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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구] 설교의 정신 분석학적 이해

복음의 능력 2020. 8. 1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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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설교 연구에 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설교의 정신 분석학적 이해

 

김 호 식 목 사

(경동교회)

 

 

서 론

 

 

우리나라의 무교를 연구해 보면, 세습무 말고 강신무의 경우에 있어 소위 입신이라고 하여 무당이 되는 과정에는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냥 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병이 나서 몸살을 앓고 어떤 심신의 이상상태에 들어간 후에 갑작스러운 치유와 동시에 입신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종교학적으로 말할 때 무교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고 우리나라 천도교의 창시자 최수운의 경우를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수운은 제세안민(濟世安民)하기 위하여 유교, 불교, 천주교 등을 모두 다 섭렵했지만 처음엔 실패했습니다. 그러던 중 186045일 갑자기 몸살같이 몸이 떨려오고 한기가 드는 그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이 병이 무슨 병일까? 아마 그 병은 보통 병은 아닌 것 같고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영적인 몸살이라고 할 그런 병이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에 갑자기 대오각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없는 법열과 희열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바로 입신하여 신적인 존재와 접합하게 되고 신탁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과 설교

 

구약의 예언자들 역시 예언자가 되기 전에 어떤 예언자 병을 앓게 되는데 특히 문서에 기록된 후기 예언자들에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스겔서 315절을 보면 에스겔이 얼마나 병을 앓았나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야웨의 기운이 나를 쳐들어 올렸다. 야웨의 손에 꽉 잡혀 내 동족이 포로 되어 와서 살고 있는 그발강 텔아비브까지 끌려갔다. 칠일이 지난 후에야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운다. 너는 나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듣고 나 대신 그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본문에서 너는 나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듣고라고 했는데 즉 예언자는 하나님의 대신 자라는 말입니다. 나 대신 그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것이지, 거기다가 자기의 지식이나 자기의 많은 생각들을 덧붙여서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못되게 구는 자에게는 그 그릇된 길을 떠나 참 길을 찾아야 한다고 일러 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죄 때문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하나님의 예언자도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의 책임이라고 할까.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뒤에 에스겔은 야웨의 포성에 묶여 벙어리가 되어서 몸살을 치르다가, 22절 이하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기운을 힘입어 열리는 그런 광경이 나옵니다.

 

다니엘서 10장을 보면 정월 24일 티그리스 강가에 혼자 앉아서 환상을 보고 입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니엘은 그 장엄한 모습을 보다가 그만 땅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난 후 몸살을 앓게 됩니다. 즉 정신 나간 사람, 미친 사람 같은 영적인 몸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도 계시를 받던 순간 허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해산하는 여인처럼 너무나 괴로워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너무나 무서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고,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공포에 떨던 순간을 213~4절에서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박국도 3:16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뱃속이 뒤틀리고 입이 떨리고 아랫도리가 흔들리는 경험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 론

 

이와 같이 예언자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예언자 병, 영적 몸살을 앓고 신에 접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점은 우리 설교자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설교자가 되기 전에 먼저 문을 닫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 하겠으며, 하나님의 영에 접하는 순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에스겔처럼 묵상의 시간에 우리의 몸을 위탁해야 할 것이며, 사람 앞에서 말하기 전에 한번 벙어리가 되는 어떤 기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홀로 있는 시간을 통과해서 공적인 생활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소유해야 합니다. 목마른 영혼들에게 물을 주기 전에 먼저 우리의 그릇을 깊은 생의 근원으로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이 사회의 유한한 정황을 옳게 읽기 전에 무한과 먼저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위하여 속죄의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그 자신이 지성소의 휘장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전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예언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고 신탁을 받기 위해서 몸살을 치르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평신도들에게 공부를 시킬 때에도 성경에 관한 이야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읽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중요한 교수법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목사들은 사람들을 영혼의 절대자의 현전에 다가서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우리 자신이 영혼의 문외한이어서는 회중들을 그곳으로 이끌어 갈 수가 없습니다. 먼저 자신이 영적 지성소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만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주의 영으로 하여금 직접 말씀하시도록 할 수가 있습니다.

