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아났습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성도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생명의 빵(요 6:1-29)
1517년 10월 31일은 독일의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교 교수이며 가톨릭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의 수사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교황청에 대항하여 95개 항의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내 걸면서 교회 개혁을 시작한 날입니다. 34세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이며 거짓 평안(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고 비판했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der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주장했습니다. 그의 개혁의 횃불은 전 유럽에 삽시간 퍼져나가 16세기 기독교 개혁운동에 첫 단추를 끼우게 되엇습니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당했습니다. 루터와 개혁자들의 주장으로 가톨릭과 차별화된 기독교가 탄생했으며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로 돌아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오직 은혜와 그리스도로 구원을 얻는 믿음이 회복되었습니다. 루터의 개혁의 성과를 정리하자면
1) 행위나 성지순례나 교리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강조
다섯 “오직Sola” 강조: Sola Scriptura(성경), Sola Fide(믿음), Sola Gratia(은혜), Solus Christus(그리스도), Soli Deo Gloria(하나님께 영광)
2) 만인 제사장설(Priesthood of all believers)로 성경을 자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읽게 함
3) 찬송가를 4부로 작곡, 작사하여 교회음악을 발전시킴.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음악은 또한 마귀를 몰아내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음악은 사람의 모든 분노, 음란, 교만, 그리고 모든 악을 잊게 해준다. 나는 음악을 신학 다음으로 중요하게 보며 무한히 아낀다.”
4) 독일 농민들이 영주들의 착취에 저항하여 일으킨 독일 농민전쟁(1524~1525년)도 처음에는 동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복음을 독재체재로 왜곡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이라고 주장하여 영주들에게 강경진압을 요구함. 복음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농민혁명에 대해서 복음은 오직 양심만을 상대한다고 주장함.
이제는 개혁에서 회복으로 가는 시대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바른 방향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 오직 성경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두 가지 표적을 묵상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표적(sign, σημεῖον)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서에서 표적이란 단어는 17번 나옵니다. 표적이란 일반적으로 어떠한 사람이나 어떠한 사물을 알 수 있도록 하는 가시적인 표시를 의미하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요한복음의 신학적 해석을 위한 열쇠가 되는 말로 일종의 계시를 구성하는 표현입니다. 헬라에서의 세메이온(σημεῖον)의 의미는 고전 그리스어에서 방패 위에 그려져 있는 문장이나 혹은 반지에 있는 인장을 가리키도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 표적이 나오는데
1) 물을 포도주[사실은 생명수]로 만드신 표적 (2장)
2) 가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표적 (2장)
3) 베데스다 수영장에서 38년된 중풍병자 고치신 표적 (5장)
4) 오병이어로 5000명 먹이신 표적 (6장)
5)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표적 (6장)
6) 태어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 (9장)
7) 죽은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11장)
이중 4번째와 5번째 표적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이 두 가지 기적이 공관복음서에도 나옵니다. 요한복음 6장은 너무 길어서 두번(요 6:1-35, 요 6:36-71) 나누어서 강해합니다.
1. 빵과 물고기 기적 Jesus Feeds the Five Thousand(오병이어, 요 6:1-15)
(1) 그 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니(2) 큰 군중들이 따르니 이는 환우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3)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4)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5)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큰 군중들이 그분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물으시기를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7) 빌립이 대답하기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빵이 부족하리이다”(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11) 예수님께서 빵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생선도 그렇게 그들의 원하는대로 주시다.(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13) 이에 거두니 보리빵 다섯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14)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기를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대언자라” 하더라.(15)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왕으로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1-3절.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 후에(메타 타우타)’은 5장의 베데스다 표적이 상당히 지났음을 나타냅니다. 요5:1의 '유대인의 명절'을 유월절로 본다면, 1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디베랴 바다[헤롯 빌립 분봉왕이 당시 디베랴 황제에게 헌정한 도시 디베랴 Tiberia의 이름을 따름] 또는 게네사렛 호수[히브리말로 수금이라는 뜻인 게네사렛/긴네렛](눅 5:1)라고도 불리웁니다. 갈릴리 바다는 남북으로 약 23킬로미터, 동서로는 가장 먼 곳이 약 13킬로미터이며 둘레는 66킬로미터 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눅 9:10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 벳새다 동네로 갈릴리 바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벳새다는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고향입니다(요 1:44). 큰 군중들이 그분을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환우들에게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눅 9:11은 예수님께서 그분을 따라온 군중들을 영접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병 고칠 자들을 고치셨다고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환우들을 고쳐주신 사건들에 대하여 많이 기록하지 않고 몇 가지만 자세하게 기록했으나, 본문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많은 환우들을 고쳐주셨음이 확실합니다(마 8:16; 9:35; 요 20:30; 21:25).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셨습니다. 갈릴리에 가보면 지중해보다 212미터 낮은 지대에 있고[대협곡 The Great Rift에 속함] 오전에는 바람이 동풍이 불어 호수가에서 언덕을 향해 말씀을 전하면 수많은 군중들이 자연 음향(natural acoustic)으로 확성기 없이 잘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전시간에 주로 설교와 강의를 하셨습니다. 오후가 되면 바람이 서풍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오후에는 주로 환우를 고치시고 기적을 베푸셨답니다.
