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4장에서는 신랑이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장한 신부를 보면서 신부의 아름다움에 찬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랑이신 예수님이 신부인 성도를 보면서 기쁨으로 노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부의 삶이 신랑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으면 주님은 기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신부의 아름다움(아 4:1-16)
[1절]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4장은 신랑이 신부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에 대해 말하는 내용이다. 여기에 묘사된 신부는 모든 면에 완전한 자이다. 그것은 영화의 상태에 이른 이상적 교회의 모습이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랑은 신부에게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고 말한다. 주께서는 교회를 심히 아름답다고 여기신다. 그것은 교회 자체가 스스로 아름다워서라기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그것이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랑은 신부의 눈이 비둘기 같다고 말한다. 비둘기 눈은 순결함과 온유함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성경에서 눈은 인도자를 가리키기도 한다(민 10:31). 교회를 인도하는 목사가 순결하고 온유하다면 비둘기 눈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성경에서 눈은 사람의 마음의 의향을 가리키기도 한다(마 6:22-23). 교인들의 마음의 의향이 온유하고 순결하다면 그 교회는 비둘기 눈과 같다고 할 것이다.
또 신랑은 신부의 머리털이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같다고 말한다. 그것은 신부의 긴 머리털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가지런하고 단정한 머리털은 교회의 거룩함과 순종함을 가리킬 것이다.
신부의 눈은 비둘기 같고 그 머리털은 아름답다고 묘사된다. 교회는 바른 교훈을 하는 목사를 인도자로 세우고 성도들은 온유하고 순결한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또 교회는 거룩함과 순종함으로 단장해야 한다.
[2절]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신랑은 신부의 아름다운 이에 대해 세 가지 점을 말한다. 첫째, 그것은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같다. 목욕시키기 전에는 몸에 지저분한 것들이 많이 묻어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그것들의 털이 희고 깨끗하다. 둘째, 그것은 털 깎인 암양 같다. 암양은 털을 깎인 후에는 털이 곱고 단정할 것이다. 셋째, 그것은 새끼 없는 것이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다. 그것은 윗니와 아랫니가 서로 쌍을 이루고 있음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신부의 이는 깨끗하고 곱고 나란하다.
이(齒)는 음식을 씹어 위(胃)로 넘기는 역할을 한다. 앞니, 송곳니, 어금니 등 이의 기능이 약간씩 달라도 음식을 소화시킨다는 목표는 동일하다. 여러 주석가들은 그것이 교회의 양무리를 먹이는 목사들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과연 충성된 목사들은 교회에서 어린양을 먹이는 좋은 이의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음식을 먹는 데 많이 비유하였다(요 6:47, 51). 구약 율법에 말한 새김질하는 짐승(레 11:3)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가리키는 뜻이 있어 보인다. 성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교역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각 성도는 좋은 이를 가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고 또 그것을 묵상해야 할 것이다.
이상적 신부는 그 이가 곱고 나란하고 희고 깨끗하다. 이상적 교회는 목사가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일을 잘 감당하는 목사를 가진 교회이다. 이상적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씹어 양무리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또 이상적 교회는 일반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일 것이다. 일반 성도들도, 교회의 목사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을 잘 음미해야 할 것이다.
[3절]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신부의 입술은 홍색 실 같은 입술, 즉 붉고 가는, 아름답고 건강한 입술이며, 그의 입도 예쁜 입이라고 묘사되었다. 입이나 입술은 말에 관계될 것이다. 아름답고 예쁜 입술과 입은 성도들의 선한 말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람의 말은 그의 인격을 반영하므로 성도는 선한 말과 덕스러운 말만 할 수 있어야 한다. 잠언 10:20,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선한 말은 붉은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깨끗게 씻음받은 말을 상징하는 것 같다. 또 이 붉은 색은 속죄의 복음을 상징할지도 모르겠다. 그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복된 말씀이다. 로마서 10:15,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또 너울 속의 신부의 뺨은 석류 한 쪽과 같다고 묘사된다.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지며 애통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너울 속에’라는 말은 그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남들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과 자기 양심만 아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사실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양심이 맑은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에 우두머리라고 고백하였다(딤전 1:15).
우리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받아서 선하고 덕스럽게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만방에 전파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부족이 있을 때,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며 고치자.
[4절]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신랑은 신부의 목이 무기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한 다윗의 망대와 같다고 말한다. 그것은 높고 견고한 망대이다. 신랑은 그 망대에 일천 방패 즉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용사들이 전쟁에 나갈 때 쓰는 방패들이든지 아니면 용사들의 승전 기념 방패들일 것이다.
