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몸에 대해서 염려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으면 고민하게 됩니다. 잠을 잘 곳이 없으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것들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고 말씀합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고 기르지도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르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산상수훈 설교말씀(마 6:25-29)
25절 디아 투토 레고 휘민 메 메리므나테 테 프쉬케 휘몬 티 파게테 카이 티 피에테 메데 토 소마티 휘몬 티 엔뒤세스데 우키 헤 프쉬케 플레이온 에스틴 테스 트로페스 카이 토 소마 투 엔뒤마토스
성 경: [마6:25]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그러므로(디아 투토) -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이로써'란 뜻으로서 본절에 언급될 세상살이에 대한 근심을 버려야 할 이유가 앞에서 언급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사실에 있음을 가리킨다. 즉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선택했을 때 발생할 세상 염려에 대한 지침(指針)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의 절대적 권위를 나타내 주는 표현으로서 그 가르치는 바가 세상의 어떤 진리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참 진리임을 시사하고 있다.
목숨을 위하여(테 퓌스케 휘몬) - '목숨'으로 번역된 '퓌스케'는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으로서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멸절되지 않는 영혼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이 '퓌스케'는 죽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였다(10:28). 따라서 이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서 물질적인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염려해야 하는 것이다.
염려하지 말라 - 이는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이것은 앞 절에서 시사한 바 있는 세상 일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염려'(메림나오)란 '분열되다', '나뉘다'는 뜻의 '메리조'에서 유래한 단어로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인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상태를 뜻한다. 실로 이러한 염려의 늪에 빠지게 된 자는 생(生)에 있어서 참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고민하여야 할 대상은 물질적인 문제에 앞서 먼저 영적인 문제여야 한다. 그리고 물질적인 문제 때문에 마음이 분열되어 영적인 문제를 망각(oblivion)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 음식은 생명체의 존속에 필요한 소모품(consumption goods)이다. 따라서 음식은 생명을 위해 있는 것이지 생명이 음식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따금 생명 그 자체보다는 목숨에 소용되는 음식물에 집착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때가 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이 목숨과 몸을 준 이상, 이에 필요한 음식과 옷은 우리에게 당연히 주실 것이다.
26절 엠블렙사테 에스 타 페테이나 투 우리누 호티 우 스페이루신 우데 데리주신 우데 쉬나구신 에이스 아포데카스 카이 호 파테르 휘몬 호 우라니오스 트레페이 아우타 우크 휘메이스 말론 디아페레테 아우톤
성 경: [마6:26]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공중의 새를 보라 - 누가의 기록에도 이와 유사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새'라는 말 대신에 '까마귀'로 언급된다(눅 12:24). 본문의 '공중의 새'란 순수한 히브리 문학적 표현으로서 '하늘을 나는 새', 곧 크게 중요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생명체를 상징한다. 한편 본문의 '보라'(엠블렙사테)는 눈을 뜨고 살펴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심지도 않고 - 새들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미래의 자기 생존에 관해 염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거두지도 않고 - 이 말씀을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새들도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다 먹이를 떨어뜨려 주시도록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거두지도 않고'란 말은 먹을 것에 대한 지나친 고민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 이는 성경적 우주론(宇宙論)을 전제하고 있는데, 우리는 자연의 피조물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를 어떨게 해결해 가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이 어떠한가를 볼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 안에서 참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실로 하나님은 이 창조 세계를 질서 있게 경영하고 계시며 따라서 이 자연계 전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섭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천부'에 관해서는 5:16 주석을 참조하라.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하나님은 모든 자연계 피조물의 창조주이시지만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격적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선자는 새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귀중한 존재인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귀하다'(디아페로)란 말의 원뜻은 '다르다', '구분된다'로서 새와 인간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보다'로 번역된 바로 앞의 헬라어 '말론'은 '심히', '대단히'라는 뜻인 '말라'의 비교급 부사로서 '훨씬 더', '더욱'이라는 강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실로 우리는 공중의 새보다 훨씬 더 귀중한 존재로 하나님께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법칙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 이면(裏面)에 담겨있는 우리를 향하신 깊으신 뜻까지도 포착(capture) 해야 할 것이다.
