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자료 알쓸잡

[교회학교 성경공부자료] 교회 성장과 제자 개발에 대한 연구

복음의 능력 2022. 5. 26. 15:24
반응형

목회를 하면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습니다. 교회에 성도들이 몰려오고 복음으로 하나가 될 때 목회자의 마음은 기쁩니다. 그런데 양적 성장만 추구하다 보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성장도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자들을 배출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제자들을 양성하여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무조건 양적 성장만 바라보고 목회를 할 것이 아니라 영적 성장과 내적 성장도 함께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을 연구하고 전하여 많은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하여 함께 동역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 성장과 제자 개발

 

설교자 : 홍 정 길 목 사

 

서 론

 

제자양육의 실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습은 우리 주님의 사역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3년 동안 이 땅에서 행하셨던 일은 어떤 문화나 거대하게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제자 열두 명을 키우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주님께서 수많은 군중을 피하셔서 한적한 곳에 나아가 열두 명의 제자와 가까이 교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3년 동안 가장 정성을 쏟았던 것은 제자훈련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 불량품(유다를 지칭)이 있었던 것도 우리는 잘 압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제자 삼는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완전하게 세울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 론

 

제자훈련의 본이 되신 예수님

예수께서는 열 한 명의 제자를 앞에 놓고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28: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입니까. 겨우 열 한 명의 제자를 향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그 열한 명의 자질은 어떠했습니까. 북쪽 나사렛 동네에 사는 가난한 어부들이 아니었습니까. 이 사람들은 배우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자 모두 자기 스승을 버려두고 도망간 비겁자들이었습니다. 그런 형편없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어마어마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러한 말을 했더라면 아마도 사상 최대의 코미디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장하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 이 세계가 주님의 제자들로 꽉 차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훈련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했지만 당시의 제자들을 이 훈련의 가치를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 이후에 나가서 말씀을 증거할 때 3천명이 돌아오고, 5천명이 돌아오고, 허다한 무리가 주님 앞에 돌아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복음을 증거하여 주님께서 인도하는 일이 사도들에 의해서 계속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에베소에는 도무지 말씀을 증거 할 수 없도록 핍박이 심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바울은 결국 당시의 관례에 따라 두란노라는 서원을 빌어서 거기서 제자를 키우게 된 것입니다. 2년 동안 사도 바울이 두란노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매 아시아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부흥회 스타일로 여러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 한 것이 아니라 몇 사람을 뽑아다가 두란노에서 집중적으로 가르쳤는데 오히려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더라는 얘기입니다.

이후로 사도 바울은 제자를 키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를 보면 8~12명이 바울의 주변에 늘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감옥 속에서도 제자들이 바울의 곁에 있었던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평생토록 제자를 키우는 일에 자기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 바울과 제자들에 의해서 신약의 3분의 2가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먼저 목회자가 강해져야 한다.

 

디모데후서 2:1~2를 보면 바울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기의 모든 신알을 정리함과 더불어 목회의 방법을 정리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가지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네가 강해져야겠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하나님 앞에서 강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강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은혜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내 결심과 의지는 한없이 약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속에 충만하게 채워질 때에 우리는 한없이 강해 질 수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승리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에 앞서서 가장 강조해야 될 것은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 지식 속에 갇힌 사람인가 하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제자훈련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라고 말하기 전에 네가 은혜 안에서 강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다음에 계속해서 말하기를 충성된 사람에게 복음을 부탁하라.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섞여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어떻게 제자 삼는 사역이 전체 교인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교회는 제자 삼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챠지는 말하기를 앞으로는 세계교회가 자유주의냐 보수주의냐 하는 말보다는 제자 운동을 하는 교회냐 안 하는 교회냐로 나누어질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교회들도 현재 그리스도의 삶을 강조하는 교회와 그렇지 못하는 교회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전자는 계속해서 번창해 나가고 있고, 후자는 쇠퇴 추세에 있다고 합니다.

 

제자훈련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선 필자가 제일 먼저 제자 운동을 교회에서 시작했는데 맨 처음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 주변의 많은 목회자들이 말하기를 당신이 학생단체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데 교인들 가르쳐 봐야 목사만 손해 본다하는 식의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조금 안다고 하는 교인 치고 목사에게 순종하는 사람 보았느냐는 얘기도 많이 했었습니다.