신부의 목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신자들의 참된 믿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믿음뿐이다. 또 성도의 믿음은 망대(요새, 피난처)와 같고 방패와 같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입을 전신갑주를 말하면서 ‘믿음의 방패’를 언급하였다(엡 6:16). 믿음은 사탄과 악령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패와 같다.
망대와 같은 교회에 일천 방패가 달린 것은 참 믿음이 완전한 방어의 길임을 나타낸다. 요한일서 5:4-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일천 방패가 과거의 용사들의 승전 기념 방패일지라도 의미가 있다. 교회 역사는 히브리서 11장에 증거된 대로 많은 믿음의 용사들, 믿음의 승리자들의 역사이다. 믿음의 용사들 가운데는 노아, 아브라함, 여호수아, 다윗도 있고 히스기야와 요시야도 있다.
신랑의 눈에 비췬 신부의 모습은 망대와 같다. 그것은 높고 견고하다. 그것은 성도들의 믿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성도들의 복음 신앙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 자신을 연합시킨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일천 방패와 같다. 그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힘이다. 또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지상에서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하고 견고한 믿음을 가지자. 견고한 망대 같은 목을 가지자.
[5절]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신랑은 신부의 유방에 대해 묘사한다. 유방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뿐 아니라 어린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교회가 어린 신자들을 양육하는 기능을 나타낼 것이다. 그것은 주로 목사들의 사역이다. 목사들의 일차적 임무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권면하고 경계하고 위로함으로써 그들의 신앙 인격을 온전케 하는 기능이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사도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비슷한 말씀을 반복하셨다(요 21:15-17). 목회는 곧 목양(牧羊)이며 그것은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과 같다. 사도행전 2장은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기록하였다(행 2:42).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말하기를, “그가[주께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교회에]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였다(엡 4:11-12). 성도를 온전케 하고 몸을 세우는 것이 목사들의 임무이며 목회의 목표이다.
교회의 영적 성장은 목사들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성도에게 어느 정도 주어진 임무이기도 하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했다(살전 5:11, 14).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와 같이, 교회는 어린 신자들을 양육한다. 목사들과 성도들이 권면하고 위로하는 기능을 잘할 때 교회는 아름다운 모습을 지닐 것이다.
[6절]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계속 신랑의 말이다. 2:17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본절 앞부분의 원문은, 어떤 영어성경들처럼(KJV, NIV), “날이 새고 그림자가 갈 때까지”라고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날이 새고 그림자가 갈 때’는 슬픔과 고통이 많은 시대가 지나고 새 시대가 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것은 어떤 주석가들의 생각대로 구약시대가 지나고 메시야가 오신 신약시대를 암시할지도 모르지만, 고난의 세상이 끝나고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영광의 천국이 임함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신약시대에 천국은, 물론, 영적으로 이미 시작되었고(마 13장) 그것은 장차 주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2:17에서는 ‘베데르산’이 언급되었고 그것은 고난의 세상을 상징한 것 같다고 보았다. 본절의 ‘몰약과 유향의 산’은 신약교회를 가리키는 것 같다. 몰약과 유향은 관유와 향을 만드는 재료들이다(출 30:23-25, 34-35). 관유는 성령의 은혜를, 향은 하나님께 올리는 성도들의 예배와 기도와 선한 행실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계 8:3-4; 빌 4:18; 히 13:15-16). 성도들의 선행도 성령 안에서 올려질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이다. 또 이렇게 향기로운 제물이 하나님께 바쳐질 때 우리의 마음도 기쁘고 즐거울 것이다.
날이 새고 그림자가 갈 때가 올 것이다. 구약시대가 지나고 신약시대가 왔으며, 고난의 세상이 지나고 영광과 안식의 새 세계가 올 것이다. 우리는 천국을 대망하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자.
주께서는 피흘려 사신 교회 안에 성령으로 이미 오셨고 세상 끝날까지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요 14:16-18; 마 28:20).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참교회답게 오직 주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며 살자.
[7절]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주께서는 우리를 ‘나의 사랑’이라고 부르신다. 그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하였다(엡 5:2).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요일 4:9).
또 신랑은 신부에게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말한다. 성도들은 자기 자신 속에 부족과 결함이 없지 않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흠과 점이 없는 완전한 자로 간주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러한 완전은 천국에서 잘 드러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세상에서도 인격과 삶에 있어서 흠 없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며 성령께서는 그 일을 도우실 것이다. 시편 110: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시편 101:2,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베드로후서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우리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자. 또 주께서 우리를 완전하게 여기심을 감사하며 실제로 완전한 길에 힘써 행하자.
[8절]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보아라.
주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나의 신부’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주의 사랑 속에 구원의 모든 은혜가 있다.
