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4장에는 향유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와 예수님을 입맞춤으로 팔아 버리 가룟 유다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지만 각자 신앙을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되었지만 구원받을 자로는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되었는데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럼에도 구원받기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막 14:1-72)
1-9절, 값진 향유를 부음
[1-2절]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民擾)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유월절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1월 14일 저녁이었고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7일 간이었다(레 23:5-6). 이 두 절기는 때때로 동일시되기도 한다(눅 22:1).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때 유대인들은 어린양을 죽여 그 피를 대문틀 위 아래와 양옆 기둥에 발랐다.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궤계로 즉 은밀하게, 교묘히 잡아죽일 방책을 구하며 말하되 민요(民擾)가 날지 모르니 명절에는 말자고 하였다. 그들은 명절에 모여들 군중의 반대를 두려워하여 명절을 피하여 이 일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만일 예수께 무슨 죽일 죄가 있었다면, 정당한 절차를 따라 재판을 통해 처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 악한 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3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이 사건은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된 사건과 같은 사건인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오셨고 이틀 전에 이 일이 있었다. 향유를 부은 여자는 마리아일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간직하고 있던 매우 값진 순전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께 부었다. ‘옥합’은 석고병을 말한다. 본문은 그 여자가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말하고, 요한복음은 그의 발에 부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머리와 발에 다 부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그가 심지어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고 증거한다.
그 향유는 매우 값진 것이었다. 본문과 요한복음 12:5에는 그것이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암시되어 있다. 3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300일 품삯에 해당하고, 하루 품삯을 6만원만 치면 약 1,800만원이 되는 가치이다. 그것은 분명히 그 여자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그의 결혼을 위해 준비해둔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것은 자기 몸에 바르기 위해, 자신의 육신적 아름다움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의 생각이 달라졌음에 틀림없다. 우선, 그는 세상적 가치가 헛됨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가 마리아라면, 그는 오빠의 병과 죽음과 회생을 통해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람은 죽음 앞에 설 때 세상의 것들이 무가치함을 알게 된다. 그것은 세상의 금은보물이 자기 목숨을 건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300데나리온이 큰 것이지만, 이제 그 여자는 세상적 가치관을 넘어서게 되었다.
더욱이, 그 여자는 그 향유가 자기에게 보다 예수께 더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를 참으로 귀한 분으로 깨닫게 되었다. 예수는 인간적으로 자기 오빠를 병과 죽음에서 건져내 주신 은인이었다. 그 사실만 생각해도 그 향유의 옥합은 결코 큰 보답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병원들에서 못 고치던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준 병원에 몇 억을 기증한 아버지의 보답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뿐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믿었음에 틀림없다. 매우 값진 향유의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은 예수께 대해 가장 숭앙하고 가장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2천만원짜리 향유 옥합을 깨뜨려 드릴 만큼 귀한 분이셨다. 그 여자의 행동은 예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이기적 생각이나 외식적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는 그 향유가 자기 같은 죄인이 바를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4-5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 여자가 부은 그 값비싼 향유가 쓸데없이 낭비된 것이었는가?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여자를 책망한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가 아니고 돈궤를 맡은 자로서 거기 든 것을 훔쳐가는 도둑이기 때문이었다.
[6-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아니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사람의 행동의 동기를 보신다. 그는 선한 동기로 하는 행위를 귀히 보신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해심이 부족하다.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다. 가난은 반드시 환경이나 사회구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고, 많은 경우 게으름과 낭비와 과도한 욕심 때문에 온다. 우리는 갑자기 부자 되려 하지 말고 정직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선한 일이다. 우리는 원한다면 아무 때라도 그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며칠 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그는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다.
