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알쓸잡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교회 전도에 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프로그램 전도(Program Evangelism)와 능력 전도(Power Evangelism)
이 재 범 목 사
(아세아 연합신학대학 강사)
현재 세계 교회를 통해서 볼 때 전도에 대한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프로그램 전도요, 또 하나는 능력 전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 전도는 방법 중심의 전도입니다. 그러나 능력 전도는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전도 방법입니다. 프로그램 전도는 선포 중심의 전도 방법이요, 능력 전도는 설득 중심의 전도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프로그램 전도는 결신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능력 전도는 제자화에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능력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사람은 동시에 제자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프로그램 전도는 조직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능력 전도는 개인이 받은 능력에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전도 방법이 합리적이라면 능력 전도는 초자연적인 방법에 의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프로그램 전도의 형태를 살펴봅시다.
첫째로 십자군 전도(Crusade Evangelism)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중 전도 집회를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가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둘째로 침투 전도(Saturation Evangelism)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가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전재 속에서 출발합니다. 즉 침투 전도의 전략은 교회 조직의 리더십을 통해 전체 신자들을 동원시켜 그리스도의 증인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총동원 전도 주일 같은 것입니다. 셋째로 개인전도(Personal Evangelism)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양식을 통해서 전도하는 방법입니다. 즉 크리스천이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전도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상에서 든 프로그램 전도 방법들이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전도 방법을 통해서 많은 교회들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 중요한 전도방법이 바로 능력 전도 방법인데 이것을 우리가 이용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능력 전도는 성력의 능력에 의한 전도 방법입니다. 이 능력 전도의 결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는 교회들이 세계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이제는 프로그램 전도와 능력 전도의 예를 살펴봅시다.
먼저 프로그램 전도 중에 십자군 전도의 경우입니다. 1978년 1월, 2월에 시애틀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가 열렸습니다. 그때「미국 교회 성장연구」의 조사에 의하면 그 집회에 434,100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18,136명이 결신을 했는데 9,739명은 재 헌신 자이고, 5,500명이 구원을 받았고 2,847명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중 1,285명이 개 교회에 출석하게 됐습니다. 이 결과는 아주 좋은 결과로 비율로 따지면 전체 참석자의 0.29%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다른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본다면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0.001%만이 개 교회에 출석하는 정도입니다.
둘째로 침투 전도의 경우를 봅시다. 캐나다 써든 갈보리 교회에서 2,3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전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397명에게 사영리를 설명하였고, 100명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단 1명만이 성경공부에 참석했고, 6개월 후에는 그 1명마저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총동원 전도의 예입니다. 광주에서 모교회가 “꼭 한 번만”이라는 표어를 걸고 총동원 전도주일을 지켰습니다. 600명의 전교인이 총동원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 결과 14,000명이 모이게 되었고 그 중 4,000여명이 결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그중 20~30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능력 전도의 결과에 해서 언급하겠습니다.
먼저 미국의 ‘성 바울 성공회’의 경우입니다. 이 교회는 1,000명이 모이는 교회로서 치유 목회를 하는 미국 성공회 중에서는 제일 큰 교회입니다. 둘째는 ‘캠퍼스 교회’의 경우입니다. 이 교회도 주일 예배에 1,000명이 모이는 교회로서 정기적으로 치유 예배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셋째는 ‘크랜쇼 크리스천 센터’의 경우입니다. 1973년도에 300명 모이던 교회가 현재는 9,000명이 모이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강조점은 성경공부, 성령의 은사들, 치유, 축복입니다. 넷째는 ‘멜로디랜드 크리스천 센터’의 경우입니다. 이 교회는 1961년 12명이 가정집에 모여서 시작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1972년에는 18,000명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교회 이름이 예시하듯 생음악이 나오는 음악목회를 하면서 치유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음악과 치유를 통해서 예배를 다이내믹하게 이끌어가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인야드 크리스천 펠로십’이라는 교회가 있는데 1977년에 시작해서 10년이 지난 지금은 약 1만 명의 교인이 모이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치유와 축사를 통해서 교회가 성장하고 있습니다. 1979년 5월부터 9월까지 이 능력 전도를 통해서 3개월 반 만에 1,700명의 신자를 얻었습니다. 현재 이 교회에는 140개의 지교회들이 있고, 도합 4만 명의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능력 전도의 신학적 기초 : 하나님의 나라
한국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성장의 테크닉만 배웠지 교회 성장의 신학적인 배경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능력 전도라는 것도 신학에 기초하지 않았다면 수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성서적인 신학적 기반이 있다면 과감하게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능력 전도의 신학적인 기초는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세계관과 신학
사람이 어떤 세계관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학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어떤 색깔의 안경을 끼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실체가 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서구의 세계관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서구의 세계관은 세속주의의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속주의의 전제는 신적 간섭으로부터 우주가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속주의는 물질주의와 합리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주로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라 영향을 받아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모든 것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물질주의는 우리의 사고를 왜곡시킴으로 초자연적인 세계, 즉 천사들이나 천국과 지옥, 그리스도와 적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희박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다음 합리주의를 생각해 봅시다. 합리주의는 하나님, 타락한 천사들인 사탄, 마귀, 신유의 역사 같은 것에 대해서 잘 설명을 못합니다. 그래서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들이 교인들이 병들어서 기도받기를 원할 때 오늘날은 그런 역사가 나타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이 무당이나 마법사에게 가서 병침을 받고, 급기야는 교회를 떠나고 마는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2.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은 세속적인 세계관과 갈등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서구 크리스천들은 이런 갈등을 실제로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서구적인 세계관, 즉 물질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속화되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초자연주의적인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그 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속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육체와 세상과 악마를 말합니다. 크리스천은 이 세 가지 적과 계속 싸워야 합니다. 성서적인 세계관은 초대 크리스천들의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초대 크리스천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이런 모든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남을 실제로 경험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사탄의 물질적, 정치적 명예에의 유혹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서로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만 배우고 생활로 실행하지 않을 때는 커다란 역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예를 미국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화되기 위해서는 기도가 요청됩니다. 예수께서도 죄는 없었으나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때 친히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적 기독교 신학은 정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성서를 정경으로 믿자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초자연적인 신학을 믿어야 합니다. 즉 기독교 신학은 오늘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기적이 나타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3. 예수의 사역
예수의 이적과 기사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증명해 주는 표적입니다. 그러면 왕국의 표적들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1~2를 읽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그리고 예수께서 나인성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후에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를 보내 “ 오실이가 당신이니이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악귀들을 쫓아내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눅 7:20~21). 그리고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논리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이것을 가지고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왕국의 표적을 두 범주로 나눕니다.
첫째 범주는 사회적 표적들로서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표적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복음 7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 주의 은혜로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 범주는 개인적인 표적들로서 특정 개인에게 주어지는 표적입니다. 여기에는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는 것, 귀신들과 악귀들을 쫓아내는 것, 병든 자를 고치는 것,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것,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는 것, 귀머거리를 듣게 하는 것,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 범주에 속한 이 표적들은 기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표적들의 주된 영향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 문을 열어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대중의 주의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끄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첫째 범주의 표적에만 관심이 있고, 그것만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범주는 초대교회의 예수 당시에나 있었고 오늘날은 그쳤다고 하면서 선택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추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적인 순종이 아니라 첫째 부류의 표적과 둘째 부류의 표적을 다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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