또 주께서는 우리에게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신다. ‘레바논’은 삼림이 울창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많은 산을 가리킨다. 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은 레바논산의 봉우리들인 것 같다. 성경에서 스닐과 헤르몬은 같은 곳을 가리켰다(신 3:9). ‘사자굴과 표범산’은 레바논산의 특징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그 곳은 짐승들이 많이 사는 험한 산이다.
레바논산은 영적으로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고 악한 자들이 우굴거리는 위험천만한 세상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 산은 앞절의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 그것은 마치 북방의 레바논산과 남방의 시온산이 대조를 이루는 것과 같다. 그것은 세상과 천국의 대조와 같다.
신랑은 신부에게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보아라”고 말한다. ‘내려다본다’는 원어(슈르)는 ‘본다’는 뜻도 되나, ‘간다’는 뜻도 된다. ‘꼭대기에서 . . . 산에서 내려다보아라’는 말은 ‘꼭대기로부터 . . . 산으로부터 간다’ 즉 ‘떠나간다’는 뜻도 가능하다. 박윤선 목사는 이 말을 죄악의 소굴을 떠나 주께서 계신 곳으로 가야 함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주께서는 우리를 ‘나의 신부’라고 부르신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됨을 감사하자. 또 주께서는 우리에게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 마귀의 시험이 많고 악한 일이 많은 세상에서 장차 임할 영광의 천국을 바라보며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로 가야 할 것이다.
[9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신랑은 신부를 함께 자란 여동생을 부르듯이 ‘나의 누이’라고 친근하게 부른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또 히브리서 2:11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말한다.
신랑은 신부가 자기 마음을 빼앗았다고 말한다. 그는 신부의 한 눈이 그의 마음을 빼앗았다고 말한다.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은 ‘네 한 눈’이라는 뜻 같다(KJV). 옛날의 신부는 얼굴 가리개를 하고 겨우 한 눈으로 신랑을 조심스레 보았다. 그것은 신부의 겸손함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랑은 신부의 한 눈만 보고도 그의 아름다움을 알았고 그 마음이 신부에게 사로잡혔다.
눈으로 보는 것은 믿음을 상징하는 것 같다. 광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물렸을 때 그들은 모세가 장대 위에 단 놋뱀을 쳐다보고 고침을 받았다. 믿는 자만 놋뱀을 쳐다볼 수 있었다. 주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4-15).
또 신랑은 신부의 목의 구슬 한 꿰미가 그의 마음을 빼앗았다고 말한다. 성도들의 목의 구슬 꿰미는 말씀 순종의 행위들을 가리킬 것이다. 잠언 1:8-9,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말씀 순종의 선행과 덕은 성도에게 아름다운 장식물과 같다.
주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또 우리는 말씀 순종의 선행과 덕으로써 우리 자신을 단장하자.
[10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신랑은 신부의 사랑이 심히 아름답다고 말하며 그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고 한다. 포도주는 맛이 있고 즐거움을 주는 음료이다. 참된 성도들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막 10:29-30). 이런 자가 참으로 주를 사랑하는 성도이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다(빌 3:7-8). 바울은 주를 사랑하는 성도의 예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성도의 사랑을 증거하였다(벧전 1:8-9).
신랑은 또 신부의 기름의 향기가 모든 향품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 기름의 향기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성도의 선행과 덕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갈 5:22-23).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성도의 선행과 덕은 그 어떤 향품보다 더 향기롭다. 주께서는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나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다(요 15:8).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자. 포도주보다 더 나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자. 사도 바울과 같이, 베드로가 증거한 초대 성도들같이, 주님을 사랑하자. 또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어 향기로운 인격이 되자.
[11절]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신랑은 신부의 입술에서 꿀방울이 떨어지고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도들의 은혜롭고 유익한 말을 가리킨 것 같다. 잠언 10:20-21은,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단 음식이다. 시편 19:10, “[그것이]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젖보다 더 유익한 양식이다. 주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4:4). 베드로는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했다(벧전 2:2). 성경 말씀에 근거하고 그것에 합한 내용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피차 권면하는 성도들의 말들은 꿀방울 같고 꿀과 젖과 같은 말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것이다.
신랑은 또한 신부의 의복의 향기가 레바논의 향기 곧 레바논 백향목의 향기와 같다고 말한다. 성도들의 의복의 향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와 또 거기에 뿌리를 두고 열매 맺는 성도들의 의롭고 선한 행실들을 상징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하였다(빌 3:9). 요한계시록 19:8은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혹은 의]이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피차 권면하자.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믿음으로 받고 또 그 의 안에서 의롭고 선한 일들을 힘써 행하자.
