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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장 강해설교말씀] 싸움과 분쟁의 원인(약 4:1-10)

복음의 능력 2023. 2. 1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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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장에서는 세상 정욕의 욕심 때문에 사람들이 다투고 싸우는 것에 대해서 말씀한다. 사람들이 자기의 욕심을 더 채우기 위해서 싸운다. 손해가 나면 화를 내고 양보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게 된다. 성도는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한다. 

 

싸움과 분쟁의 원인(약 4:1-10)

 

3장에서 서로 간의 다툼과 논쟁의 원천이 되는 시기심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4장에서는 세상적인 것을 바라는 욕망과 또 세상적인 연락과 교제에 지나친 가치를 두어 마침내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는 것에 대하여 설명한다.

Ⅰ. 야고보는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의 서로 다투는 것과 그 다툼의 원인이 되고 있는 세상적인 욕망에 대하여 꾸짖고 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1절). 유대인들은 대단히 선동적인 백성이어서 로마인들과 자주 다투었고 반면에 대단히 논쟁을 좋아하고 또 파당적이어서 자기네들 사이에서도 때때로 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야고보가 이 서신에서 그 잘못과 악덕을 꾸짖고 있는 부패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대부분이 말다툼을 일삼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야고보는 그들의 싸움과 다툼이(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들의 조국을 위한 열심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그들 속에 가득 찬 정욕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겉으로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경건함이 있는 척하면서 그 속에 숨기고 가린 것들을 인간의 교만과 악덕과 탐심과 야욕과 복수심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유대 민족은 그들이 완전히 멸망되기 전까지 로마의 권력과 많은 투쟁을 벌여왔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까지 불필요한 분규를 자주 일으켰고, 그들의 공통의 적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해서로 다른 방법을 주장함으로써 분파와 파당을 짓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하여 그들이 논쟁을 일으킨 문제가 선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을 때에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좋지 못한 원칙으로부터 나온 것이 되고 말았다.

1. 그들의 세속적인 육적인 욕망이 그들 속에 싸움과 다툼을 일으켰고, 또 그것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여기서 이 욕망들이 정복되어야 할 것을 충분히 나타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적인 욕망이 내적으로는 싸움을 일으키고, 외적으로는 다툼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격렬한 정열과 욕구는 먼저 그 지체 내에서 싸움을 일으키고, 그다음엔 상호 간에 불화를 조성한다. 양심과 부패함 사이에 다툼이 있고 부패함 상호 간에 싸움이 있으며, 그들 자신 안에서 일어난 이 논쟁에서부터 그들 상호 간에 다툼이 일어난다. 이것을 개인의 경우에 적용해 볼 때, 우리의 친척들과 또 이웃 간의 싸움과 다툼이 우리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는 욕망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권력과 지배에 대한 욕망과 쾌락과 부에 대한 욕망들 중에서 하나 혹은 그 이상이 연합되어 이 세상의 모든 다툼과 논쟁을 일으킨다. 이처럼 모든 싸움과 다툼이 우리 마음의 부패에서부터 시작되므로 그러한 다툼을 고치는 올바른 방법은 뿌리에 도끼를 가져다 놓고 있다가 우리 속에 다툼이 일어날 때 그 욕망을 억제시키는 것이다.

2. 이러한 욕망들은 이제 그들이 맛보게 될 실망을 깨닫고 없어져야 한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2절)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큰 것을 욕심내고, 또 그것을 로마인을 이기거나, 너희 중의 상대방을 억압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너희는 또 너희의 열렬한 소망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타도해 버림으로써 너희 자신의 만족할 만한 행복과 쾌락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엾게도 너희가 이런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견해에 사로잡혀 서로 상대방을 죽이는 행위를 하고 있는 동안 너희는 모든 노력을 소모하고 있으며, "너희 자신이 충혈당하고 있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욕심은 결국 실망으로 끝나게 되며, 설사 그 바라는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마음이 가라앉거나 만족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기록된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란 말은 우리가 구하는 행복은 결코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세속적이고 육적인 욕망들은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허락지 않는 병적인 요소임을 주시해야 한다.