[8-9절]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그 여자가 자기의 가진 가장 귀한 보화를 주를 위해 사용하였을 때 우연하게도 그것은 주님의 장례식을 미리 준비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렇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의 한 일을 귀하게 여기시고 칭찬하셨다. 단순한 칭찬이 아니고, 그 여자의 한 일이 복음이 전파될 세상의 모든 곳에서 알려져야 할 모범이라고 암시하셨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많은 구제보다 귀한 일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에서 나온 지극히 높은 숭앙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헌신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보다 귀하다. 우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홀로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 지식을 가지고 그를 사랑하며 그에게 헌신하자. 비록 우리에게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향유 옥합 같은 것은 없을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귀한 것, 즉 우리의 재능과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릴 줄 아는 제자들이 되자.
둘째로, 오늘날 하나님 사랑, 예수님 사랑은 일차적으로 그의 복음 사역, 영혼 구원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믿음의 일과 참된 교회를 건립하는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은 결코 시간의 낭비, 물질의 낭비가 아니고, 우리 인생의 삶 중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오늘 우리의 향유 옥합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도 우리의 가장 귀한 것, 곧 우리의 재능, 우리의 시간, 우리의 힘, 우리의 물질, 아니 우리 목숨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원하시는 일을 위해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와 한 명의 영혼의 구원과 그의 참된 교회의 건립과 부흥과 발전을 위해 드리자.
10-16절, 유월절 식탁 준비
[10-11절]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많은 제자들 중 열두 명의 수에 든 자이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은혜로운 말씀들을 들었고 그의 선한 인품과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았다. 그는 전도하기 위해 여러 동네들로 보냄을 받았다. 그는 병 고치는 능력을 받아 병자들을 고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자가 되었다. 확실히, 그는 참 믿음과 회개로 나타나는 거듭남의 은혜는 받지 못하였다. 유다가 선생님을 배신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돈을 사랑했고 돈을 훔치곤 했었다. 요한복음 12:6,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한복음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6:64) 마침내 마귀의 이끌림을 받았다고 증거한다(13:2).
[12-14절]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유월절은 1월 14일 저녁이고,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간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하루를 해질 때부터 다음 해질 때까지로 보기 때문에 유월절과 무교절의 첫날은 오늘 우리의 개념으로 보면 같은 날 저녁이다. 그 두 날은 때때로 동일시되었다. 보내심을 받은 두 제자는 누가복음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었다(눅 22: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명령을 하신 것은 그의 신적 지식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경제적으로 유여하지 못하셨다. 그는 많은 돈을 저축하거나 좋은 집을 구입하려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부하려 하지 말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생각하는 것도 최선의 생각은 아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자립적이고 독립적이게 키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단지 자신을 위해서나 자녀들을 위해서만 쓰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즉 전도와 구제를 위해, 참된 교회의 건립과 발전을 위해 써야 할 것이다.
[15-16절]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경제적 여유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하셨다. 하나님께 헌신된 한 성도를 통해 큰 다락방이 준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종들의 필요한 것을 준비하신다. 이것은 주의 종들에게만 해당되는 원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성도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 우리는 의식주를 염려하거나 욕심부리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바로 살고 죄짓지 말고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돈을 사랑하지 말자.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결국 믿음을 잃어버리고 그 영혼이 멸망에 이를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고 돈을 땅에 쌓는 자가 되지 말고 하늘에 쌓는 자, 즉 전도와 구제를 위해 돈을 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의식주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17-21절, 예수님을 배신할 자
[17-20절]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배신하리라] 하신대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이르시되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 집에 들어가 예비된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 저녁식사를 준비하였다. 날이 저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오셔서 함께 앉아 식사를 하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배신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와 함께 식사하던 열두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주님을 배신하고 원수들을 도와 주님이 잡히게 할 것이다. ‘내니이까?’라는 원어(메 티 에고)는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이다. 이런 일은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 한 명의 마음은 진실히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자이며 마침내 그를 배신할 자이었다.