 

설교자가 자기 설교에 은혜받아야 한다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 입으로 말은 나오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슴속에 계시는 주의 영이 직접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은 내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서 에스겔의 양면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에스겔은 고요한 독거, 혼자 있는 그런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가 하면 사회로 나아가서 거리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막 돌아다니는 면도 보여줍니다.

 

여기에 어떤 법칙이 생기는데 그것은 시대적 정황(context)에 대해 너무 어두우면 사회에 대한 목소리를 상실하게 되고, 또 시대적 정황에 너무 밝으면 영적인 요소가 죽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K. Barth는 성경과 동시에 신문을 읽으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text를 알기 위한 것이고 신문을 읽는 것은 context를 알기 위한 방법인데 성경을 읽지 않고 context만 너무 많이 읽으면 세상 정황은 잘 알지만 반면 영적 요소가 죽어 버리고, text만 읽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전혀 모르면 우리가 설교할 때 회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못하는 소리만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듣는 회중들은 항상 정황 속에 살고 있고 늘 상황과 맞부딪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현 위치를 파악해서 설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의 조화를 어떻게 취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설교자가 병을 앓지 않으면, 고민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설교자가 된다고 말할 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요엘 2:27, 28을 볼 것 같으면 너희 젊은이들은 예언할 것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면 너희 아들과 딸은 환상을 보리라그러니까 환상, 예언, 꿈 이런 것들이 영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미래를 예언하기 때문에 현실감각이 좀 뒤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실과 예언하는 것 사이의 간격 때문에 욕을 먹을 수도 있고 오해를 받을 소지도 안고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설교의 말씀은 항상 조직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환상이 없어집니다. 꿈이 없어집니다. 때때로 논리를 초월해서 현실을 비약해서 비논리, 초논리적인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이 소위 설교의 영성(spirituality)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보통 강의와 다른 것은 거기에 어떤 꿈이 있고 영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은 때때로 논리를 초월하기 때문에 비논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햇빛이 환하건만 산 위에 올라가서 배를 만드는 노아는 얼마나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았겠습니까. ‘저 병신! 햇빛 나는데 배를 만들다니···’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사람은 때때로 사람들로부터 놀림감이 될 각오를 해야 됩니다.

 

현실에 아부하고 현실의 달콤한 말만 한다는 것은 설교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설교에는 어떤 논리(theoretic)보다는 환상적인 것(fantastic)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환상할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설교자로서 제일 어려운 것은 설교 횟수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좋은 우유를 마시려면 소에게 좋은 먹이를 먹여야 되는데, 우리 교인들은 목사님들에게 좋은 먹이 줄 생각은 안 하고 자꾸 젖만 짤 생각만 해요. “젖 나오라, 젖 나오라그러나 먹은 것이 없으니까 나올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런 모임에 와서 우리가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참신하게 재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목회 생활이라는 것이 너무 바빠서 심방하랴, 병문안하랴 장례며 생일이며 너무나 행사들이 많아서 설교 준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도 없거니와 고단하고 지쳐서 책을 펴 놓고는 졸기만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설교하기 위해서 무엇을 채워야 하는데, 채워지지 않았으니 결국 남의 설교집을 들추게 되는 것입니다.

 

남의 설교집을 보더라고 자기의 것으로 소화해서 살을 붙여야 되는데, 정리할 시간조차 없어 남의 것을 먹고 그냥 그 자리에서 설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설교에 회중이 감동하고 삶이 변하고 폭발적인 힘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맥이 빠져 있는데 어떻게 회중들이 그 맥 빠진 설교를 듣고 감격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은 김선도 목사님이 계시는 광림교회 주변의 주민들에게 여론조사를 해 본 일이 있습니다.

당신은 교회를 선택할 때 어떤 점을 보고 선택하십니까?’의 물음에서 교회 종파를 보고 선택하겠다고 응답한 사람이 8.78%입니다.

