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마가복음 9장에서 변화산 사건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엘리야와 모세도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이 너무나 좋아서 산에서 내려오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초막을 짓는데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짓자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미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변형 변화산 사건(막 9:1-50)
1-13절, 변화산 사건
[1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다음절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나타낸 변화산 사건이나 성령께서 능력으로 강림하신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가리킬 것이다. 다니엘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로마 제국 시대에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했다(단 2:44). 이 예언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막 1:15; 4:26).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그의 심령 속에서 시작된다.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의 강림으로 복음 전파를 통하여 확장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2-3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예수께서는 때때로 세 제자들을 데려 다니셨다. 늘 함께 있으면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훈련이다.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변형되셔서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눈같이(전통본문) 심히 희어졌다. 그것은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이요 그의 거룩함과 무죄(無罪)함의 영광이다. 평소 감춰져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 산에서 밝히 드러났다.
[4-6절]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모세와 엘리야의 나타남은 신기하고 특별한 사건으로서 그들이 죽었으나 그들의 존재가 없어진 것이 아니고 그들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과 그들이 영광 중에 안식을 누릴 천국의 존재를 증거한다. 특히 구약 성도들 중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대표한다. 구약의 율법은 모세를 통해 전달되었고, 엘리야는 구약시대의 대표적 선지자로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 또 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제사 제도와 성막 제도로 예표되었고 선지자들의 글들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시다.
[7절]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약시대로부터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의 표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 가운데 찾아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친 음성의 증거이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있었다(막 1:11). 변화산 사건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또 하나의 유력한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실제로 중요한 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8-10절]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변화산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이 잠시 나타난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 일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부활은 그의 그리스도 되심을 확증할 것이다.
[11-13절]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구약성경 말라기 4:5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예언했다. 이 예언대로 보냄을 받은 자가 세례 요한이었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11:14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17:13에 보면, 제자들은 성경에 예언된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임을 알았다. 그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은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도 무시하였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사람들은 회개하고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산 위에서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의 증거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듣자.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복음서들에 기록된 그의 모든 말씀과 모든 성경을 읽고 듣고 믿고 실천하자.
14-32절,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
[14-16절]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산 아래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변론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병 고침이나 귀신 내쫓음에 대해 변론했을지 모른다. 그때 마침 예수께서 내려오셨다. 모든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였다. 그들이 놀란 것을 보면 그들이 방금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려와 그를 맞으며 문안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에게(전통사본)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고 물으셨다.
[17-18절]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 아들은 그의 외아들이었다(눅 9:38). 귀신이 그를 잡으면 그가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고 파리하여 갔다. 그것은 간질 증세와 같았다. 그의 소망이었을 외아들이 이런 악한 귀신에 붙잡혔으니 참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그의 제자들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받았으나(막 3:15; 6:7) 믿음이 약하여 그 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서기관들도, 무리들도 믿음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미 행하신 기적들을 통해 그를 믿을 만했으나 그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를 탄식하셨던 것 같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는 열심이 있어도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는 열심이 없다. 그러나 긍휼의 주께서는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다.
[20-22절]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 아이의 병은 아마 수년 이상된 불치(不治)의 병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예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구해야 할 때 그에게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확실한 믿음이 없었다.
[23-2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네가 믿을 수 있다면, 믿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니라](KJV)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그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었다. 전통사본에 보면, 그는 울면서 소리질렀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하였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믿음이다. 믿음 없는 자는 성경 읽고 기도하는 생활에 힘쓰지 않으며 예배드리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세상일이 바쁘다고 주일예배 빼먹기를 쉽게 할 것이다. 그런 행위들은 믿음 없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걱정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섭리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 간구해야 할 것이다.
[25-27절]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셨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예수님의 이 명령으로 충분하였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자연계와 정신계를 주관하는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가 명령하시자, 그 귀신은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다. 그 아이는 죽은 것같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그 아이는 일어섰다. 그 벙어리 되고 귀먹은 더러운 영은 나갔고 그 아이는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귀신은 예수님께 복종하였다. 그의 말씀에는 신적 능력이 있었다. 이 일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하였다.