[21절] 인자(人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세 가지 사실을 말씀하셨다. 첫째로,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고난의 길을 가실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피흘리실 것이 예표되어 있거나 예언되어 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피흘려 죽으심을 예표하였다. 또 성막 제도에는 제물의 죽임과 피흘림 그리고 그 피를 성소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림 등이 있었다. 이것도 메시아의 죽으심과 피흘리심을 예표하였다. 구약성경에는 예표적, 상징적 사건들과 말씀들 뿐만 아니라, 또한 직접적인 분명한 예언들도 있었다. 창세기 3:15에 기록된 대로, 뱀은 여자와 원수가 되고 그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이며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어떻게 고난을 통하여 원수 마귀를 이기실 것인가를 암시하였다. 특히, 이사야 53장 전체는 메시아의 고난과 죽으심을 예언한 놀라운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표되고 예언된 대로 죽음의 길을 가셔야 했다. 그것은 그의 길이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어 있었고 그 작정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누가복음 22:22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대로 간다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그러나 그를 배신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를 가르쳐 준다. 가룟 유다가 주 예수를 배신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지만, 그는 그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행위와 자연스럽게 연관된다. 하나님의 작정 진리는 숙명론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작정하셨으므로 사람이 무슨 일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인간의 책임 있는 행위를 긍정하고 요청한다.
구원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예정과 선택이 제1원인이지만, 구원받는 인간의 회개와 믿음과 순종은 당연히 요청된다. 회개하고 믿지 않으면 또 순종치 않으면 누구든지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결코 인간의 행위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선택과 예정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고 순종할 수 있다. 악인들의 악행도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지만, 그 악행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가룟 유다의 악은 하나님의 작정된 바이지만, 그 악에 대한 책임은 가룟 유다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인간의 악행에 대한 책임의 관계를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는,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일들에 있어서 주권을 가지고 행하시고 이루신다는 사실과, 인간은 자기 악한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악행까지도 주권적으로 작정하신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주는 주권적 통치자가 없고 오직 불확실한 미래를 가진 수수께끼가 되고 말 것이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가룟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다. 이것은 사람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해준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가치가 단순히 출생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인간으로 출생했다는 것이 반드시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 그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았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으로 출생했다는 사실이 복이 아니고 오히려 화였다. 그것은 특히 사후에 심판과 지옥 형벌이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인간의 가치는 사람이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섬기며 그의 뜻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데 있다. 경건과 도덕성이 인간을 가치 있게 한다. 하나님께서 주권적 긍휼과 은혜로 선택하신 자들은 그런 삶을 살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확증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감사히 받자.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 같은 제물이 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책임의 신비를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청산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힘써 순종하자.
셋째로, 우리는 인간의 가치가 경건과 도덕성에 있음을 알고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악한 삶을 버리고 경건하고 바르고 선한 삶을 살자.
22-26절, 주의 몸, 주의 피
[22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그들이 유월절 저녁식사를 할 때에 예수께서는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으라[받아 먹으라](전통사본).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 말씀은 그 떡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그 떡 속에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비유적인, 상징적인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 떡은 분명히 실제로 떡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는 뜻이다. 떡을 떼어 나누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찢기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전에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신 후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요 6:51). 떡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의 기력을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우리에게 참된 생명의 양식이 됨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물론 영적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내일 십자가 위에 못박혀 찢기고 상하실 그의 몸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실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을 것이다.
[23-24절]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께서는 또 잔을 가지고 감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그것을 마셨다. 그는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새 언약](전통본문)의 피니라.” 이 말씀도 역시 그 포도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된다거나 그 포도즙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즉 그 포도즙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였다. 제자들은 실제로 포도즙을 받아 마셨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마신 것과 같은 뜻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이 참 양식인 것처럼 자신의 피도 참 음료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요 6:55). 피는 생명이다. 피가 없으면 생명체는 죽는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에서 피는 죄를 속하는 뜻을 가졌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를 상징하였다. 그것은 속죄의 피이었다. 유월절 저녁 식탁에서의 포도즙은 그런 의미를 가졌다. 그의 피는 많은 사람을 위해, 그들의 죄사함과 영생을 위해 흘리는 언약의 피이시며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는 피이시다.
