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설교에서 설교자의 사명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설교자의 사명
박 조 준 목 사
(갈보리교회)
서 론
저는 설교자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전에 현대 목회자들이 도전받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을 먼저 언급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는 무슨 도전을 받고 있습니까?
본 론
목회자의 현대적 도전들
첫째, 황금만능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특징이 소위 물량주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까지도 서로 만나서 주고받는 얘기 가운데 이런 예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인이 몇 명 모이느냐, 교회 예산은 얼마나 되느냐···.” 심지어 가까운 목회자 간에는 목회자 생활비까지 스스럼없이 나눠 보면서 생활비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그 목회자의 비중을 평가하려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이런 물량주의에 깊게 물들어 버렸습니다. 어느 아파트촌의 아이들의 대화 내용이 이러했습니다.
“너 어느 아파트에 사니?”
“거긴 달동네구나.”
“너희 집 몇 평이니?”
“우리 집보다 조그맣구나······.”
일반사회에서는 이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은연중에 목회도 이런 물량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다는 점이 커다란 문제점입니다.
둘째로, 물량주의에서 파생된 권력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들을 보면 ‘방문’이라는 신분증을 가슴에 달고 청와대를 방문하고 나오면 어깨에다 힘주고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자랑할만한 일입니까. 왜 가난한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꺼려하면서도 권력자들을 만나는 것은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환자가 심방해 달라면 시간이 없다고 하고, 경찰서장이 점심식사 같이 하자고 하면 만사 제쳐 놓고 달려 나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이러면서도 과연 우리가 선지자적인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권력자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권력자들은 세상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신령한 하나님의 대사로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권력자 앞에 아부하면서 살아가는 목회자가 살아가는 목회자는 없습니까. 솔직히 오늘 이 시대에 권력에 아부하면서 살아가는 목회자는 없습니까. 아부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아부하는 목회자는 짖지 못하는 개와 같습니다.
셋째는, 자기 중심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3:1~5의 말씀을 보십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위합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100년 만에 수적으로 놀라운 부흥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신앙 상태를 분석해 보면 거의가 자기중심적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들어 보아도 “아버지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하는 기도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해마다 연초만 되면 축복성회라는 것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축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신령한 축복과 세상적인 축복을 구분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축복만을 생각하고, 세상적인 축복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교인이 천만이 아니라 사천만이 되다 하여도 무엇하겠습니까.
목회들에게도 이러한 개인주의는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무슨 유익한 일이 없는가 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달려듭니다. 그래서 현대를 극단적으로 불안한 시대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시대를 패역한 세대라고 표현했습니다.
파수꾼에게 주신 말씀
에스겔 3:16~21까지를 보면 이 패역한 시대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사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먹여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실 때 ‘파수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은 자기가 직접 적과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군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 항상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아군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파수꾼이 자기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면 자신은 물론 아군의 생명까지도 잃게 됩니다. 이 만큼 파수꾼의 책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의미에서 이 민족의 파수꾼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파수꾼을 향해서 세 가지 말씀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너는 내 말을 듣고’, 둘째는 ‘나를 대신해서’, 셋째는 ‘내 백성을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파수꾼이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으려고 하는 사람만이 말씀을 바로 들을 수가 있습니다. 즉 들으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가령 라디오에 비유한다면 라디오의 주파수를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원하는 방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인 주파수를 어디에 맞추어야 하느냐면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말씀을 읽고 있습니까. 말씀을 연구하고 있습니까?
군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복명복창입니다. 지휘관이 지시한 것을 얼마나 잘 들었나 알아보기 위해서 복창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시를 제대로 듣지 못하면 엉뚱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험한 전시일수록 더욱더 그렇습니다. 한 번 실수하면 큰일 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시대적으로 바로 들어야 합니다. 설교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말씀해 주신 것이 현재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는 데서부터 비롯됩니다.