4-7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의 3년 반 공생애 중에 맞으신 세 번째 유월절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던 것 같고, 그 이유는 전후 문맥에서 볼 수 있듯이, 일부 유대인들이 그분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요 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큰 군중들이 그분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심은 그분께서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었습니다. 빌립이 대답하였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빵을 가지고도 부족하리이다.” 2백 데나리온은 2백명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요즘 돈으로 2,000만원(약 18,000달러)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의 빵값입니다. 제대로 배불리 먹으려면 5,000만원도 부족할 것입니다.
8-9절. 그때 제자 중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이'라는 원어(파이다리온 paidarion)는 '어린아이'라는 뜻입니다. 한 어린아이가 먹을 음식을 찾고 있던 안드레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그 떡이 '보리로 만든'(크리디노스) 빵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물고기도 다른 복음서들처럼 그냥 물고기(익스수스)가 아니고 '작은 물고기'(옵사리온)라고 표현합니다. 그 어린아이가 도시락으로 가지고 온 양식인데 그것을 기꺼이 사도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10-13절.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군중들로 앉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 잔디가 많았습니다. 막 6:39는 그곳에 '푸른 잔디'(클로로스 코르토스)가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5천명쯤 되었습니다. 마 14:21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명'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20세~60세 해당하는 남자로 전쟁이 났을 때 군대에 갈 수 있는 남자들입니다. 그러면 군중의 전체 수는 약 2만명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셨는데, 주님께서 떼어주시는 빵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 빵을 바친 어린아이가 만일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었다면 그는 무릎을 치면서 놀라움과 감탄의 소리를 연발하였을 것입니다. “아! 내가 바친 그 빵과 물고기가 나누면 그만큼 재생되고, 곱샘 급증(multiplication) 되는 것을 보고 신기하고 놀랍기만 합니다. 2이 4되고, 4가 16되고, 16이 256되고... 빵이 나눌수록 줄어들지 않고 기하급수로 증가됩니다! 이 아이는 집에 돌아간 후에도, 그의 평생, 그 놀라운 사건으로 인해 뛰는 가슴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날 오후 오병이어 기적에 참여한 모두의 가슴은 평생 뛰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배부른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하나도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먹는 음식이 남았다고 그냥 버리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과 또 음식을 먹은 후에는 앉았던 장소라도 깨끗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 같습니다. 부스러기 음식을 모두 재활용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은 음식 처리를 철저하게 하고 뒷정리를 잘해야 합니다. 쓰레기 소각도 모범적으로 해야 합니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남은 조각들을 거두었는데, 보리빵이 열두 바구니(baskets)에 찼습니다. 그 오후에 주님께서 행하신 빵 기적은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게 한 풍성한 기적이었습니다.
14-15절.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대언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대언자”라는 말은 구세주로 오시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신 18:15).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대언자'라고 말한 것은 그분의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왕으로 삼으려는 줄을 아셨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제국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가난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였습니다. 사회적 평안과 물질적 풍부함은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관심사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보다 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죄와 구원의 문제입니다. 죄 문제의 해결 없이는 참된 평안과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속제양인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군중을 떠나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그가 거기에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마 14:23; 막 6:46).
2. 예수님께서 풍랑이 이는 갈릴리 호수 위로 걸어오심(요 6:16~21)
(16) 이제 저녁이 되니제자들이 바다로 내려가서(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님은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18) 큰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오리쯤 가다가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니 (20)말씀하시기를 “내니 두려워 말라 It is I be not afraid“ 하시니(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도착하니라.
