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3장에서 베드로 사도는 아내와 남편의 올바른 도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신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신랑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선행에 힘쓰라(벧전 3:1-22)
1-7절, 아내들과 남편들에 대한 교훈
[1-2절]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 . .
베드로는 말한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道)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순복하라’는 원어(휘포탓소)는 ‘순종하라, 복종하라’는 뜻이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종하며 복종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말했고(엡 5:22-23), 또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말했다(골 3:18).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아내들의 의무이다. 거기에는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중요한 한 목적은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 즉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말로가 아니고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말로 구원하기 힘든 남편들이 그의 행위로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뜻이다. 말로 안 되면 행위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이웃 사람들을 말로 구원하기 어려울 때 우리의 선한 행위로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게 힘써야 할 것이다.
남편을 구원시킬 아내의 행위는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말한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남편을 두려워함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을 자기 주인과 같이 생각하여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정결한’이라는 원어(하그노스)는 ‘순결한, 거룩한’이라는 뜻이다. 아내들은 특히 음란한 세상 속에서 단정하고 순결하며 거룩해야 한다.
[3-6절]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여성도들은 머리를 꾸미고 금은 보석의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를 차고 값비싼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 같은 외적인 단장에 치중하지 말아야 한다. ‘머리를 꾸민다’는 원어(엠플로케스 트리콘)는 ‘땋은 머리’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머리 단장이 죄악되므로 성도들이 머리 단장을 도무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머리털은 헝클어져 있는 것보다 자주 씻고 깨끗하고 단정한 것이 필요할 것이다. 또 금은 보석과 아름다운 옷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것들일 것이다. 단지, 성도들은 외적인 단장을 크게 여기거나 거기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런 것들의 가치가 극히 작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여성도들의 단장은 내면적이어야 한다. ‘마음의 숨은 사람’은 사람의 내면적 인격성을 가리킨다. 여성도의 내면적 인격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안정한’이라는 원어(헤쉬키오스)는 ‘조용한’이라는 뜻이다. 여성도들은 특히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몸은 세월이 갈수록 쇠해지지만, 이러한 고상한 인격성은 그 성질상 썩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단장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 단장, 곧 고상한 인격성이 가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인 것이다.
베드로의 교훈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성도의 이러한 덕은 예전부터 경건한 여성도들이 가졌던 덕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유행하는 인간 풍습에 따라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인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였고 이런 덕으로 자신들을 단장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었다. 그는 자기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18:12에 보면, 그는 속으로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의 남편에 대한 그의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오늘날도 여성도들은 사라처럼 선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7절]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해야 한다. 여기서 말한 지식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결혼은 남녀가 결합하여 한 몸과 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이다. 결혼의 목적은 첫째, 남자가 외롭지 않도록 돕는 아내가 함께 살게 하기 위함이며(창 2:18), 둘째, 자녀 출산을 위함이며(창 1:27-28), 셋째, 음행 방지를 위함이다(고전 7:2).
결혼에 있어서 남편의 의무는 사랑이다. 바울은 남편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심같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엡 5:25). 그것은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아내들은 남편들의 따뜻한 한 마디의 말과 얼굴 표정과 행위에 집안 일의 수고를 잊고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낀다.
성(性)에 대한 바른 지식도 필요하다. 인간의 성은 더럽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것이다(창 2:25). 그것은 사랑의 도구이다. 그러나 성은 단지 부부 관계에서만 사용되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가 된다. 음행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아내는 남편의 갈빗대이며, 남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사도 베드로는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로 첫째, 아내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며, 둘째, 그들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는 것을 들었다.
여성은 대체로 남성보다 몸이 연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예민하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에 남자들만 아니고 여자들도 참여할 것이다. 이런 연약한 아내들이 남편들과 자녀들을 위해 노동과 같이 힘든 집안 일을 하며 늙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그들을 외롭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고, 귀히 여기고 보호하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아내들은 생명의 은혜, 즉 영생과 천국을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들이다. 아내들은 이 세상에서만 아는 관계가 아니고 천국에까지 같이 갈 반려자들인 것이다. 물론 천국에서는 부부로서의 짝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내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영원한 동료들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고 그들을 귀히 여길 때 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부부의 사이가 좋아야 기도도 잘 되지, 부부가 서로 다투고 나면 기도의 문이 막힌다. 왜냐하면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의 기도의 문을 가로막는다. 요한일서 3:21-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의 선한 생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성도들은 가정에서부터, 결혼한 이들은 부부 사이에서부터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게 행해야 한다.