사실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에 예배드릴 장소도 없어서 개인집에서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도 많은 사람들이 “홍 목사 그 좋은 아파트 단지에서 교회 건물도 없이, 예배도 아닌 성경공부 스타일로 모인다면 교회가 될 법한 일이냐”고 충고도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 시위대가 뒤집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위대를 뒤집은 복음이 내가 전하는 복음이라면 감옥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문제는 사도 바울이 가진 복음을 내가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하는 점이지 환경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물론 목회에 성공하려면 환경도 좋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환경이 가장 나쁜 곳에서도 여러 차례 목회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은 재개발구역으로 묶여서 완전히 없어진 산동네에서도 그곳 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목회를 해 본 사람입니다. 그곳은 교회가 안 된다고 말들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이 있어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뒤집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에게 주신 복음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내 개인적인 체험을 좀 더 언급하겠습니다. 나의 부친은 장로님이셨기 때문에 나는 자연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아마 나처럼 교리적일 수는 있지만 고백적이지 못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약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마주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신앙이 참으로 교리적인 동시에 참으로 고백적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교리적으로만 예수를 알고 지내다가 1965724일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분은 그 순간부터 내 구세주였고, 내 인생의 왕이 되셨습니다.

나는 그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몇 사람을 전도했고, 나와 비슷한 사람을 붙잡아서 같이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바뀌는 것을 보고 기뻐했더니 교인들이 말하기를, “그 열심은 쉽게 사그라진다. 조금 지나면 우리처럼 될 테니까 너무 좋아하지 말라.” 그래서 제가 말하기를, “아니 성경공부를 하는 동안 나와 똑같이 변화되던데요하니까 그거야 어린 학생들이니까 삶이 없어서 원리만 맞으면 아멘’ ‘할렐루야할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처럼 구조적인 악 속에 살다 보면 어떻게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겠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러한 말에 계속 도전을 받으면서도 줄기차게 일반 교인들에게도 성경공부와 제자 교육을 시켜 왔습니다. 대학생들은 그분들의 말처럼 쉽게 변화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C.C.C에 만 10년 있는 동안에 무수한 대학생들을 만나서 전했고 그들이 말씀 앞에 순종하기 시작하면서 생애 전체가 바뀌는 것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일반 평신도들도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평신도를 대상으로 실시해서 어떤 결론을 얻었다는 소리를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평신도들에게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은 사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개 교회에서 봉사해 본 경험 없이 그저 대학생 선교만 하다가 목회 전선에 들어섰으니 아는 것이라고는 대학생들에게 제자 교육을 시키던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생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제자 교육이 일반 평신도들이라고 안 되겠느냐는 확신 속에서 첫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반포아파트에서도 C.C.C에서와 똑같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제자 교육이 되더라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반포아파트 내에 보살회가 있는데, 이 불교 모임에서 기독교의 입문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섯 강좌를 가르쳤더니 보살회 회원 중 3분의 2가 우리 교회에 출석하게 돼 버렸고, 반포 보살회는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신학은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이 말은 신학을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신학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신학 자체가 영혼의 양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일 뿐입니다.

 

제자훈련은 구원의 확신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제자훈련을 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정말로 거듭난 사람인가부터 타진해 보아야 합니다. 싹트지 않는 씨앗에는 아무리 좋은 거름을 주어도 자라나지 않습니다. 일단 싹이 나 있어야 물을 주고 거름을 줄 때 자라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대상자의 거듭남에 대한 여부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듭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자는 이미 거듭났으면 됐지 확신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 비록 거듭났다 하더라도 확신이 없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과 감정적으로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확신이 없으면 감격도 기쁨도 없고, 그에 수반되는 전도열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생을 사는 것이 본인들에게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영양소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식물이 싹이 났으면 그에 필요한 햇빛과 수분과 거름을 공급해 주어야 자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사람에게도 다섯 가지의 영양소가 공급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10:17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난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없이는 믿음이 안 생깁니다. 말씀이 곧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썩어질 것으로 거듭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믿는다 믿는다 하는데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구체적인 표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인격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인격이 성숙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목사라 할지라도 성경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의 신앙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곧 나를 향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내 영혼의 능력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내가 스스로 읽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제자훈련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각 사람이 스스로 목사의 도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흡수할 수 있도록 키워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지 않느냐옳은 말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목회는 목사의 도움이 필요 없는 목회가 아니겠습니까.