 

다음에 거리가 가깝고 가기 편한 곳에 가겠다는 응답자는 26.98%입니다. 도시 교인들의 1/4은 그저 가기 편한 데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R.Schuller의 이론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R.Schuller는 교회가 슈퍼마켓 같아야 된다고 합니다. 슈퍼마켓이 사람이 가기 힘든 산꼭대기에 있으면 누가 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도 슈퍼마켓처럼 가기 편하고, 주차하기도 편한 그런 곳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교인들의 구성요소를 보겠다는 응답은 7%이고, 설교를 들어보고 교회를 선택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44.44%입니다. 반수의 교인들은 설교 때문에 갈 뿐 교회를 섬기려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시에서 목회하기 위해서는 회중의 그런 요구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설교는 매저키즘적 자기 과시

 

그러면 설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통계표에도 잘 나와 있듯이 한 50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하나를 해 보면 “textcontext에다가 재해석하는 것즉 해석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변하는 정황 속에 다시 한번 재해석하는 작업이 설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황에다가 가지고 와서 동시대화하는 작업이다.” 동시대화라는 말은 성경이 이천 년 전에 써졌지만은 이천 년 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지금 현대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갔던 유대 민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야가 대립하고 학생과 군인이 대립하는 지금 이 정황에다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다라고 선포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저는 또 한 가지 정의를 내리자면 설교를 매저키즘(masochism)적인 자기 과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매저키즘은 사디즘(sadism)의 반대를 말합니다. 사디즘은 가학증, 매저키즘은 피학대증으로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서 피동 되고 억눌림을 당하는 것을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매저키즘적인 자기 과시다라고 하는 말은 조금 상반되는 개념을 붙여 놓은 이야기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와 회중의 요구가 context의 요구에 의하여 피동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우리에게 압력을 가해 들어오고, 회중이 원하고 있고 그다음에context가 있는 정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예언자같이 병을 앓지 않았던 것처럼, 많은 국민들 가운데서 특별히 영적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사회의 사건들이 모든 국민들에게 동일하다 하더라도 몸살을 앓습니다. 특별히 예민한 사람은 밥도 못 먹고 몸살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예언자의 소질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예민한 감각을 가집니다.

 

예를 들면 6·10사태, 4·13조치 등 보통 국민은 그저 그런가 보다 옛날에 하던 것 또 반복하겠지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장사하고, 열심히 자식 낳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는데 일부의 사람은 속이 상하고 뒤틀려서 견딜 수가 없어합니다. 그런 몸살을 하는 사람들이 설교가가 될 수 있는 소질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앞서 말한 것을 보면 이것은 매저키즘적이라는 뜻이고 자기 과시입니다. 자기 과시란 말은 설교가가 제 잘난 맛, 우월감이 없으면 설교가로서 성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적으면 마음이 안심되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떨린다는 사람은 설교가로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힘이 나고 눈에서 빛이 나면서 말이 쏟아져 나오는 그런 사람이 대설교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소질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설교가는 권위를 가지고 회중 앞에 서기 때문에 당당하고 확신에 차 있어야 합니다. 설교가는 설교에 관한 한 권위자이며 전문가입니다. 왜냐하면 설교의 원초자는 하나님이시며 그것은 설교의 신언성(伸言性)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입, 내 말로 나가고 있지만 그것은 신언성, 즉 하나님 말씀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케리그마는 왕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자가 전하는 선포입니다. 케리그마는 전언이요 선포이지, 절대로 변론이나 해명이 아닙니다. 저쪽 말씀을 이쪽에다가 막 쏟아부어 선포하는 것입니다.

