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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2장 하나님 말씀] 사랑의 깃발(아가서 2:4)

복음의 능력 2020. 11. 3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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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오늘은 아가서 2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사랑의 깃발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인 나의 이야기로 풀어보면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도 죄악 가운데 고통받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술람미 여인과 같은 나에게 찾아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주님의 신부로 삼아주셨습니다. 솔로몬도 주변에 많은 여자가 있었지만 술람미 여인에게 찾아와 아내로 삼아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사랑의 깃발(아가서 2:4)

 

단테의 신곡(新曲:Divina Comedia)은 종교 문학의 백미로 알려져 있는 작품입니다. 그의 삶은 비극으로 점철된 처절한 고투의 여정이었습니다. 그의 소년 시절은 그의 사모하던 연인 배아뜨리체의 죽음 때문에 슬픔에 가득 찬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그 후 그의 생의 제2기에는 프로렌스시에서의 추방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제3기에는 유적과 방랑의 생활을 보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실의와 방랑의 생활 가운데서 저 유명한 신곡을 썼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고노의 잔을 마시던 단테는 그의 시련을 통해서 위대한 삶의 원리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사랑의 원리만이 유일한 세력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언젠가 철학 연구를 위해서 프랑스의 산타클로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누가 그를 알아보고 당신이 여기에 어찌 왔습니까? 무엇하러 왔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단테는 나는 평화를 찾아 사랑의 여행을 하는 중이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참으로 유명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의 여행을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숱한 의사 전달의 매체인 언어들 가운데 사랑의 말(Language of Love)만큼 풍부하게 사용되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은 글로나, 말로써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의 전부를 표현할 수 없는 불완전한 언어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이 다 동원된다고 할지라도 수용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들이 최대, 최고, 최종의 표현은 역시 사랑이라는 말과 글입니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노래를 심어줍니다. 사랑은 산물을 시로 고쳐주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온갖 꿈과 환상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적인 명곡, 명작, 명화, 명시는 물론, 모든 예술 작품들이 예외 없이 사랑의 영감 물입니다. 확실히 사람들은 너나없이 사랑을 먹고 사랑을 마시고 입고 사는 사랑의 피조물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입고 사는 몇 가지 류()가 있습니다.

1. 사람들은 [스톨게] 곧 가족애를 먹고 삽니다.

우리가 먹고, 입고 사는 사랑 가운데 스톨게(STORGE)는 특히 ‘‘가족 간의 애정(FAMILY AFFECTION)을 나타내는 사랑입니다. 보통 이것은 혈통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동족에도 여기에 속합니다. 아버지와 자식, 자식과 어버이 관계, 주권자와 백성, 백성과 주권자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사랑입니다.

플라톤(PLATON)은 이[스톨게](STORGE)를 적용하여 말할 때 자식은 그를 낳아준 부모를 사랑하고, 또한 사랑을 받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스톨게](STORGE)는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유산의 힘이 되는 경우에도 적용됩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그 많은 재산을 아깝지 않게 유산할 수 있는 즐거운 힘은 바로 그 자식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랑의 힘, [스톨게](STORGE)때문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이 여기에 사용됩니다.

 

2. 사람들은 [필레오] 곧 우애(友愛)를 먹고 삽니다.

[필레오]의 명사는 [필리아]입니다. 동사 [필레오]친구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정의 사랑을 나타내는 사랑입니다. 어떤 때는 부부간의 사랑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나사로 간에 쓰여진 사랑입니다(11:3, 36). 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필레오로 사랑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요21: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마음에는 항상 주님을 부인했다는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나타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세 번 묻게 되고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던 것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필리아] 혹은 [필레오]는 어떤 경우든 좋고 아름다운 관계를 표현하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인(VINE)은 이것을 가리켜 “부드러운 애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트랜취(TRENCH)는 이것을 직관적이고 정서적인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테이어(THATER)는 이것을 더 감정적인 사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사람들은 우애를 서로 나누어 먹고 살아갑니다.

 

3. 사람들은 [에로스] 곧 성애(性愛)를 먹고 삽니다.

원래 [에로스](EROS)란 말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플라톤(PLATON)은 이 세계는 관념(Idea)의 세계, 곧 영적이고, 정식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Matter)로 나누었습니다. 물질적인 세계에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로 올라가려고 하는 상승작용을 가리켜 에로스(eros)'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적인 것으로, 천하고 추한 것에서 고상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로 상승하려는 정신적인 욕구를 가리켜서 에로스(eros)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것이 이성적인 그리움의 사랑, 성적인 사모로 보편화되었습니다. 그레고니 나지엔젠(Gregry Nazianzen)은 이 에로스(eros)를 가리켜 “뜨겁지만 지속되지 못하는 유한적인 욕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소포클레스(Sophocles)는 이 에로스(eros)를 가리켜 열열한 그리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런 류를 곧, 스톨게(가족애), 필레오(우애), 에로스(성애)를 먹고 살아갑니다.