27절 티스 데 엑스 휘몬 메림논 뒤나타이 프로스데이나이 에피 텐 헬리키안 아우투 페퀸 헤나
성 경: [마6:27]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그 키를(텐 헬리키안 아우투) - '키'로 번역된 '헬리키안'은 '신장(身長)의 길이'나 '생명의 길이' 모두를 뜻할 수 있다. 키를 '한 자'(펙쿠스 헤나; 한 팔 길이로서 히브리인들의 '규빗'과 비교될 수 있다)나 더 한다는 것은, 신장의 길이를 나타낼 때는 약 8인치가량 늘인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생명의 길이를 뜻할 때는 나이를 더 먹는다는 뜻이 된다. 현대 주석가들은 이를 생명의 길이, 곧 나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어느 누구도 염려함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목숨의 연장(延長) 여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28절 카이 페리 엔뒤마토스 티 메림나테 카타마데테 타 크리나 투 아그루 포스 아욱사네이 우 코피아 우데 네데이
성 경: [마6:28]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의복을 위하여 - 앞에서 주님은 주로 음식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여기서는 의복을 통하여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와 부차적 관심사를 구분해 주고 계신다.
들의 - 이 말은 마태의 기록에만 등장한다. 아마 이는 자연 발생적으로 자라난 쓸모없이 보이는 풀 조차도 하나님이 입히심을 강조한 것 같다. 그리고 앞 절의 '공중의 새'와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땅과 하늘 그 어디나'라는 간접적인 강조로 이해할 수도 있다.
백합화(타 크리나) - 원어 '크리나'는 백합화뿐만 아니라 아네모네, 양귀비, 글라디올러스, 붓꽃 등 여러 종류의 꽃들을 포함하는 말인 것 같다(Robertson). 즉 '들의 백합화'란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야생화(wild flower)들을 대표하는 꽃으로 볼 수 있다.
생각하여 보라(카타마데테) - 26절의 공중의 새를 '보라'란 말의 원어 '엠브려파테'란 말이 단순히 눈을 뜨고 살펴 본다는 의미인데 비해 이 말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성장을 면밀히 관찰해 보라는 의미이다.
수고도 아니하고 - 공중의 새들이 먹을 것을 찾아다니되 염려하지 않는 앞 절의 대구적 어구와는 조금 다르다. 즉 새들과는 달리 식물은 전혀 이동하지 아니하고 노력하지 아니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이 너무도 보잘것없으며, 또한 그 생명까지 짧아 곧 없어질 풀에게까지 꽃으로 입히실 만큼 풍부하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인간은 자신의 치장을 위해 '옷감을 짜지만' 그 들풀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의인법적 표현이다.
29절 레고 데 휘민 호티 우데 솔로몬 엔 파세 테 독세 아우투 페리에발레토 호스 헨 투톤
성 경: [마6:29]
주제1: [천국 시민의 새 생활]
주제2: [가치관에 대하여]
솔로몬의 모든 영광 - 원문은 솔로몬이란 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솔로몬 조차도'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제3대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초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고 가장 훌륭한 궁궐에서 그 영광의 극치(極致)를 누렸다.
입은것이...못하였느니라(우데 페리에발레토) - 이 말은 헬라어 중간태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자기 자신을 입히지 못하였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꽃 하나만 - 아름다운 백합화의 그 자연스럽고 찬란한 모습은 그 어떤 예술가도 창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며, 그 어떤 디자이너도 그와 같이 꾸밀 수 없는 조화롭고도 완벽한 치장이다. 왜냐하면 꽃 하나하나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범칙이 숨 쉬고 있으며 신적(神的)인 기운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솔로몬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것으로 자신을 장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강해설교말씀] 선행에 힘쓰라(벧전 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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