 

“Do as I say and not sa I do”라고 죤 셀덤이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번역하면 내가 말하는 대로 행하고 내가 행하는 대로 하지 말라는 이 말은 설교자가 좋은 말만 하고 행위가 없다는 것을 비판하는 말입니다. 설교자는 이런 비판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반면 설교의 신언성을 생각할 때 설교자의 행실이 못 따라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전해야 합니다. 설교는 덕성이 아니기 때문에 설교자의 행위에 관계없이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가령 설교자가 간음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간음하지 말라 이기 때문에 설교단에 섰을 때에는“간음하지 말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내 행실이 못 따라간다고 해서 변형시키면 안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자들이 변형을 참 좋아합니다. 구약시대의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도 하나남의 말씀을 잘 변형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 당시에는 이혼 증서도 내주지 않고 그냥 여자를 내쫓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여자들이 호적상으로 남편의 식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활은 식모이거나 종이거나 심지어는 창녀로 전락하게 되니까 보다 못한 모세가 아내와 살지 않으려면 이혼 증서를 써주어 그들에게 새 출발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바람피우고 싶고 이혼하고 싶으니까 제 마음대로 변형해서 남자는 이혼 증서나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이렇게 변형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것을 보니까 원래 정신과 반대가 되었으므로 너희들 이혼하지 말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는 많습니다. 소위 탈 예루살렘 파인 에세네파에서 이 자료를 전승했다고 학문적으로는 알려지고 있지만 전도자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이런 요소가 있습니다.

 

전도자는 두 벌 옷도 가지지 말고, 돈도 가지지 말고, 두 켤레의 신발도 가지지 말며 지팡이도 가지지 말고, 빈 주머니로 떠나라 그랬습니다. 오늘날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이 목사일텐데, 그런데 보십시다. 목사들이 구두가 몇 켤레이며, 자가용에 좋은 저택에··· 또 어떤 목사들은 땅을 사놓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사이 목사들은 자기 행실이 따라가지 못하니까 그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하는 목사가 한분도 없답니다. 이것은 안됩니다. 나의 행실이 거기에 따라가면 더 좋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형 없이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목사들은 어떤 때는 몸살도 앓고 부끄럽기도 하고 양심에 가책도 받고 그럽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설교자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스승이나 신학교 교수가 앞에 앉아 계시거나 혹은 자가 아내가 앞에서 바라다보고 있으면 설교가 안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설교가로서 소질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목사들을 찾아서 통계를 해보니 그들의 아내가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설교 끝나고 집에 가서 얼마나 망신을 당할까 생각하니 설교할 의욕이 안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신학생들에게 가서 강의를 할 때는 절대로 신학을 공부한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목회를 이해하고 사랑하면 되는 것이지 신학에 대해 아주 지식이 많은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전이(轉移)

 

이제 설교에서 전이(轉移)’라는 개념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다. 전이라고 하는 것은 회중과 설교자가 쌍방으로 가지는 것인데 이것을 의학적인 의미에서는 가령 암이 위에서 생겨서 간으로 전이했다 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전이는 이전에 다른 대상에게서 느꼈던 굉장히 좋았던 감정 또는 굉장히 싫었던 감정이 엉뚱하게 다른 대상에게로 옮아 붙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고 가까이 가서 말을 건네보고 싶고 악수를 하고 싶습니다.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 속담에 비유한다면 주는 것 없이 밉다”, “받는 것 없이 곱다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전이라는 것의 정신 분석학적인 현상은 무의식 중에 행해진다는 것이 특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신 분석가, 전문의에 의해서 분석되기 전에는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고 그냥 그렇게 무의식 중에 되는 것입니다.

 