 

4. 그리스도인들은 아가페를 먹고 삽니다.

‘스톨게’,‘펠 레오’,‘에로스’에서 사람은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이후 그 기능들이 모두 변질되고 전락하였다고 성경은 가리킵니다. 이 모든 사랑의 류들은 그 출발이 어떤 때는 이 모든 것들이 단결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아가페(Agape) 사랑을 시기하고 도전하고, 싫어하고 미워하고, 떠나게 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모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내용입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끼리 주고받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가페 사랑곧 희생적인 사랑, 영원한 사랑을 우리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요한 14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로 인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 및 구절에서 아가페 대한 특색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그 출처가 하나님 자신이요, 대상이 멸망받을 죄인이요, 사랑의 실체가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그 사랑의 성격은 희생(대속의 죽음)이요, 그 사랑의 효능은 구언이요, 그 사랑의 수명은 영원(영생)입니다.

지금 이 사랑의 표현이 구약 아가서에 표현되기를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술람미 여인이 그를 사랑하여 왕궁 잔치집으로 초청하여 주신 솔로몬 대왕의 사랑은 은공을 나타내는 고백적 표현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세상 남자들은 수풀이었지만 자기의 연인이었던 솔로몬은 사과나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 그날 나무 아래 앉아서 평안을 누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달콤한 사과의 맛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솔로몬의 인도를 받아 솔로몬의 궁실로 안내를 받았습니다. 만조백관들의 예을 받으며 일천여 궁녀들의 호위 속에서 솔로몬의 영접을 받는 자기의 행복스러움을 감지하면서 솔로몬이야 말로 나의 사랑의 깃발이라고 고백하고 자랑하고, 높이는 감정에 젖어 있는 장면입니다. “솔로몬은 나의 깃발입니다. 내 사랑의 깃발입니다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덮어주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내 뉘에 깃발이다!

이 말은 술람미 여인에 대한 솔로몬 대왕의 존재성의 위대함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술람미 여인 앞에 솔로몬의 존재는 마치 하늘 높이 달려서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깃발처럼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존재란 뜻입니다. 그 솔로몬 존재의 위대함 때문에, 영광스러움 때문에, 위엄 때문에 술람미 여인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성립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할 때 우리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존재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이와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예수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 존재가 아닌가(아 5:10)? 그는 신중의 신이요, 왕 중의 왕이 아니신가?

 

술람미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승리를 과시하는 말입니다.

고대나 현대나 막론하고 전승지에는 승리자의 깃발을 점령지에 세웁니다. 그것은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표식입니다. 정복과 점령에 대한 승리의 깃발입니다. 지금 솔로몬 임금 앞에 영접을 받는 술람미 여인의 마음에는 솔로몬이 자기를 사랑으로 정복하였고, 인자함으로 자기를 압도해 버린 쾌감과 행복을 노래하기를 그 사랑아 내 위에 기로구나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정복을 당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 세상에 와서 사탄의 영지를 탈환하고,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여 정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개인의 영혼과 가정과 교회는 예수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자신의 승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술람미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보호와 안전을 기구한 말입니다.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이제 과연 누가 나를 대적할 것인가?

이제 과연 누가 나를 송사할 것인가?

이제 과연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인가? 누가 과연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것인가? 환난인가? 곤고인가? 핍박인가? 기근인가? 적신인가? 위험인가? 천사들인가? 군세자들인가? 현재 일인가? 장래일인가? 높음인가? 깊음인가? 어떤 피조물인가?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대신하여 주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8:31-39). ! 지금 내 위에는 예수 사랑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여호와 닛시입니다.

예수는 나에게 사랑의 깃발입니다.

그 언제, 그 누구도 그 무슨 이유도 예수의 깃발 아래 있는 나를 해하거나 빼앗아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영원한 승리를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영원히 승리할 것입니다. 이유는 그 분만이 영원한 승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약속하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였노라’(요 16:33)거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28: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J.G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고 하는 말가운데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먹고, 사랑을 옷 입고 살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삽니다. 친구는 우정을 나누며 삽니다. 부부는 애정을 나누며 삽니다. 그럼에도 이 사랑은 영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아가페(Agape) 사랑만이 우리가 먹고 마실 영원한 주성분이요, 성찬 합니다. 그래서와일드는 그의 옥중기 가운데서 사랑은 성찬이므로 무릎을 꿇고 받아야 된다.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의 마음과 입술에는 주여 우리는 높은 자가 아니요(Domine, non sum dignus)'라고 고백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020년!

우리 모든 경향인은 사랑의 깃발’ 아래서 행복을 창조해 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계를 찾아가서 이 사랑의 깃발을 꽂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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