3. 죄된 욕망과 성향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의 발생과 기도를 배척한다. 즉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2절). 너희가 싸우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 구하는 바를 허락하실 것인지를 너희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의논하지 않고 또한 너희의 길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며 너희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알려드리지 않고 다만 너희 자신의 부패한 견해와 성향을 따라서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계속적인 실망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4. 그 밖에도 너희의 욕망은 너희의 기도를 해치고 또 너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하나님 보시기에 역겨운 것이 되게 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3절). 이 말씀은 나타내 주는 바와 같이 "아마 때때로 너희가 대적자를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지도 모르나, 그것은 너희가 얻은 유익을 더욱 계발시켜 너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믿음과 경건을 더 촉진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다만 그 승리와 기도를 통하여 교만과 공허함과 사치와 그리고 정욕만을 나타낼 뿐이다. 너희는 권세와 풍요함과 관능과 정욕적인 번영 속에 살지를 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처럼 야비하고 천한 목적으로 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처럼 야비하고 천한 목적으로 인하여 너희의 기도를 부끄럽게 만들고 하나님께 불명예를 끼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너희 기도가 이루어질 리가 없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세상적인 일을 다루고 있는 방법과 그 일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게 우리의 목표가 올바른 가를 보는 법을 배우자. 인간이 세상적인 일에 종사하여 살 때에(그들이 무역가나 농부라고 가정을 해보자) 하나님께 그 일이 번영하기를 기도하나, 그 기도의 응답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잘못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자기들의 직업과 맡은 일은 수행하는데 성공을 얻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들의 가진 것으로 선을 행하려고 함이 아니고, 그들의 정욕을 위하여 사용하기 위하여, 즉 좀 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으며, 좀더 좋은 옷을 입을 수가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결국 그들의 교만과 공허한 마음과 정욕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을 얻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안에서는 그런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무엇을 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는 그것을 주시든지, 아니면 그것 없이도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며, 또한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모두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기도가 성취되지 못하는 것은 잘못 구하기 때문인 것으로써, 우리가 올바른 목적과 올바른 방법으로 구하지 않았거나 또는 믿음과 열성으로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신앙과 열의가 없이 냉랭한 기도는 거절되기를 바라는 기도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기도가 은혜 가운데서 나온 말이 아니고 우리의 욕망으로부터 나온 말일 때 그 기도는 응답이 없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Ⅱ. 우리는 이 세상과 더불어 모든 죄악 된 교제를 피하라는 훌륭한 경고의 말씀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4절) 세상과 벗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여기서 간음하는 여자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들에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탐욕은 보통 우상 숭배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간음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우리가 헌신하여 결혼한 그분을 저버리고 다른 것과 결합하는 것이다. 세상에 마음을 둔 사람에게는 이러한 낙인이 찍혀 잇고,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적의를 나타낸다. 사람은 이 생에서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세상에 두고 자기 행복을 거기서 찾으려 하는 사람은, 또 자기 자신과 세상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세상과 우호관계를 끊기 위한 아무 일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왕좌 위에 세상을 올려놓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구조적인 반역과 배반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라"(4절). 누구든지 이러한 원리 위에서 행동하며 세상이 주는 만족으로 미소 지으며 세상과 계속하여 벗하여 사귀는 자는 그의 영혼과 행동으로 오직 그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 됨을 나타낼 뿐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러므로 불의하고 우상 숭배적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부터 싸움과 다툼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적의를 품고 있는 자에게 평화가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고도 번영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의 영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라. 그러면 너희는 자신을 세상과 벗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영은 이 세상이 그렇듯이 너를 질투케 하고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한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인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5절). 인간 본래의 마음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쳐 주기를 인간의 마음에 계획하는 모든 생각은 항상 악할 뿐이라고 하였다(창 6:5). 본래적으로 부패함은 시기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경향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본래부터 인간에게 있는 영은 항상 악한 생각을 하나씩 둘씩 만들어 나가고, 그 생각과 대화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소유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게 만든다. 화려함과 쾌락을 사랑하며 그러한 것을 얻기 위하여 싸우고 다투게 되는 것은 세상과 더불어 짝한 결과로부터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일치됨이 없이 진정한 우정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다툼을 피하기 위해 그들이 좀 더 고결한 원리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과 좀 더 고결한 영이 그들 속에 거하고 계심을 보여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것들이 사는 방법과 행동대로 우리가 살고 행동하는 그 이상의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색한 사람이 되게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관대한 사람으로 만든다. 세상의 영은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과 그 환상을 성취하기 위하여 재물을 축적하고 계획을 세우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필요와 안락에 관심 갖게 해 주며 우리의 능력에 따라 우리 모두 선을 위하여 행동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의 영과 반대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를 소망한다면, 선을 행하여야 한다.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는 본래부터 우리 안에 거하는 영혼을 바르게 하고 치료하며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는 곳에, 이 세상의 영과는 전혀 다른 새 영을 또한 주신다.