회중이 목사를 처음 볼 때에 기분 좋은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의 한 집사가 목사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교회에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사님을 시켜서 심방해 보니 그 이유가 새로 오신 목사님이 나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그 목사 있는 교회에 안 간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싫어하자면 둘이서 언제 말을 했다던지 싸움을 했다던지 그런 경험이 있어야 되는데, 한 번 보고 뭘 싫어하겠습니까? 그것은 그 집사가 목사를 ‘척’ 보니까 나쁜 감정이 전이했는데 신자가 목사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죄책감이 일어나니까 그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상대방 마음에 있다고 투영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편하도록 자기를 잘 수호하고 방어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기 방어기제에 의해서 저 목사가 나를 싫어하니 나는 교회에 안 나간다. 이렇게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목사들은 부임해 가자마자 강단 밑에서 막 웁니다. 하나님 제게 왜 반대하는 집사를 주셨습니까 하고 울면서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목사들이 새벽기도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그저 시간 때우는 설교만 매일 하니까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울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학문적인 이론을 다 알고 나면 울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한 백 명 앉았다 하면 그중에 몇 %는 정신 이상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또 그중에 몇 %는 목사님에게 부정적인 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새 목사님이 교회에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고 그 목사를 따라붙어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안타까워하고 가슴 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왕 한 평생 십자가를 지게 되어있는데 좀 편안한 마음으로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이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 교회에서 설교가 끝났는데 한 여신도가 뛰어나와서 목사님의 손을 잡고 절을 하면서 은혜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분석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그 여인이 처해있는 상황에 그 설교가 적중된 것입니다. 둘째, 정신 분석학적으로 해석해 보면 그 여인의 첫사랑인 사나이와 그 목사님의 입술 모양이 꼭 닮아서, 그 사나이에 대한 감정이 목사님에게 전이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쓸데없이 울 필요도 없거니와, 내가 이렇게 설교를 잘하는구나 하고 교만해질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회중이 있으면 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긍정적인 전이를 갖는다고 수자적으로 다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 대해서 부정적인 전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자꾸 떨어져 나가고 긍정적인 전이를 가진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교회에 몸 담고 있었던 뿌리 때문에 못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은 끝까지 남아서 목사의 반대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가 하나도 없으면 재미없습니다. 그것은 야당 없는 여당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일사불란은 김정은 세계에나 있는 것이지, 자유세계의 민주주의적인 집단인 교회에서는 일사불란 안 해도 좋습니다. 군대가 아닌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민주주의적인 지도자는 반대파가 있을 때 타락하지 않습니다. 목사에게 100% 다 찬성하면 목사는 교만해집니다. 발목을 잡는 사람이 한두 사람 있어야 덜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교만해질까 봐 내게 가시를 주셨다고 바울처럼 그렇게 해석하고 즐겁게 그 반대자를 사랑하면서 목회를 하십시오.

 

동일시(同一視)

 

다음은 목회에서 동일시(同一視)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십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동일시합니다. 예를 들면 소설을 읽으면서 굉장히 감격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소설의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의 슬픔과 기쁨이 곧 나의 슬픔과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나 다 동일화를 하게 돼있습니다.

 

아들러(A.Adler)의 말을 빌리자면 아이가 태어나서 어릴 때에는 동성의 부모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다고 합니다. 딸은 엄마를, 아들은 아버지를 동일화시킵니다.

 

프로이드(S.Freud)는 말하기를 사내아이들은 태어나서 엄마의 젖을 먹다 보면 엄마를 독점하고 싶은 충동을 갖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강력한 라이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 라이벌이 너무 크고 강하므로 이 아이는 불안을 느끼게 되는데, 아이는 자기 방어기제, 즉 자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기술로 동성의 부모와 자기를 동일화하는 그러한 과정을 가집니다. 이 사내아이는 아버지를 통해서 행복을 느끼게 되고 자기만족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내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와 자기를 동일시합니다. ‘그리스도만 영광 받으면 나는 매 맞아도 좋고 굶어도 좋고 집 없어도 좋다는 이러한 고백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부모와 동일시하면서 성장해 가고 차츰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동일시하면서 어른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이때 자기 부모가 아닌 인생의 영원한 모델, 평생 동안 바라보고 따라가고 존경할 만한 영원한 모델을 그들에게 접목시켜 주어야 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기에 접목하지 못하면 일평생 비 크리스천으로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가르치는 교사들은 매우 중요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참 신앙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사가 만약 하나님을 가슴으로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 교사 밑에서 배우는 학생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일평생 비신자로 밖에 살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고등부 선생들을 좋은 분들로 모셔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은 누구하고 자기 자신을 동일시했느냐 하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다”(14:9)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13:20)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위대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동일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군인들이 와서 침 뱉고 따귀를 때리고 갈대를 꺾어 손에 쥐어 주어도 그 모든 굴욕과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손은 자유로웠습니다. 얼마든지 가시 면류관과 홀을 집어던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홀을 그대로 쥐고 계셨으며 면류관도 그대로 쓰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구세주와 동일시되었기에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목사들은 교인들이 자기에게 반대하면 왜 못 참습니까? 작은 인간이니까 못 참는 것입니다. 큰 인간이 되면 그것 다 감싸주고 불쌍하게 보아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목자이고 너희들은 내가 돌보아야 할 어린 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섭섭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어떤 자기 정체감을 가지느냐, 어떤 인격과 자기를 동일화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예수라고 하는 분은 위로는 하나님과 동일시했고 마 18:3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와 자기를 정말 동일시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은 신이 아니고서는 동일시의 폭을 그렇게 넓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내가 율법을 가진 사람에게 가서는 나도 율법을 가진 사람처럼 했고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서는 율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지만 모든 사람을 위해서 종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굉장히 지조 없는 사람, 기회주의자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얻을까 하여 그렇게 자신을 변형시켰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과 같아서 물이 삼각형으로 된 그릇 안에서는 자기가 삼각형으로 몸을 바꾸어 들어가고 동그랗게 된 그릇 속에는 동그랗게 담기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나 물이라는 자체의 본질은 절대로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디든지 들어가면 변형해서 그 그릇에 충만감을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설교자의 동일시는 어떠해야 할까요? 설교자는 동일시를 어떤 개인과 동일시하지 않고 어떤 집단과 동일시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억눌린 자, 가난한 자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억울함이 바로 나의 억울함이요, 그들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되는 그런 경우입니다.