[12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신랑은 신부를 잠근 동산이라고 말한다. ‘잠근 동산’은 주인이 직접 아름답게 가꾸고 보호하고 더러워지지 않도록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동산이다. 그것은 이상적 교회의 모습을 가리킨다. 교회는 주님이 직접 설립하시고 관리하시고 아름답게 가꾸시고 보호하시는 곳이요 죄씻음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딤전 3:15). 거기에는 거짓된 사상이나 부도덕한 죄악이 선전되거나 장려되지 못한다. 성경은 거룩한 교회를 순결한 처녀에 비유한다(고후 11:2-3; 계 14:4-5).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한 교회를 만드시는 것이다(엡 5:26-27). 이러한 교회는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에게 기쁨과 유익을 줄 것이다.
‘덮은 우물과 봉한 샘’은 비슷한 내용이다. 물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상징한다.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요한복음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덮은 우물과 봉한 샘은 더러운 먼지나 오물이 들어가지 않은, 즉 수질 오염이 없는 물을 가진 우물이다. 그 우물의 물은 깨끗하다. 그것은 사람이 마시는 데 적합하고 씻는 데도 합당하다. 이상적 교회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건전하고 유익한 구원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사람들에게 교훈과 위로를 공급한다. 또 그 교회는 사람의 죄를 깨끗케 하는 구원의 활동을 한다.
이상적 교회는 주께서 친히 세우시고 친히 아름답게 가꾸시고 보호하시는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이다. 거기에는 순결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죄씻음과 위로와 기쁨과 영생의 구원을 주는 교훈이다. 우리는 참 교회가 되고 참 교인이 되자.
[13-14절]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신랑은 신부에게서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가 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의 선한 인격과 행위의 열매들을 가리킨다. 또 신랑은 신부에게서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 난다고 말한다. 여기에 열거된 나무들은 다 향나무들이다. 그것들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붓는 향유로 쓰인 관유의 재료들이다. 출애굽기 30:23-25,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오십 세겔과 계피[계수나무 껍질]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이것은 신자들의 선한 인격과 행위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들이며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며 칭찬받을 만한 것들임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성도는 선한 인격과 행실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선행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을 삼으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딛 2:14). 요한복음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에베소서 5:9, “빛[성령]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빌립보서 4:18,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디도서 3:14,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우리는 선한 인격과 행실의 열매를 맺기 위해 분투분발하자.
[15절]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신랑은 12절에서 신부를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라고 표현하였었는데, 이제 그 말을 보충하듯이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라고 말한다. 신부는 ‘동산의 샘,’ 곧 동산을 적시고 동산의 풀과 나무들, 과목들에 물을 공급하는 샘이라고 묘사되며, 또 ‘생수의 우물,’ 곧 사람들의 목을 시원케 할 생수를 길을 수 있는 우물이라고 묘사된다. 또 그는 레바논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시내, 곧 맑고 시원한 물을 공급하는 마르지 않는 시내라고 묘사된다.
본문의 샘물과 우물은 성령의 활동을 상징한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고(요 4:14), 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를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요 7:38-39).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성령을 받았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디도서 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롬 8:9)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고전 3:16).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들은 이미 오신 성령을 다시 받을 필요가 없고 오직 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뿐이다(엡 5:18).
주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고 그는 우리 속에 샘물과 시냇물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으로 행하자.
[16절]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본절은 신부의 말이다. 북풍은 시원한 바람 혹은 추운 바람이다. 그것은 좋은 기후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추위를 가져온다. 남풍은 따뜻한 혹은 더운 바람이며 때때로 파종을 위해서나 추수를 위해서 시기 적절한 비를 동반한다.
바람은 하나님의 섭리나 성령의 역사를 상징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섭리 가운데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기도 하신다. 그의 모든 섭리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성령께서는 바람같이 우리 속에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다.
신부는 바람이 ‘나의 동산’에 불어와 향기를 날리기를 원한다. 성도의 향기는 아름다운 덕성과 선행이다. 그것은 때때로 고난을 통해서도 증거된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전도 여정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었다고 증거한다(고후 2:14-16). 성도에게는 죄성이 남아 있어서 그 죄성을 따라 살면 부끄러운 일들을 행하게 되지만,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 결과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아름다운 열매이며 그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갈 5:16, 22-23).
신부는 신랑이 ‘그의 동산’으로 오라고 초청한다. 그 동산은 신부의 동산인 동시에 신랑의 동산이다. 교회는 우리의 교회인 동시에 주님의 교회이다. 신부는 신랑이 그 동산에 들어와 아름다운 실과를 먹기를 원한다. 그것은 주께서 교회 안에 오셔서 성도들의 선행과 덕행을 통해 기뻐하시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격과 행실이 선하고 칭찬할 만하면, 주께서는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며 받자.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고난도 염려치 말자. 오직 선행과 덕으로 성도다운 향기를 발하자.
[전도서 10장 주일 예배 설교말씀] 작은 어리석음(전 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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