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요한복음 5장 강해설교말씀] 베데스다 수영장에서(요 5:1-47)

복음의 능력 2023. 3. 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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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안식일의 논쟁과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영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육으로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베데스다 수영장에서(요 5:1-47)

                        

본문: 요한복음 5:1-47

요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 5:8)

주제: 38년 중풍병자로 고생하던 환우가 치유받듯이 고질병에서 해방되자.

다음 주일은 10월 마지막 주일로 “기독교 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일본 교회의 영향을 받아 흔히 “종교개혁”이란 단어로 사용되는데 내용은 기독교신앙개혁을 말합니다. 먼저는 기독교가 종교(인간제도 human institution)라기보다는 복음(계시, Divine Word)입니다. 두 번째는 기독교만 개혁하자는 말이지 타 종교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가 이런 용어 정리를 해야 합니다. 개혁신앙은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i),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로(Solus Christus), 오직 교회로(Sola Ekklesia)입니다.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가서(ad fontes) 교회를 개혁하자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은 요한복음 5장을 묵상하겠습니다. 생명수 시리즈가 계속됩니다. 베데스다 수영장에서 주님께서 생명수로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무궁토록 목마르지 않은 생명수를 여인에게 공급하신 후 수가 성 주민들에게 2박 3일 말씀부흥회로 큰 역사를 이루신 주님께서, 오늘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오셔서 스데반문(일명 사자문, 양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를 기념하는 예배당이 나옵니다. 이 예배당 맞은편에 베데스다 수영장을 방문하십니다.

1. 안식일에 베데스다 수영장에서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치심(요 5:1-18)

(1)그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수영장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거기 삼십 팔년 된 환자가 있더라 (6) 예수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낫고자 하느냐?”(7) 환자가 대답하기를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저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8)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11) 대답하기를 “저를 낫게 한 그분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12) 그들이 묻기를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니(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분이 누구신지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14) 그 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15)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치신 분은 예수님(예슈아)이라 하니라(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게 된지라(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니(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 후에'라는 원어(메타 타우타 meta tau'ta)는 '이 일들 후에'라는 뜻으로 시간의 상당한 경과를 나타냅니다(요 3:22; 6:1; 7:1 등). '유대인의 명절'은 아마 유월절일 것입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절기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절기이며 또 겨울이 지난 다음에 맞는 첫 번째 큰 절기입니다. 

2-4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Bethesda)라 하는 수영장(pool)이 있는데 거기 행각(porches 덮인 콜로네이드 또는 현관) 다섯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아람어(בית חסדא)로서 '자비의 집 house of mercy'이라는 뜻입니다. '행각' 혹은 '주랑'은 벽이 없고 지붕과 기둥만 있는 방을 가리킵니다. 이 수영장은 Via Dolorosa (“슬픔의 길 Sorrowful Way ויה דולורוזה”)이 시작되는 지점에 가기 전에 있습니다. 마리아의 어머니 안네를 기념하는 교회당(Church of Saint Anne) 맞은편에 있는 이 베데스다 수영장은 두 개의 저수조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바위를 파서 만들었고, 다른 것은 큰 화장석 블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두 저수조 사이의 분리 벽이 있는데 물이 북쪽 저수조에서 남쪽 저수조로 흐르도록 하였습니다. 북쪽 저수조에 일정한 양의 물이 차면 수문을 열어서 남쪽 저수조로 흘려보냈는데 그때 환자들은 물이 동한다고 여겼습니다.

5-7절. 이곳에 38년된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생의 거의 절반을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Wilt thou be made whole?” 이에 환자가 대답합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저를 수영장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는 병 낫기를 사모하였으나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수영장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병고침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병 낫기를 간절히 사모하였지만 좌절하고 낙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수영장의 움직이는 물보다 더 놀라운 자비의 구세주이십니다. 38년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광야에서 불순종 때문에 방황한 세월의 숫자와 같습니다. 2년 내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착할 수 있었던 그들은 10번의 불평으로 38년간 고생을 했습니다.