[28-29절]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전통사본에는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면 조금 기도하고, 믿음이 강하면 많이 기도할 것이다. 금식은 몸에 힘을 주는 음식의 공급을 중단하고 포기하는 것이므로 비상한 기도의 방식이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성도는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금식하며 기도한다. 금식 기도는 어려운 문제 해결의 열쇠이다.
[30-32절]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人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예수께서는 이미 낮아지셨고 또 죽으심으로 더 낮아지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오늘날도 성도는 악령들과 싸운다(엡 6:12). 귀신은 악하고 더러운 영이며 사람을 불행케 하는 영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성도를 범죄케 하려 한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우리는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친히 귀신을 명령하여 내쫓으셨다. 그는 신적 능력을 가지신 신적 인격이시다. 그는 우리의 대속(代贖)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주께서는 믿음 없는 세대를 책망하셨다.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믿음이 있다면 아무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말씀과 기도로 능력의 주님과 동행하며 인도하심과 도우심과 공급하심을 받는다.
우리는 오직 기도로 행하자.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기도는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로 행해야 한다. 또 중대하거나 매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금식하며 기도하자. 29절,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33-42절, 서로 섬기며 영접할 것
[33-34절]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제자들에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명예심과 야망이 있었다. 이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다. 죄성의 본질은 교만이요 그것은 남에게 높임을 받으려는 명예심과 남을 지배하려는 욕심을 포함한다. 그들은 주님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변론이 부끄러운 것임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고쳐주기를 원하셨다. 모든 잘못은 고쳐야 한다. 열 번이라도 지적을 받고 죽을 때까지라도 고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하고 온전한 인격이 되기를 원하신다.
[35절]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교회 안에서 큰 자는 나이나 학력, 재력이나 사회적 신분, 심지어 신앙 연륜에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다 한 요소이긴 하겠지만, 바른 판단 기준은 아니다. 주의 말씀대로, 교회에서 큰 자는, 겸손히 다른 교인을 섬기는 자이다. 겸손히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크게 여기시는 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심으로 친히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
[36-37절]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내 이름으로’라는 말은 ‘내 이름 때문에’라는 뜻이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름 때문에, 예수님 믿는 가정의 자녀라는 이름 때문에, 그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영접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 예수님 이름 때문에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것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내보내실 때도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까닭은 예수께서 그 아이를 위해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며(마 16:26),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실 영혼이다(고전 8:11).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영접해야 한다.
[38절]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은 그 사람이 진실한 신자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시대에 귀신을 내어 쫓는 하나님의 은사가 제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주께서 풍성한 은사를 내리시는 시대에 주어진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내어쫓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의 이런 태도는 파벌주의나 당파심의 위험이 있었다고 보인다. 우리를 따라야만 옳다, 우리 교회에 나와야만 된다는 생각은 분명히 파벌주의요 당파심이다. 제자들이 단지 그가 그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판단하였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사람에게는 이런 편협한 마음이 있고 그것도 죄악이다.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이는]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없음이니라].
여기에 예수님의 포용심이 나타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이 없고 내용적으로 명백한 오류가 없는 한, 그를 허용하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역사적 정통 기독교 신앙을 비방하는 자유주의자들을 용납하거나 그들과 교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적 기독교를 명백히 이탈하고 왜곡시킨 천주교회나 각종 이단종파들을 용납하거나 교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명백히 비성경적인 교훈을 하거나 바른 교회와 목사를 비방하는 것이 아닌 경우, 우리 파가 아니고 우리 교회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를 비난하고 정죄하려는 태도는 편협한 당파심인 것이다. 우리는 그런 마음가짐과 태도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제와 절교, 포용과 경계의 선을 잘 그어야 한다.
[40절]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주께서는 “이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임이니라”(전통본문)고 말씀하셨다. 물론 이 말씀은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는 자의 모든 일이 허용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하며 그를 공공연히 반대하지 않는 자는, 비록 다른 점들에 있어서 잘못이 있을 수 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위하는 자라는 뜻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형제들에 대해 이런 정도의 포용심을 가져야 한다.