요즈음의 목회자들은 설교 준비와 말씀을 묵상하는 데 시간을 쏟지 않고 교회 정치하는 것에 더 시간을 쏟고 다닙니다. 한국교회가 바로 되는 길은 간단합니다. 교역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올바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가르치면, 한국교회는 바로 됩니다. 결코 노회가 하고 총회가 해서 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은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을 바로 양육하면 자연히 교인들한테 대접을 받습니다. 구태여 정치 운동해서 대접받으려고 안 해도 자연스럽게 대접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어야 합니다. 외국어 잘 몰라도 괜찮고, 철학이나 의학 기타 세상 학문에 조금 어두워도 괜찮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말씀을 바로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현대는 전문화 시대라고 합니다. 가령 의학분야만 하더라도 여러 분야로 나뉩니다. 그중에서 외과 한 분야만 하더라도 성형외과, 정형외과 하는 식으로 자꾸만 좁혀 들어가는 판국인데, 목회자가 어설픈 지식으로 의학용어 들먹이며 설교하다가는 망신당하기 쉽습니다. 괜히 어설픈 지식을 자랑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파수꾼의 첫째 요건입니다.
둘째는, 나를 대신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요,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명이 있을 때 하는 일이 보람 있고,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의미 있고, 보람 있게 살아야 합니다. 사명 없이 사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목회자가 사명을 가지고 목회에 임하면 이보다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사명 없이 이 일을 하는 이처럼 초라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10년 전에 이화여대에서 배우자 직업에 대해서 앙케트를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일 인기 있는 직업이 엔지니어였고, 둘째가 의사, 셋째가 대학교수 순으로 열두 번째가 이발사요, 열세 번째가 목사라고 발표된 것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인기도가 많이 바뀌어서 목사가 네댓 번째쯤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가끔 신학교에 가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추천서를 써 달라고 합니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사명감이 없이, 하나의 직업으로, 요즘 세상이 목사의 직업을 괜찮게 보아주기 때문에, 신학교에 가겠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일정한 교육과정을 거쳐서 목사가 되었다고 할 때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목회를 사명하고 상관없이 모든 것을 사업적으로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러한 신학생들에게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말하기를 “밥빌어 먹기 위해서 목사 되려는 생각 갖고 있으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만두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절대로 교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겸손한 것은 좋지만 비굴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자기 소신과 담력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지 누구의 눈치를 보면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돈 있는 사람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 가서 굽신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대사로서 자격상실입니다.
우리는 돈이 없고, 권력이 없고, 많이 배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사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긍지가 없다면 우리가 설 땅이 없어집니다. 옛 속담에 양반은 아무리 추워도 곁불은 안 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목회자가 굶어 죽으면 죽었지 세상이 끌려 다니거나,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긍지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내 백성을 깨우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교인들이 모르는 길을 알려줘야 합니다. 잘못된 실로 가는 것을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사회의 양심이 되어야 하고, 목회자는 교회의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듣고 안 듣는 것은 그 사람들의 자유입니다. 본문 성경에서도 들으면 다행이려니와 듣지 않으면, 그 피값은 저들에게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깨우치지 않아서, 저들이 몰라서 돌이키지 않았다면 그 죗값은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렇듯이 파수꾼은 깨우쳐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적군이 온다고, 도둑이 온다고 자꾸 깨우쳐야 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깨우쳐 주지 않으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이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그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설교는 이렇게 하자.
이제 목회자와 설교에 대해서 몇 가지 언급하겠습니다.
첫째로, 목회자 자신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지도자와 믿음이 없는 지도자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지도자는 적극적이고, 믿음이 없는 지도자는 소극적입니다. 꼭 같은 것을 봐도 믿음이 있는 눈으로 보는 것과 믿음이 없는 눈으로 보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주전자의 물이 끓어서 뚜껑이 움직이는 것을 본 사람은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움직이는가 호기심을 가지고 본 스티븐슨에 의해서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뉴톤은 왜 떨어지나 하는 호기심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사건들이 다 기적으로 보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탐을 갔던 12명의 정탐꾼을 봅시다. 꼭 같은 장소에 가서 꼭 같은 상황을 보았지만 10명은 부정적으로 말했습니다. 육신적인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 견고한 성곽 그리고 키 큰 사람들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이 믿음의 사람들은 겉만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을 향해 나아가자’고 보고했습니다.