8-9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38년 동안의 투병 생활을 끝내게 하시는 치료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는 즉시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38년 동안 익숙했던 자리를 박차고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집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물건을 들고 다니는 것이 금지사항입니다.

10-13절. 유대인들은 병 나은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은 잘못된 안식일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그 날은 온종일 휴식하며 노동이나 세속적 업무를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장사하는 자는 가게문을 닫고 회사나 공장을 경영하는 자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직원들로 쉬게 해야 합니다. 그날 온종일 쉬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로 모이기 위해서입니다.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는 자는 믿음이 자라고 견고해집니다. 그것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유익은 구약시대의 토요 안식일뿐 아니라, 신약시대의 주일 안식일에도 적용됩니다. 침대를 들고 가던 그 사람에게 묻기를 “너에게 잠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고침을 받은 그는 그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님께서 이미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14절.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충고하시기를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죄와 병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병은 근본적으로 죄 때문에 왔습니다. 천국에는 죄가 없기 때문에 병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계 21:4는, “[천국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고침 받은 병자는 다시 죄를 짓지 말아야 했습니다. 만일 그가 다시 죄를 지으면 그에게 더 심한 병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15-18절. 이에 그 사람이 자기에게 질문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치신 분은 예수님(Yeshua)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침대를 들고 귀가하게 하였다 하여 그분을 핍박하고 죽이려 했습니다(전통본문).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반응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는데, 그것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 즉 전도하는 일입니다.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막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십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 때문에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안식일만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실 그분께서 증거 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신적 인격이십니다. 신적 구주(Divinie Savior)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38년 된 병자도 쉽게 고쳐주셨습니다. 그분은 몸의 병뿐 아니라 영혼의 죄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예수님의 사명은 살리시는 사역 The Authority of the Son(요 5:19-29)

(19)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23)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무궁한 생명(everlasting life)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28) 이를 이상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19절. 예수님께서는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 그분을 핍박하고 죽이려 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Verily, verily, I say unto you)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으로서, 거짓말들이 많은 세상 속에서 진리를 말씀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분은 아들이 아버지의 행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고 행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을 두고 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종종 내려보내셔서 베데스다 못의 물을 움직이게 하셨고 그때 그곳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병자가 고침을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행하신 일을 보셨고 이제 자신도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20-21절.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이상히 여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기 때문이라.”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그분의 행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이십니다. 또 그분은 '그보다 더 큰 일'도 보이시는데, 그것은 사람의 혼을 살리는 일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혼을 살리는 일 곧 중생(重生, 거듭남)은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큰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십니다.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권(主權)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11:27에서도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십니다. 거듭남은 구원의 시작이요 부활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사람의 혼이 살아야 장차 몸도 부활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심은 사람의 혼을 먼저 거듭나게 하시고 후에 몸도 다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22-23절.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이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판을 아들의 손에 맡기셨기 때문이며, 아버지께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신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공경함같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 함입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들은 그분께서 보내신 아들을 공경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은 그 아들도 공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24절.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무궁한 생명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무궁한 생명(everlasting life)을 얻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믿음은 그의 인격과 그의 말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그분의 인격과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무궁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얻었다'는 원어는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믿는 자는 무궁한 생명을 소유한 자입니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씀은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의롭다 하심'의 복음입니다. 믿는 자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 정죄함이 없습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육을 따르지 않고 영으로 쫓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메타베베켄 metabebeken “is passed”)는 말씀은 구원의 확실성을 보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말씀들과 일치합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세소스메노이 sesosmenoi ‘are ye saved’)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히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헤기아스메노이 hegiasmenoi ”we are sancrified“), 그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무궁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테텔레오켄 teteleioken ‘that are sanctified’).”

25절.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들을'이라는 전통사본 원문(아쿠손타이 akousontai ‘they that hear’ 미래 중간태)은 '자신들을 위해 듣는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며 듣는 자는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것은 구원의 현재적 측면인 중생(重生, 거듭남)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살리시는 한 중요한 단계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다시 살아난 것(엡 2:1)이 거듭남입니다.