16-18절. 갈릴리 바다 북동쪽에 위치한 벳새다 언덕에서 빵 기적을 행하신 후에 날이 저물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한적한 곳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이 장소를 오늘날 아람어로 다브가(Tabga)라고 부르는데 “일곱 샘 seven springs”라는 뜻입니다. 이미 제자들은 바다에 내려가 배를 타고 가버나움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어두워졌고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오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큰 바람과 풍랑을 만났고 물결을 인해 괴로이 노를 저으며 고난을 당했습니다(마 14:24; 막 6:48). 바로 그 날 오후에 제자들은 놀라운 빵 기적을 보며 기뻐하였는데, 그 날 밤에 그들에게 어려운 위기가 생겨 고생을 하였습니다. 막 6:52에 보니 “이는 그들이 마음이 굳어져서 빵의 기적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더라 For they considered not the miracle of the loaves: for their heart was hardened.” 그날 오후에 벳새다 들녘에서 일어난 빵 기적을 감사하며 감격하며 기쁨에 충만하지 못하고 이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로 위기가 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야 하고, 주님과 만나면 내 삶의 목표, 방향, 관점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없으면 풍랑과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19-21절. 제자들은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를 저어 15리쯤 갔습니다. '15리'라는 원어는 “25 내지 30스타디온”이라는 말인데, 1 stadion은 185미터입니다. 그래서 약 6킬로미터의 거리를 진행하고 있을 그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때가 '밤 4경쯤'이라고 말하는데, 밤 4경은 새벽 3-5시입니다. 아마 제자들은 큰 바람과 파도와 씨름하느라고 여러 시간을 소비한 것 같습니다. 그 힘든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바다 위로 걸어오는 물체를 보고 두려워하였으나 그분이 예수님인 줄 확인하고 그분을 기쁘게 영접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니 두려워 말라.” 그들은 기뻐서 그분을 배로 영접하였고 배는 곧 그들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건은 확실히 또 하나의 기적입니다. 역사상 바다 위로 걸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몹시 힘들어하던 그 밤에 비상한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 기적이 확실함은, 첫째로 그 밤에 제자들만 배 타고 떠났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둘째로 제자들이 15리쯤 배를 타고 바다 가운데로 나갔다는 사실과, 셋째로 제자들이 바다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 두려워했다는 사실과, 넷째로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확인하고 기쁘게 영접했다는 사실 등에서 분명하게 증거됩니다. 그 밤에 그 배에 탔던 제자들은 다 이 사건의 증인들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밤에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배에 영접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마 14:33). 빵 기적과 바다 위로 걸어오신 이 기적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합니다. 위험한 위기에서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을 재발견하는 기쁨으로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새롭게 깨닫게 되며 감사드립니다. 예배가 회복된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심 I Am the Bread of Life(요 6:22-29)
(22)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군중들이 배 한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님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더라)(24) 군중들이 거기에 예수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26)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빵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무궁한 생명이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28)그들이 묻기를 “저희들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
22-25절.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그분의 제자들이 탔고(전통본문) 예수남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른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실 수 없었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가지 않고서는 바다 건너편으로 가실 수 없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디베랴에서 다른 배들도 주님의 축사하신 후 빵을 먹었던 그곳에 가까이 왔었다.) 디베랴는 갈릴리 바다 서남쪽 해안 중부의 도시입니다. 군중들은 거기 예수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자기들의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그분을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찾고 그에게 나아오려는 열심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온다고 충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동기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분에게 오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한 열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바른 생각과 마음을 가진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26-27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빵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무궁한 생명이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찾아온 군중들의 잘못된 생각과 마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그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단지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도 그런 기적의 떡을 먹을 것을 기대하며 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빵은 사람에게 필요하지만, 결국 다 썩는 양식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고 가르쳤던 것이다(전 1:1). 세상의 모든 것들과 부귀영화와 그 모든 즐거움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요일 2:17). 사람은 빵을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결국 늙고 병들고 쇠하고 죽고 맙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허무한 데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도 예수님 당시의 군중들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세상의 것들, 즉 물질의 복이나 육신의 건강과 행복에 있지 않은가요? 그런 것들은 썪는 양식과 같습니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하고 결국 다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무궁한 생명이 있는 양식을 위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은 영원무궁하시며 그분을 아는 것이 무궁한 생명입니다. 요 17:3, “영생(life eternal)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의 보내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벧전 1:23-25,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28-29절. 그들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무궁한 생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무궁한 생명을 얻습니다. 믿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복된 일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무궁한 생명이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더욱 믿읍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첫째로 여기며 믿는 일을 가장 크게 여깁시다. 교회를 귀히 여깁시다. 말씀 받는 일은 귀히 여기며 사모하며 힘써 받읍시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썩는 양식을 위한 것이지만, 이 일은 무궁한 생명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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