Ⅲ.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교만과 겸손의 차이를 구별하시는 것에 대하여 배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6절). 이 말씀은 구약의 말씀인데, 시편에는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을 낮추시리이다"(시 18:27)라고 하였고 또한 잠언에는,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면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라고 하였다. 여기서 두 가지의 것을 관찰해 보자.

1. 교만은 치욕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물리치신다. ‘안티탓세타이’(498)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교만을 대적하여 치신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배신자요 원소요, 그리고 그의 면류관에 위엄에 대한 반역자로서 알려지는 것보다 더 큰 불명예는 없을 것이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 대항하는데, 그의 지식에 하나님의 진리에 대적하며 그의 의지로써 하나님의 법도에 대적하며, 또한 그의 열정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만한 자를 대적하시는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못된다. 교만한 영혼들이여! "하나님께 그대들을 대적하리라"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원수로 삼은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의 마음이 교만으로 가득 찬 것처럼 그 얼굴이(조만간에) 수치로 가득 차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시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에서 교만을 멀리하여야 한다.

2.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에게 영광과 도움을 주신다. 은혜는 불명예에 반대되는 것으로써 영광스러운 것이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주신다. 또한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곳에는 다른 모든 은혜들도 함께 주실 터인데, 6절의 시초에 기록된 대로 "더욱 큰 은혜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참 은혜를 주실 때에는 언제나 풍성하게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가진 것을 옳게 사용하기 때문에 더 많이 받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는데, 이는 겸손한 자들은 은혜가 필요함을 알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며, 또 얻은 후에는 감사할 줄 알기 때문이다. 겸손한 자는 분명히 많은 은혜를 받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Ⅳ.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전적으로 순종하여야 할 것을 여기서 배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 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7절). 그리스도인은 세상과의 교제를 끊고, 본래적인 인간의 마음속에 만연하고 있는 교만과 시기를 경계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영광을 돌리는 법을 은혜로써 배워야 한다. "너희는 너희를 다스리는 자에게 의무감으로 순종하듯 하나님께 순종하여 너희의 벗에게 사랑과 이해로 대하듯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또 너희의 지식을 하나님의 진리에 복종시키며, 너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즉 하나님의 계율과 섭리의 뜻에 복종시켜라." 우리는 종이므로 순종해야만 하되 두려움으로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순종해야만 한다. 그것은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양심의 요구에 따라서 행하는 순종이어야 한다. "너희가 얼마나 많은 순종의 의무를 지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복종하여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다스림으로 해서 너희에게 해를 주시지 아니하고 오히려 유익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사탄은 열심히 싸움을 걸어오므로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꾸준히 경계하고 투쟁하여야 한다. 만일 사탄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한 유순한 복종이 재난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며, 멸시와 불행을 당할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탄의 공포의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만일 사탄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 우리의 쉬운 생활과 세상에서의 승진에 방해가 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 교만과 게으름의 유혹에 대항하여야 한다. 만일 사탄이 우리의 불행과 고통과 환난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의 섭리에 있다고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탄의 지시를 따라 이것들을 기피하도록 유혹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분노케 만드는 이 같은 도전에 대항하여 맞서야 한다. 악을 행케 하는 지혜를 따라 우리 자신이 좀먹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일들을 통하여 마귀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7절). 만일 우리가 비열하게도 유혹에 굴복하면,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의 뒤를 쫓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우리들로부터 도망가 버릴 것이다. 결심은 유혹으로부터 문을 닫고 빗장을 단단히 걸게 해 준다.