26-27절.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셨고 또 사람됨을 인하여 심판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셔서 구원받을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대속 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그가 한 사람인데 많은 사람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할 수 있으셨던 것은 그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대속 사역을 통해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여기시고 무궁한 생명을 주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8-29절. “이를 이상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의 사람 살리시는 사역의 목표는 몸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무덤들은 다 열리고 시체들은 부활할 것입니다. 장차 두 종류의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할 것이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을 할 것입니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하나 믿음의 증거로서 중요합니다. 믿는 자는 죄짓지 않고 선을 행하고 거룩의 열매를 맺다가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생에 들어갈 것입니다. 두 종류의 부활에 대해서는 다니엘도 증거하기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단 12:2).

3.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 Witnesses to Jesus(요 5:30-47)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32)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분이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니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분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eternal life)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search)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그러나 너희가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1)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47)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30절.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21절에서 그분은 자신이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주권자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절에서 그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앞의 말씀과 모순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본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신이 아버지와 항상 일치되게 판단하심을 말씀하시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31-32절.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분께서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님은 지금 단지 자신에 대해 주관적 증거를 하는 것이 아니십니다. 사람이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 증거할 뿐이라면 그분의 증거는 참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증거하시는 분께서 따로 계시며 그분의 증거는 참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를 의미하십니다.

33-35절.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니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을 기뻐하기를 원하였도다.” 세례[침례자] 요한은 진리(τῇ ἀληθείᾳ)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언급하신 것은 그가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유대인들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요한을 대언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켜서 비취는 등불과 같았고 유대인들은 그 빛을 기뻐하였습니다. 바로 그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성신님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요 1:33), '하나님의 아들'(요 1:34)이라고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36절. “그러나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役事) 곧 나의 하는 그 역사(役事)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거가 분명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셔서 이루게 하실 일들을 말합니다. 그 일들이란 그분께서 행하시는 기적들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을 통해 이루실 속죄사역을 말합니다. 그 일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할 것입니다(요 20:30-31; 행 17:31; 롬 1:4).

37-38절.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모습(shape)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분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그에 대해 증거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요한에게 세례[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온 사실을 가리킵니다. 마 3:16-17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시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9절. “성경책들을 자세히 연구하라. 이는 그것들을 통해 너희가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함이니 그것들은 곧 내게 대해 증거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는 구약성경의 증거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증거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합니다. 눅 24:25-27, “미련하고 대언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대언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44-45,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딤후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풍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분을 증거하셨고, 예수님께서 친히 이루실 일들이 그분을 증거하고, 또 구약성경이 그분을 증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은 충분합니다.

40-43절.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니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그를 믿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와서 하나님의 진리를 교훈하는 자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와서 자기 사상을 전하면 사람들은 그를 영접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 가운데서는 이단들이 영접을 받을 것입니다.

44절.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유대인들은 세상적 영광, 즉 인간의 칭찬과 세상적 자랑을 구하였습니다. 그것은 교만과 욕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돈과 육신적 쾌락과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눅 14:3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45-47절.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모세는 율법에서 성막 제도, 제사 제도, 절기들, 할례 등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세의 글들도 믿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습니까? 오늘날도 성경을 믿지 않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영적 어두움과 불신앙과 불순종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쾌락과 세상의 부귀, 명예,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들은 신앙의 큰 방해물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고 사랑하며 성경 말씀을 사모하며 읽고 듣고 배우며 묵상해야 합니다. 38년간 중풍병자로 고생한 환자처럼 이런 영적 중풍병자인 나 모습을 재발견하고 예수님 안에서 참된 자유와 치유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디도서 3장 강해설교말씀] 이방인의 문제(딛 3:9-15)

 

[디도서 3장 강해설교말씀] 이방인의 문제(딛 3:9-15)

디도서 3장에서는 이단에 대해서 말씀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했다. 복음을 전해주어도 그들은 듣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거짓 이단들이 있다. 성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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