 

그런데 동일시의 각도가 큰 사람은 기득권자 또 이미 성공한 자, 많이 가진 자와도 동일시를 합니다. 이렇게 설교자에 따라서 이 동일시의 각도가 틀려지는데 그 각도가 좁은 사람은 어느 한 편을 사랑하고 어느 한 편은 증오하는 그런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회중의 수는 점점 작아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설교자의 동일시의 폭이 넓으면 너그러운 사람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대신 너무 원만해서 뾰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그 설교를 들으면 물에 물탄 것처럼 술에 술탄 것처럼 그냥 그렇게 되고, 또 동일시의 폭이 좁으면 뾰족하고 날카롭고 예리하기 때문에 참신한 맛이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엔 회중은 줄어들지만 남아있는 그 회중은 그 목사에게 완전히 반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리 결단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동일시의 폭을 넓혀서 그저 평범한 회중을 많이 모을 것인가 아니면 성격이 뚜렷한 사람을 적게 모아놓고 목회할 것인가를 각자가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또 설교를 대개 분석적인 설교, 종합적인 설교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먼저 분석적인 설교는 무엇 무엇이다 아니다로 정연하게 분류해서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참신하고 멋이 있습니다.

종합적인 설교는 이것과 저것도 그래서 같다. 이것과 저것은 이래서 하나가 된다. 계속 그것만 합니다.

전자와 같은 설교 방식은 시사성이 있어 인기가 높습니다. 현실감각이 뚜렷합니다. 그 대신 회중은 크지 않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회중이 점점 커집니다. 그리고 그 날개 아래에는 도 올 수 있고 도 올 수 있고 공무원도 올 수 있고 학생도 올 수 있는 그런 넓은 회중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지 양쪽의 경우를 동시에 취할 수는 없습니다. 이점 역시 결단해야 합니다.

 

승화(昇華)

 

다음으로는 승화라는 개념을 보십시다. 승화는 물리학에서 고체가 액체의 상태를 거치지 않고 바로 기체가 되는 것을 승화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얼음이 물이 돼서 김으로 날아가 버리면 그것은 승화가 아닙니다. 나프탈렌을 보십시오. 고체가 바로 기체가 되는데 그것을 승화라 합니다.

 

정신 분석학에서는 저등 욕구를 고상한 방법으로 해소하는 것을 승화라고 합니다. 저등 욕구라 하는 것은 누구나가 다 동일하게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점잖다. 점잖지 못하다의 차이는 점잖은 사람은 승화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고, 그것을 고상한 방법으로 해소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입니다.

