽는 것 밖에 내 앞에 다가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또 오래 살면 뭘 해 맨날 수고하고 먹고 싸고 그러다가 죽는 것 밖에 또 무엇이 있어?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무엇이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무엇이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어서 뭘 해 천국은 가봐야 아는 것이지 천국이 정말 있는 것인가?" 이렇게 해답 없는 질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낙심케 하고 자꾸만 부정적으로만 몰고 가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방탕과 죄악에 던져 버리게 되고 그러다가도 안되면 자살까지 하는 자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이 가지는 질문은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사는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살고 천국 가기 위해서 살아가지요" 날마다 수고하면서 땀 흘려돈 벌어서 무엇하나? "나도 행복하게 살고 없는 자도 구제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많이 쓰기 위하여 돈을 벌어야지요"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에 바다 한가운데서 큰 태풍을 만나서 죽음 직전에 놓여있을 때에 그 배에 탄 276명 모두가 저들의 운명에 대해서 희망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것으로 마치는 것 아닌가?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한 사람 사도 바울은 이제 정말로 죽는 것 자니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니요 당신들은 살 수 있습니다. 반드시 살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식사를 하십시오"라고 희망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저들 항해에 지친 자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다 받아먹고 정신을 차리고 생명을 되찾았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파선할 수밖에 없는 그 배는 '멜리데'란 섬에 무사히 댈 수가 있었습니다. 똑같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진 저들이었지만 유독 바울 혼자서 생명의 약속을 받고 죽을 것만 생각하던 저들에게 생명의 소망을 어떻게 줄 수 있었습니까? 똑같이 죽음의 배에 타고 있었지만 믿음이 없었던 자들은 죽음과 절망만 보았고 믿음이 있었던 바울은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고 하나님이 음성을 들었고 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남에게 생명을 주는 자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질문에는 믿음이 따라야 올바른 해답이 나오고 희망과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은 다음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이 그냥 질문으로 끝난다면 사람들을 미치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음성을 들으면서 이 질문을 할 때에는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오늘의 삶을 더욱 힘차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인생의 질문을 하나님과 함께 풀어가지 아니하면 절대로 올바른 해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문제만 자꾸 가져다 주지만 그 해답은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생의 문제의 답은 성경말씀에 다 주어져 있습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제는 많이 가지고 있었고 말씀까지도 가지고 있었지만 저들은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 중에 살았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질문하러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계속 질문만 했지 세례 요한이 아무라 바르게 일러주었어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담담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분들의 어떤 문제라도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긍정적으로 풀어가므로 문제가 변하여 희망이 되고 사명을 되찾아 힘차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세례 요한은 사람들로부터 "네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담긴 두 번째 교훈이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가

 

 

"네가 누구냐?"라는 단순한 질문도 받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질문의 대상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나가서 복음을 증거 하게 될 때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계속 사도들은 열심히 전도하고 신자의 수는 오천명 아니 그 이상으로 점점 불어갔습니다. 사도들은 핍박하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잡아다가 심문을 합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저들은 쭉 둘러서서 하는 말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라고 질문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더라 지방에서 말씀을 증거 할 때에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바울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바울이 가만히 보니까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어 보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향하여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외쳤습니다. 그가 말대로 일어나 뛰어 걸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바울을 보고 저 사람은 신이 삶으로 변한 사람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보고서도 그 행하심과 말씀을 보고 들을 때에 "네가 누구냐?"하고 했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 장군을 물맷돌 하나로 이마를 맞추어 꼬꾸라 뜨릴 때도 골리앗은 블레셋 적군의 이름 있는 장군이요 갑옷을 입고 놋 투구를 쓰고 놋단 창을 가졌던 싸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린 소년으로 전쟁의 준비는 아무것도 되어있지 않았고 그의 무기는 시냇가에서 주운 매끄러운 돌 다섯과 양을 칠 때 사용하던 지팡이 하고 물매만 가지고 블레셋 장군에게 나아갔습니다. 이 어린 소년을 본 블레셋 장군 골리앗은 "네가 나를 개로 알고 막대기를 가지고 왔느냐?"라고 하면서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다윗이 던진 물매 돌 하나가 골리앗 장군 이마에 적중하면서 그 위엄이 당당하고 살기가 당당하던 골리앗 장군은 땅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화평합니까?"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항상 즐겁기만 합니까?" "당신의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항상 즐겁기만 합니까?" "당신의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요?" 이렇게 여러분들은 어디서나 언제든지 좋은 면에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 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 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내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됩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 모두는 세례 요한처럼, 사도바울처럼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 이 시대를 변화하고 새롭게 하는 주역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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