[25-26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
예수께서는 또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을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요 14:6). 천국에서는 즐거운 잔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주님과 함께 즐거이 음식을 들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 후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택한 백성을 대속(代贖)하신 일이다. 그는 그 대속 사역을 성찬식을 통해 증거하셨다. 그것이 오늘날 신약교회가 시행하는 성찬식의 의미이다.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새 언약의 내용이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이제 우리는 그 은혜를 감사하며 그를 위해 살며 그에게 충성하자.
27-31절, 베드로의 결심
[27-28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것은 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 구약 스가랴 13:7에는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다시 살아나실 것과 그런 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갈릴리에서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은 갈릴리에서 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전도자의 사명을 처음 받았던 갈릴리에서 그들의 사명감을 다시 새롭게 하기를 원하셨다.
[29-31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주께서는 베드로가 연약하여 실패할 것을 알고 계셨다. 주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두 번의 고백은 진심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죽을 각오를 가졌음을 고백할 수 있는 자는 훌륭한 제자임에 틀림없다. 베드로만 그런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그 밤에 그들은 다 주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50절). 또 베드로는 그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일은 모든 사람 곧 우리의 의지의 연약함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너무 자신을 의지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도우심을 구하며 의지하며 행하자.
32-42절, 겟세마네에서의 기도
[32-34절]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헤 프쉬케 무)[내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는 예루살렘 성전 동쪽 골짜기 너머에 있는 동산이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기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자주 기도하셨고 열두 제자들을 세우실 때에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눅 6:12-13).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에도 기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때 그는 심히 놀라며 슬퍼하시며 “내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예수님의 고통스런 모습을 본다. 십자가 형틀은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도 그 위기의 밤을 잘 이기려면 깨어 기도해야 했다.
[35-36절]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아바’라는 말은 아람어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잔’은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리는 고난을 말한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소원은 인간 예수님의 마음의 불안과 고통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은 그의 순종의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보다 훨씬 선하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최선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해야 한다.
[37-38절]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토 프뉴마)[영]에는 원이로되 육신(헤 사르크스)[몸]이 약하도다 하시고.
사람이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깨어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면 시험에 빠질 수 있다. 시험을 이기는 길은 깨어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 “영은 원하되 몸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영의 활동은 마음으로 표현되므로 이것은 영과 몸의 대조이며 또한 마음과 몸, 즉 심신(心身)의 대조이다.
[39-42절]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께서는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셔서 보시니 그들이 자고 있었다. 그 밤에 그의 기도는 동일한 내용이었다. 그 기도는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아마 약 세 시간의 기도이었을 것이다. 그가 한번의 기도가 끝날 때마다 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또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깨어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심령은 원하지만, 우리의 육신이 약하기 때문이다.
43-52절, 잡히심
[43-47절] 말씀하실 때에 곧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많은] 무리가 검과 몽치[몽둥이]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랍비여, 랍비여](전통사본) 하고 입을 맞추니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인간 관계에서 입맞춤은 일반적으로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지만,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속이는 입맞춤이었다. 그것은 파송된 군사들로 하여금 예수를 확실히 잡게 하는 하나의 신호이었다. 요한복음은 곁에 섰는 자 중에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린 자가 베드로이었고 그 종의 이름이 말고임을 증거하였다(요 18:10).
[48-50절]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큰 죄인처럼 잡히시는 일이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성경에 능통하셨다. 또 그의 생애는 성경의 예언과 예표를 이루는 생애이었다. 우리도 어떤 점에서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함으로써 성경에 능통하기를 원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애도 성경의 교훈을 행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생애가 되기를 원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잡히셨다. 그때 그의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했다. 그것은 제자들의 진심의 결심대로 되지 않았고 “너희가 다 이 밤에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대로 된 일이었다. 그들은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고백했었다.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말했었다(31절). 그러나 그 위협과 공포가 있었던 현장에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하였다.