1절부터 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복해야 하며, 심지어 믿음 없고 까다로운 남편에게도 선한 행실로 감동을 주어야 한다. 자기 남편이 좋은 사람이든지 그렇지 못한 자이든지 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아내로서의 마땅한 의무이다. 그럴 때 믿지 않는 남편도 구원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도들은 머리를 꾸미거나 장신구를 걸치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는 등의 외적인 단장을 힘쓰지 말고, 온유하고 조용한 순종의 내면적 덕으로 단장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하고 또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이므로 이 세상적 가치관을 버리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며 아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남편들은 결혼의 의미와 목적과 의무를 잘 이해하며 아내들이 남편들의 갈빗대이며 더 연약한 그릇이며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럴 때 남편들은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좋은 부부 관계는 신앙 생활에 유익하지만, 서로 자주 다투면 신앙 생활에도 해가 된다.
8-12절, 선한 마음을 가지라
[8-9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 . . .
베드로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친절하며](전통사본)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더 권면하고 그치려 했던 것 같으나 성령께서 계속 좀더 교훈하도록 감동하셨던 것 같다.
첫째로, 그는 우리가 다 마음을 같이하라고 말한다.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원어(호모프론)는 ‘생각을 같이하여’라는 뜻이다. 교회의 단합은 생각의 일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로마서 12:16, “서로 마음[생각]을 같이하며.” 고린도전서 1:10, “같은 마음[생각]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빌립보서 2:2, “마음[생각]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생각]을 품어.” 생각이 같아야 말과 행동도 같아질 수 있다. 분열은 생각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이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한다.
둘째로, 그는 우리가 서로 체휼하라고 말한다. ‘체휼하다’는 원어(쉼파테스)는 ‘같은 감정을 가지다, 동정심(同情心)을 가지다’라는 뜻이다. 사람은 생각이 첫째로 중요하지만, 또한 감정도 중요하다. 감정이 같은 것이 좋다. 어떤 이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싫어하면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성도들이 어떤 일에 대해 좋아하는 감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같은 것이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위해 바람직하다.
셋째로, 그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성도의 기본적인 덕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했다(고전 13:4-7).
넷째로, 그는 우리가 남을 불쌍히 여기라고 말한다. ‘불쌍히 여기다’는 원어(유스플랑크노스)는 ‘인정을 가지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부족과 연약을 볼 때 멸시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바울도 이런 마음을 가질 것을 교훈했다. 에베소서 4:32, “[너희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다섯째로, 그는 우리가 친절하라고 말한다. ‘겸손하며’라는 본문(타페이노프론)은 전통사본(Byz)에는 ‘친절하며’(필로프론)라고 되어 있다. 겸손함과 친절함은 거리가 멀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겸손하며 친절해야 한다.
여섯째로, 그는 우리가 남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말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주 예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고(마 5:39)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하셨다(마 5:44 전통사본). 바울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교훈하였다(롬 12:17).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그 복이란 죄사함과 구원의 복, 평안의 복, 또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의 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 구원의 복을 깨닫고 귀히 여기고 감사하며 또 서로에게 이 복을 빌어야 할 것이다. 이 복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부족한 형제라 하더라도 이 복에서 제외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해 이 복을 빌어야 할 것이다.
[10-12절]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성도는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고 천국의 좋은 날들 보기를 원한다. 죽음은 죄 때문에 왔고 그것은 슬프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고 천국의 복된 날들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모든 일을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구원의 은혜를 받고 이런 놀라운 약속의 세계를 바랄진대, 거기에 합당한 자들답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우선, 우리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악한 말’은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남의 명예에 손상을 주는 말을 가리킨다. 물론 불결하고 더럽고 음란한 말도 악한 말에 포함된다. 성도는 그런 악한 말을 그쳐야 마땅하다.
또 우리는 입술로 궤휼 즉 속임과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21:8에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했고, 또 요한계시록 22:15에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했다.
성도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한다. 선은 남에게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또 성도는 서로 간의 화평을 구해야 한다. 성도는 악과 거짓을 버리고 선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이것은 말에 있어서 뿐 아니라 행실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과 돌보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가 연약할 때 격려하시고, 낙심할 때 위로하시고, 위험할 때 지키시고 도우시며, 범죄할 때 근심하시고 책망하시는 그의 관심과 돌보심이다. 또 주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신다. 의인이 감사할 때나 회개할 때나 무엇을 간구할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와 간구를 잘 들어주신다. 그러나 주의 낯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신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악한 행위를 보시고 판단하시고 기억하시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긍휼이 풍성하시지만, 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엄위하시고 두려우시다.
8절부터 12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을 같이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참된 일치의 모습이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되, 불쌍히 여김과 친절함을 가지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참된 사랑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야 하겠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교훈들이며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사랑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13-17절, 선을 행하며 고난을 받으라
[13-14절]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 . . .