 

부처님 밑에도 지푸라기가 붙어 있다고 하듯이 사람들 밑바닥에 있는 욕구 자체는 비슷합니다. 점잖은 사람들이란, 그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고급 수단으로 해소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토바이와 자동차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오토바이나 자동차는 휘발유와 공기를 섞어서 불을 부쳐 폭발하는 힘으로 바퀴를 돌린다는 원리는 같습니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소리가 나고 자동차는 소리가 안 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토바이는 차체가 작으므로 승화 장치를 할 공간이 없어서 가스를 바로 빼내니까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동차는 차체가 커서 그 가스를 여러 과정을 통해 분산시키므로 소리가 안 납니다. 그러나 그 속에 휘발유가 타고 있다는 것은 다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모든 예술에는 성(sex)이 점잖은 방법으로 승화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덜 세련되게 승화된 문학을 외설 문학이라고 하고 고상하게 승화되어 있는 것을 문학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음악, 미술, 문학, 모든 예술분야에서 성(sex)100% 제거되면 예술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현대 광고학에서는 이 성이라고 하는 것을 많이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고상한 방법으로 다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피라이터들이 주로 그것을 연구하는데 어떤 모양으로든지 광고문을 통해 무엇인가 마음 밑바닥에서 성을 연상할 수 있도록 해야 그 광고문이 성공적이라 합니다.

 

그런데 리챠드 팬이라는 사람이 설교도 예술이다라고 했는데 이거 큰일입니다. 모든 예술에는 성이 승화되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설교에다가 성을 점잖은 방법으로 넣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면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선 목회자의 용모가 성적으로 돋보여야 합니다. 설교자는 인물이 잘나야 됩니다. 미끈하고 훤칠하고 멋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도들이 목사님에게 호감을 갖고 따라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되도록이면 잘생기고 훤칠한 사람을 신학교에 보내야 되는 일도 벌어질 것입니다.

 

 

설교가로서 이름난 사람들을 보면 모두 다 인물이 잘났습니다. 남성적인 매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부흥사와, 한 회중을 오래 섬기고 있는 목회자와는 얼굴의 모습이 조금 다릅니다. 내 양은 매일 대하는데 거기다 대고 두들겨 소리칠 수는 없으니까 회중과 친하지 않은 부흥사를 데리고 와서 미리 부탁합니다. 집회 때 이런 점을 야단 좀 쳐 달라고 말입니다. 그럼 이 부흥사는 주문을 받은 대로 막 야단을 치고 갑니다. 그러면 대개가 교회는 거듭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사는 매일 같은 회중을 대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특별히 사디즘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면 좋습니다. 남성 모습 중에서도 상당히 공격적인 모습을 하면 좋습니다. 코도 우람하고, 가슴도 딱 벌어지고 그런 것이 좋습니다.

 

제가 세인트 루이스에서 빌리 그래함과 악수를 했는데 너무 감격스러워서 두 시간 동안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빌리 그래함의 얼굴을 옆에서 보니까 그야말로 세계적인 부흥사의 얼굴이었습니다. 얼굴이 보통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우람스러운 코, 개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턱에서,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한 빛나는 눈의 힘, ! 이것이야말로 일품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차라리 그런 남성적인 모습이 없을 바에는 차라리 회중의 동정과 사랑을 받을 만큼의 빈약한 모습도 괜찮습니다.

 

예를 들어 폐가 없다든지 하는 경우입니다. 한경직 목사님, 조용기 목사님, 김정준 박사님 이 분들이 다 폐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폐병이 없는 시대라서 폐하나 없는 것은 문제가 안 되겠고 무엇인가 모르게 회중의 동정과 사랑을 받을 만큼··· 회중들이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때는 목사님이 상처했을 때입니다. 특히 여교인들이 얼마나 목사님을 위해서 아끼고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생신날이 되면 옷이며, 떡이며, 대접을 잘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 한 번 실험해 보시겠어요. 목회가 잘 안되거든 상처를 해보십시오. 그때부터 인기가 달라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습니까 내가 목회 성공하기 위해서 당신 한 번 죽어 주십시오 그것 못할 노릇입니다. 어쩌다가 선택받은 사람이나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사모를 하늘이 주신 천생배필로 생각하시고 그저 죽을 때까지 깊이 사랑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가 아니면 목회자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회자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합친 이중의 얼굴이면 좋겠습니다. 위대한 설교가는 남·녀의 성을 합친 것과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용기 목사님이 그렇고 곽선희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분들이 어느 특별한 성을 뚜렷하게 얼굴에 담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인 전이를 할 수 있는 것을 분석하면 동양인의 얼굴로 표준 삼아서 대개 몇 가지의 결론이 나온다고 합니다.