[51-52절]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청년들이 그를 잡자](전통본문)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이 청년은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 중요한 책에 그 의미 없어 보이는 부끄러운 일을 기록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마가는 유월절 식사 후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라 겟세마네 동산까지 왔던 것 같다. 여하튼 베 천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는 말은 그때의 두려운 분위기를 증거해준다. 당시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라도 그런 때에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라도 그런 위기 상황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의 뻔뻔스런 배신과 거짓된 입맞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도망침을 경험하셨다. 주께서는 마음의 큰 고통을 경험하셨다. 그것은 목회의 고통이었다. 그것은 구약교회를 목회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스런 마음과 같았다. 그것은 인간의 연약을 보시고 참고 품고 가셔야 하는 고통스런 일이었다. 교회를 목양하는 주의 종들은 세상에서 그런 고통을 각오하고 그런 인내를 배워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받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말고 주의 이름으로 당할 각양의 고난을 각오하고 끝까지,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53-65절,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으심
[53-54절]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이었다(마 26:57).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산헤드린 공회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최고회의의 의원들이었다. 그 새벽에 그들이 다 모인 것을 보면, 그 회의는 예수를 정죄하여 죽이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 소집된 계획된 회의이었다.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사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의인(義人)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여 죽이려 할 정도로 극도로 부패해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좇았다. 그는 제자들 중에 그래도 용감한 편이었다. 비록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지는 못했으나 멀찍이라도 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갔고 직원들과 함께 불을 쬐었다. 때는 이른봄이었고 밤 날씨는 쌀쌀했던 것 같다.
[55-59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는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들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죽을죄를 지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14:1의 증거대로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려고 뜻을 정하였고 계획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 대해 거짓 증거하는 자들은 많았으나 그 증거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만한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거짓되이 정죄하려 하였고 거짓 증인들은 그를 거짓되이 비난했다. 그러나 거짓 증거는 마귀의 죄요(요 8:44) 제9계명을 범하는 죄요 지옥갈 만한 큰 죄요(계 21:8) 천국 들어가지 못할 죄이다(계 21:27; 22:15). 잠언 19:5는,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고 말하였다.
[60-62절]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人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공회 앞에서 자신의 신분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대답하셨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하여 잠잠할 수 없으셨다. 그 질문은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묻는 중요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은 꼭 필요한 때에 말씀하셔야 했던 중요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또한 온 세상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신 것이다.
“너희는 인자(人子)가 권능의 오른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말씀과 일치한다.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니엘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人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모든 사람들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날에 그가 하늘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는 것을 볼 것이다(계 1:7).
[63-64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예수의 증언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그 증언이 참람하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한 증거라고 간주하였다. 공회원들도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였다. 누가복음에 보면,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은 그들의 결의에 반대하였다(눅 23:50-51).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한 것은 이성적으로 정당한 판단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실 수 없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했었다. 예를 들어, 예수가 무슨 죄를 지었다든지, 거짓된 일이 있었다든지, 혹은 기적을 행하지 못하였다는 등의 증거들이 있어야 했으나 그런 증거들은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본장 55절은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부당한 재판과 정죄를 받으셨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는 아무런 반증(反證)도 없이 그를 정죄한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이며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주님 자신의 분명한 증언이 있다. 주께서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또한 그가 행하신 많은 기적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각종 병자들, 예를 들어 나병, 중풍병, 열병, 귀신 들림, 소경, 혈루증, 벙어리, 손 마른 병, 절뚝발이 등을 고치셨고 또 죽은 자를 살리셨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풍랑을 잔잔케 하셨고 물 위로 걸어오셨고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셨다. 더욱이,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이런 증거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들이다.
[65절]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고 그를 멸시하였다. 불경건하고 악한 세상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와 같이 학대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전에 제자들이 선생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마 10:24). 그러므로 그의 제자된 우리도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와 매맞음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공회에서 부당한 심문을 받으셨고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되셨다. 그는 또 사람들에게 침 뱉음과 주먹과 손바닥으로 침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께서는 죄인들에게 멸시와 학대를 당하셨다.