[41-42절]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작은 종 하나를 대접하는 것은 확실히 상을 받을 일이며,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아이 하나를 범죄케 하는 것은 심히 큰 죄악이 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자신을 낮추며 모든 사람을 섬기는 마음으로 행하자. 주의 제자된 우리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의 종처럼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이런 자가 교회에서 큰 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자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이어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형제자매이다. 교인들이 목사와 장로들과 교회 직분자들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지만, 직분자들 자신은 모든 교인들의 종처럼, 그들을 섬기며 사랑하고 그들의 믿음과 기쁨을 돕는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아이 하나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를 영접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교인 한 명, 또 어린아이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귀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한 영혼의 가치는 크다. 우리는 겸손히 서로 사랑하고 오래 참고 용납하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돌아보고 피차 복종하고 서로 영접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교훈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이러한 교훈을 실천하는 성도들의 모임이 참 교회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드러나게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정도의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런 자를 무시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어린아이 하나에게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기를 힘써야 하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어린아이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큰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
43-50절, 지옥의 교리
[43-50절]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불의]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받으며 모든 제물이 소금으로써 뿌려지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또한 가장 강조해서 지옥의 교리에 대해 말씀하셨다. 지옥은 천국과 대조되는 세계이다. 천국과 지옥은 세상의 마지막 상태 곧 영원한 상태이다. 그것은 몸의 죽음 후의 영혼의 상태일 뿐 아니라, 부활 후의 영원한 상태이다. 천국은 영생의 나라요 영광과 행복과 즐거움이 있는 나라이지만, 지옥은 영원한 형벌과 고통과 불행과 치욕이 있는 세계이다. 주께서는 두 손과 두 발과 두 눈을 가지고 범죄하여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손과 한 발과 한 눈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주셨다. 지옥은 악인을 위한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은 부활과 연관되어 있다. 주 예수께서는 이중 부활에 대해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5:28-29에서 그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5:28-29). 사도 바울은 경건한 유대인들처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고(행 24:15),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라고 증거했다(딤후 4:1). 그것은 구약 다니엘 12:2에서 이미 증거된 진리이었다.
지옥의 교리는 성경적 교리이다. 그것은 특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증거하신 교리이다. 주께서는 복음서에서 이 본문 외에 다른 여러 곳에서도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다(마 5:22, 27-30; 10:28; 23:15, 33; 25:41, 46; 눅 12:5). 주께서 가르치신 지옥은 악인의 몸과 영혼이 함께 던지우는 형벌의 장소이지만(마 10:28), 그는 누가복음 16:23-28에서 악인이 죽은 후 아직 부활하기 전에도 그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을 당할 것을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1:9에서 주의 재림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지옥이다.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끝부분에서 지옥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하였다(계 19:20; 20:10, 14-15; 21:8).
지옥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자이시다. 죄의 보응은 죽음이요(롬 6:23) 그것은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지옥은 또한 죄의 무서운 사실을 증거한다. 죄는 결코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여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지옥으로 이끄는 심각한 문제이다. 큰 죄를 지은 사람만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모든 죄인이 다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성경은 천국과 지옥 외에 다른 장소를 말하지 않는다. 제3의 지대는 없다. 죄는 사람을 지옥 꺼지지 않는 불로 인도하는 무서운 존재이다.
그러면 지옥에서 구원받는 길은 무엇인가? 본문은 사람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으려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그러나 범죄치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성경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계 20:15). 또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인식하고 두려워하자. 사람은 다른 이의 몸을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에 던지시는 두려우신 심판자이시다(마 10:28). 지옥은 하나님의 공의가 어떠함을 잘 증거한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공의를 바르게 인식하고 그를 두려워하자.
또 우리는 죄의 심각한 문제를 인식하자. 죄는 심각한 문제이다. 죄의 보응은 죽음이며 그것은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죄는 사람을 지옥으로 이끄는 무서운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하고 모든 죄를 다 끊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손과 우리의 발과 우리의 눈이 우리로 범죄케 하지 못하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자.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속죄신앙을 가지자. 그것만이 지옥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의 의는 예수의 피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의만 의지하자.
[요한복음 예수님 말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 거듭남(요 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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