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 복종적인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8-10절).

1.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8절). 배신한 마음은 하나님의 발아래 가져와져야 하고, 하나님과 대화라고 교제하는 생활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혼은 하나님과 사귐을 갖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일상 예배와 규율과 모든 의무 안에서 하나님과 가까이하라."

2. "손을 깨끗이 하라"(8절).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손을 정결케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고 하면서 우리의 손을 피와 뇌물과, 모든 불의하고 잔인한 일과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깨끗이 지킬 것을 권고한다. 죄의 종이 된 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 믿음과 회개와 거듭남으로 손을 정결케 해야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도와 헌신으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다 헛되고 말 것이다.

3. 두 가지 생각을 지닌 마음은 반드시 정결케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세상사이에 멈추어서 있는 사람은 본문에서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표현되었다.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은 신실하며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위선은 마음이 부정한 것이므로, 하나님께 올바르게 순종하고자 하는 자는 손을 깨끗이 함과 같이 마음을 정결케 하여야 한다.

4.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9절). 하나님께서 무슨 환난을 주시든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것으로 알고 그을 때 그것을 멸시하지 말고 오직 슬퍼하라. 또 환난 당한 자들을 동정하고 함께 슬퍼하며, 하나님의 교회가 당하는 재난을 슬퍼하라. 너희 자신의 죄와 타인들의 죄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라. 다투고 분열할 때가 애통하여야 할 때이고 또한 다툼을 일으키는 죄를 위하여 슬퍼해야 한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당면하게 될 슬픔의 예언이거나 또는 그 심각성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인간들을 슬픔을 싫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슬픔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진정으로 웃을 자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야고보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무관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경고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이 최악의 상태에 이르기 전에 미리 주의를 받았으므로, 공허한 환락과 육적인 쾌락을 버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슬퍼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5. "주 앞에서 낮추라"(10절). "영혼의 내면적 활동이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슬픔, 환난 등 외부적으로 표현된 것에 적합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라." 여기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영혼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바라시는 바 영혼의 겸손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악한 행위를 저지른 것을 슬퍼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라. 이것이 자신을 낮추라는 말의 의미이다."

Ⅵ. 야고보는 여기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것을 권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8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10절). 의무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그들을 가까이 이끌어 주실 것이다. 믿음과 신실과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의 구원을 위하여 너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 밀접한 교제가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불쾌하실 것을 알고 참으로 회개하고 겸손해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주는 유익을 곧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 중에서 들어 올리시며, 고통당하는 우리 영혼을 지켜 주시고 위로하여 주실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안전하고 영광스럽게 하시며 우리의 길을 하늘나라로 향하게 하셔서, 우리의 마음과 애착을 이 세상보다 더 높은 곳에 두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며(사 57:15), 가난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고(시 10:17), 마침내는 그들을 영광으로 들어 올리실 것이다. 영광에 앞서 있어야 할 것은 겸손이다. 이 땅에서 가장 겸손함에 대한 보상은 하늘나라에 있는 최고의 영광이다.

[이사야 53장 강해설교말씀] 메시아의 고난과 대속사역(사 5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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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장에서는 고난받을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을 것을 예언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 죄인의 모형으로 오셔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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