 

첫째, 볼에 살이 넉넉할 것 : 이것은 사진학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면 좌우에서 봐도 좋습니다. 목사뿐만 아니라 가수, 탈랜트도 살이 넉넉해야지 인기가 올라갑니다.

여기 제가 보니까 목사님들 얼굴이 잘났습니다. 역시 회중보다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두 번째, 눈과 눈썹 사이가 넉넉하고 꺼지지 않을 것이며 빛깔이 좋을 것 : 너무 시꺼멓게 죽어있으면 안 됩니다.

 

셋째, 이마와 턱이 뒤로 후퇴하지 않을 것 : 너무 후퇴하면 옆모습이 좋지 못합니다. 목소리도 큰 소리가 되기 위해서는 아주 미성보다는 약간 거친 듯한 허스키 목소리이면서, 테너보다는 바리톤이 좋습니다.

그러면 다시 앞서 말씀드린 것을 설명하자면 왜 양성적인 것을 갖추어야 되느냐 하면 칼 융(C.G.Yung)은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애니마(anima)와 애니무스(animus)가 있다고 합니다. 애니마는 남성 속에 있는 여성성이고, 애니무스는 여성 속에 있는 남성성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라고 해서 남성적인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 같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남성들은 여성성이 강하여 꽃꽂이, 음식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자 운동선수를 보면 그 속에 남성적인 요소가 많은 여성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면이 있기 때문에 남·녀 어느 쪽에서든지 환영을 받으려면 남·녀의 성을 합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좋습니다. 성격도 마찬가지입니다. 냉철하고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자상한 것을 두루 갖추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설교의 과정을 보십시다.

설교의 과정도 성적인 교섭, 육체적인 정사의 과정을 반영한다면 무난하고 봅니다.

처음에는 주변부터 서서히 올라가다가 점점 격렬해집니다. 그렇게 격렬해지다가 딱 끝나야 됩니다. 그러면 설교의 가장 클라이맥스는 끝나기 10초 전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냥 한 번에 끝나는 것보다는 한 10, 5초 또는 15초를 조금 여유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남성은 때때로 연주자와도 같습니다. 기계를 잘 다루면 악기에서 소리가 나게 됩니다. 그런데 연주기술이 없으면 악기가 영 소리를 안 냅니다. 그런데 기술이 좋은 사람은 한 번에 여러 번의 클라이맥스를 이끈다고 합니다.

 

대지 나눔에 있어서도 클라이맥스가 세 번 있으면 좋고, 앞에 것보다는 뒤의 것이 높아야 무난합니다. 그러나 처음의 것보다 뒤의 것이 낮으면 그런 것은 재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한 설교를 25분 내지 30분 한다고 하면 클라이맥스는 대개 세 번 정도 두고 뒤에 있는 것에 더 강조점을 두면 그것이 적당하다고 합니다.

 

 

결 론

 

지금까지 우리는 설교가 갖는 정신분석학적 이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에 몸살 날만큼 사로잡혀 자신이 무()가 되는 예언자적 경험의 중요성으로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십시오. 그의 영이 직접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다음 정신분석학적 이해도 고려하십시오. 여러분의 설교 사역에 놀라운 승리가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야고보서 1장 설교문] 몸으로 읽는 하나님의 말씀(약 1:19-27)

안녕하세요. 오늘은 야고보서 1장 설교문 중에서 몸으로 읽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몸으로 읽는 하나님의 말씀 본문 : 야고보서 1:19-27 “그러니 그저 듣기만 하여 자기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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