둘째로,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의 공회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또 그의 신분에 대한 증거들은 풍부하였다. 그가 행하신 모든 기적들과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한다. 이 모든 증거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이 많은 증거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떤 증거를 통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는 구원의 가망이 없는 자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은 자, 곧 버림받은 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자는 다 성경의 증거들을 통해 그를 믿는다. 우리는 그를 확신하자.
셋째로, 우리는 그의 이름과 그의 교회를 위해 당할 각가지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고난과 핍박의 길이다. 왜 고난이 있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 마귀와 악령들이 활동하고 있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많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가 선생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께서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면, 우리도 그러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물론 자신을 살펴 회개할 것이 있으면 해야 하지만, 그 고난을 참고 견뎌야 한다.
66-72절, 베드로가 주를 세 번 부인함
[66-68절]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婢子)[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마침 닭이 울더라.]
베드로의 부인은 육신의 목숨을 위한 비겁한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던 이전의 그의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행위이었다. 그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을 저버렸다. 그것은 인간의 부끄러운 연약함이었다. 3년 간의 제자훈련이 아무 소용이 없어 보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고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킬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마침 닭이 울었다. 이것은 첫 번째 닭의 울음이었다. 베드로는 여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한 후 앞뜰로 나갔다. 앞뜰은 입구 쪽을 말한다. 그것은 그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보이는 것 같다.
[69-70절] 비자[그 여종](원문)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너는 갈릴리 사람이며 네 말씨가 그러하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전통본문).
‘그 여종’은 처음 여종을 가리켰다고 본다. 두 번째 말한 사람에 대해 복음서들은 ‘다른 여종’(마 26:71), ‘다른 사람’(눅 22:58), ‘사람들’(요 18:25) 등 다양하게 말한다. 두 번째는 그 처음 여종을 포함하여 다른 한 여종과 또 남자들이 함께 말했다고 보인다.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너는 갈릴리 사람이며 네 말씨가 그러하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마태와 마가의 증거는 동일하지만, 누가는 “또 한 사람이 말했다”고 증거하고(눅 22:59), 요한은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말했다”고 증거한다(요 18:26). 이때도,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말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 특히 대제사장의 종 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71-72절]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였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은 참으로 철저한 부인, 철저한 비겁과 불신실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큰 죄이었다. 그때 닭이 곧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울었다. 그는 심히 통곡하였다(마태, 누가).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그것도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부인한 것은 참으로 비겁하고 부끄러운 일이며 큰 죄이었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부인치 않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써 충성되고 능력 있는 증인들이 되었다. 그들은 핍박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주를 증거했다(행 4:8, 19-20, 31; 5:40-42). 오늘날 우리도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항상 성령 충만함으로써 죽도록 충성하는 증거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3장 예수님 말씀] 아담에서 예수님까지 족보(눅 3:1-38)
'신약 설교 알쓸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년 예배 새해 주일 설교말씀] 산 소망으로 거듭납시다(벧전 1:1~25) (0) | 2021.11.28 |
---|---|
[새벽예배 10분 설교문] 예수님과 백부장의 믿음 (마 8:5-13) (0) | 2021.11.26 |
[헬라어 성경 강해설교 마태복음] 메뚜기와 석청먹는 세례 요한(마 3:1-4) (0) | 2021.11.25 |
[고린도후서 3장 강해설교말씀] 새 언약의 직분(고후 3:1-18) (0) | 2021.11.19 |
[마태복음 주기도문 예수님 말씀] 주님의 뜻이 땅에도 임하소서(마 6:9-13) (0) | 2021.11.17 |
[누가복음 3장 예수님 말씀] 아담에서 예수님까지 족보(눅 3:1-38) (0) | 2021.11.14 |
[마가복음 예수님 말씀] 예수님의 부활 변형 변화산 사건(막 9:1-50) (0) | 2021.11.10 |
[요한복음 예수님 말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 거듭남(요 3:1-36) (0) | 2021.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