베드로는 말한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너희가 선을 본받는 자라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의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예수 믿는 자들은 선을 본받는 자들이다. 우리가 선하게 살면, 양심이 있는 자들은 그런 우리를 잘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가 있다. 의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는 복 있는 자이다. 주 예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다(마 5:10). 그때 우리는 그들의 위협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현세와 내세의 확실한 약속과 보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의 위협을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근심하고 염려할 것도 없다.
[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하나님을]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셔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절대주권자로 삼으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기 때문에, 악한 자들의 위협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통치하시고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자에게 대답할 바를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해야 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는 왜 이런 것들을 소망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로 밝히 증거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밝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다. 천국 소망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간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연약성과 죄성을 가진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 우리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16-17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 . . .
베드로는 말한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이 너희가 악을 행한다고 비난하는 일 때문에](전통본문)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낸다(마 12:35). 우리가 악한 것과 거짓과 음란한 일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위는 악하고 거짓되고 음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하고 선한 일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말과 행위를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선한 삶을 살 수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비난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성도가 선한 양심을 가지고 끝까지 선하게 말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악을 행한다고 비난했던 그들의 악한 비난이 거짓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낫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고난이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고난을 당하셨다. 바울과 그 외의 사도들도 그러하였다. 우리도 이런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13절부터 17절까지는 성도가 선과 의를 행하다가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 복 있는 자이며 그렇게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첫째로, 우리는 의와 선을 행하다가 핍박과 고난을 당할 때 핍박자들을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주님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와 우리 개개인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이유에 대한 대답을 항상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예비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장차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것이라는 소망은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과 믿음과 소망의 근거이다.
셋째로, 우리는 항상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항상 끝까지 선한 양심을 품고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을 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다운 행동이요 또 결국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이다.
18-22절,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18절]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고난을 받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성령]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한 번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한 번’이라는 원어(하팍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다(히 7:27; 9:12, 26, 28; 10:10, 12, 14). 그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화목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즉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심이었다.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 그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 본절과 다음절(19절)은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육체와 영을 인간 예수님의 육체와 영으로 보는 것(RSV, NASB)은 정당하지 않은 것 같다. 영이 살리심을 받으려면 영도 죽임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지만, 본문은 단순히 육체와 영을 대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육체는 예수님의 인성, 즉 인간으로서의 영육을 가리키고,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KJV, NIV). 즉 예수께서 인간으로는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19절] 저가 또한 영으로[성령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저가 또한 영으로[성령으로](KJV, NIV)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영들에게 가셔서 전파하셨었느니라](원문).” ‘옥에 있는 영들’은 다음절에 말씀한 대로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당한 자들의 영들이다. 본절은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왜 저 영들에게 가셨고 또 무엇을 전파하셨는가?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께서 죽으신 후 구약 성도들이 거하고 있던 ‘림보’(‘지옥의 변두리’라는 뜻)에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이끌어 천국에 들여보내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은 죽은 악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나타난 교훈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16:26). 루터교회는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직전 혹은 직후에) 지옥의 영들에게 가 승리의 영광을 선포하셨음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 전에 지옥에서 승리적 행진을 하신다는 것은 적당한 생각이 아닐 것이고, 부활 후에 가셨다면 영으로 가셨다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것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의 승리의 선포 사건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바빙크, 크레다너스). 그러나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정통적 성경학자들은 본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지옥에 있는 저 영들에게 옛날 노아 시대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마 이 마지막 해석이 가장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음란하고 강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오래 참으셨고 심판을 120년간 유보하셨었다. 그 동안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노아의 8식구들 외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었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예수께서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다가 마침내 멸망할 자들은 수가 많으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다가 영생에 이를 자들은 수가 적다고 말씀하셨다(마 7:13-14).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비교적 적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그 적은 수에 들기를 원하며 감히 그 수에 든 것을 감사한다.
[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의 물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는 세례에 비교할 수 있다. 세례는 죄씻음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물론, 물로 받는 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부족하고 연약할 때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세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받은 자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22절]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본문은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증거한다. 고난의 주께서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천국에 올리우셨고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바이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사도행전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또한 모든 선한 천사들은 그에게 순복하고 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왕권, 영계와 물질계에 행사하시는 왕권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낸다.
18절부터 22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사셔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셔서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옛날 노아 시대나 소돔 고모라 시대보다 더 악하고 음란한 오늘날 세상과 세상의 풍조를 멀리하며 배격하고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들같이 오직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며 순종하며 살아가자. 셋째로, 우리는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선을 행하면서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이사야 21장 성경 좋은 말씀] 바벨론, 에돔, 아라비아에 대한 경고(사 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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