이 말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은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태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하더라도 믿음의 사람은 그 산을 넘어가든지, 돌아가든지, 아니면 뚫고라고 나갑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언제나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지도자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능치 못하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못하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설교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분명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우리 자신이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가 자라나지 못하면 우리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교회는 목회자만큼 자라납니다. 목회자 이상으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먼저 자라나야 합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자연히 따라서 자라나게 됩니다. 모든 면에서 목회자가 앞장서야 합니다. 적어도 교회에 관계된 일에 있어서는 목회자를 따라올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성경을 하늘의 양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요리사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하늘의 양식을 가지고 가장 맛있게 요리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해답은 온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주부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할 때든지 식구들에게 무엇을 먹일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고민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는 어떻게 하면 양무리를 바로 먹일 것인가 하는 점에 온갖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책을 볼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무엇을 하든지 간에 양무리에게 무엇을 먹일 것인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우물을 파야 합니다. 샘물이 나올 때까지 파 보십시오. 반드시 생수가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설교자는 아버지다
죤 스타트 박사는「설교자의 자화상」이라는 책에서 설교자를 가리켜 “설교자는 아버지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설교자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로서의 설교자에 대해서 여섯 가지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는 자녀를 이해합니다.
즉 자녀를 이해하는 설교, 교인을 이해하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똑같은 설교라 하더라도 내가 치는 양무리들에게 하는 설교하고 다른 교회에 가서 하는 설교하고는 나타나는 반응이 다릅니다. 교인들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교회에 한 목회자가 오래도록 시무하고 있으면, 아무리 유명한 설교가가 와서 설교한다 하더라도 본 교회 목회자만큼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본 교회 목회자는 교인들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고, 교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설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명한 설교가는 좋은 설교를 하지만 그 교인들에게 유효 적절한 설교는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아버지는 온유합니다.
설교자의 모습이 무서워서 교인들이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굴을 볼 때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온유하고 부드러워서, 은혜가 되고 존경이 가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라고 했습니다. 또 팔복에서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약하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사실은 온유가 더 힘이 있습니다.
셋째는, 단순해야 합니다.
알아듣기 쉬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초등학교 학생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어느 목회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수준이 낮아서 내 설교 못 알아듣는다”라고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언제나 쉽게 설교했습니다. 어부에게는 사람 낚는 어부의 설교를, 농부에게는 씨 뿌리는 비유의 설교를 얼마나 쉽고, 간단명료하게 했습니까. 우리도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넷째는, 간절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뜨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식이 비뚤어진 길로 나가는데 너 갈라면 가고 말라면 말라는 식으로 방치해 두는 부모를 보았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이 올바른 길로 되돌아오도록 간절하고 뜨겁게 온 정성을 쏟는 것이 부모입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향해서 말씀을 전할 때도 이러한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뜨거운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어디에서 생깁니까. 확신에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확신 없는 설교를 통해서는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말을 해도 그냥 하는 말과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은 설득력이 다릅니다.
다섯째는, 본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강단에서 외치는 만큼 철저하게 그러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이상 불가능합니다. 내가 이렇게 사니 너희도 나를 본받아서 이렇게 살아라 하는 것이 설교의 전부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뿐이고, 그 설교를 나 스스로가 들어야 합니다. 내가 들으면서 내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은혜를 받아야 다른 사람도 은혜를 받습니다. 설교는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해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죄인에게 설교하고, 죽을 사람이 죽을 사람에게 설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전 11:1)고 했는데 이 말은 내가 훌륭하니 나를 본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빌립보서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계속 전진하고 자라 나간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기의 모습을 닮아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계속 주님을 본받으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잘못되면 또 바로 서려고 하는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여섯 번째로는, 영적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버지입니다.
맡겨진 양무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는 목회자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대로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시실 어떤 의미에서 설교라는 것은 가장 약점을 지닌 매개체입니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얼마나 빠르고 효과적입니까. 듣는 매개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기도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사람 앞에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야 합니다.
결 론
목회자에게 도전해 오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황금만능주의·물량주의·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생활로서 그리스도의 대사와 파수꾼의 사명을 잘 감당합시다. 또 믿음을 가지고 자신이 자라나는 자세로 설교하며 기도에 앞장서고 본이 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에 따라서, 각양각색으로 들어서 쓰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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