교인과 목사가 만날 수 있는 시간이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각 사람마다 끝없는 상황들에 부딪히며 살아갑니다. 이 모든 상황들을 어떻게 목사가 한 번의 설교를 통해서 다 해결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교인들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서 그때마다 대처해 나가는 것이 훨씬 이상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들이 스스로 하나님 말씀에서 자양분을 흡수하고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 준비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성경본문을 얼마나 정확하게 읽고 이해하는가 하는 점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80%는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캄벨 몰간(Campbell Morgan)은 설교 준비를 위해서 본문을 80번씩 읽으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존 스타트 목사도 설교준비를 위해서는 성경본문을 많이 읽으라고 강조했습니다.

만약에 우리 목회자들이 설교할 본문만이라도 일주일 동안 계속 묵상하면서 그것을 내 영혼의 양식으로 정직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능력으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자기에게 부딪혀 오는 아무런 깨우침도 없이 그냥 남의 글을 따다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쏟아 놓는 설교라면 무슨 역사가 있겠습니까.

 

둘째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평신도들에게 기도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호흡과 같아서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특별히 기도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초신자로 등록해서 초신자 성경공부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 달이 지나면 개인 기도를 다 할 수 있게 됩니다. 석 달이 지나면 공중 기도를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자라게 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기도훈련이 따릅니다.

또 그룹 성경공부 시간에는 대화식 기도를 가르칩니다. 제일 처음 리더가 오늘 우리에게 성경공부를 마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를 시작하면 둘째 사람이 오늘 구제에 대해서 배울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일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내 노동의 가치관을 바꾸겠습니다. 주님, 오늘도 아프리카에 있는 난민들을 기억해 주옵소서하고 기도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전원이 한 마디씩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기도하라면 저는 하나님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 그래요 그러면 당신이 하나님께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기도하십시오하면 그 사람이 기도할 때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안 믿어지는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에 대해서도 교인들에게 잘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기도는 첫째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둘째는, 내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넷째는, 우리의 필요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기도는 이 네 가지를 골고루 다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이런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네 번째의 간구만을 기도로 생각하고 그렇게 기도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경이 기도라고 말할 때는 예배의 요소를 지닌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교인들에게 올바른 기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기도가 곧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는 단순 논리는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또 하나 가르쳐야 될 부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교인들 중에는 기도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기도를 시켜보십시오.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낄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생각하기에는 그것쯤이야 알겠지 하는 것들도 상상외로 평신도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도 가장 쉬운 단어로 그 원리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셋째로 전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전도는 이 땅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적인 행동이 어느 날인가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완성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직접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면서 대화하는 것으로 바뀔 날이 올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찬양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드려지는 그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록된 문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때는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직접 듣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신앙행동이 10, 100배 더 아름답게 완성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만 할 수 있는 신앙행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천국에 가서는 전도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고넬료에게 천사가 찾아갑니다. 그러나 천사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지는 못합니다. 시몬 베드로를 청해다 복음을 듣게 합니다. 이렇듯이 복음 증거는 천사도 할 수 없는 사람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 가운데서도 특별히 증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가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자가 예수 믿게 못합니다. 전도는 논리나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받는 성도가 구속에 대한 확신을 갖고 행하는 증거가 전도입니다. 오늘날도 전도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증거가 확실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전도에 대해서 교인들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전도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서 해야지, 인위적으로 준비해서 될 일이 아니다”고, 그러면 설교는 왜 준비해서 한단 말입니까. 준비 자체가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3:15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복음 증거를 맘 내키는 대로, 입에 쏠리는 대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정된 시간에 여러 가지 복잡한 여건 속에서 복음을 효과 있게 전하기 위해서는 준비되고 훈련되어야 합니다.

사실 전도할 줄 모르는 교회는 불임증 여인과 똑같습니다. 능력을 잃어버린 교입니다. 한때 아파트가 인기 있을 때는 사람들이 아파트 당첨만 되어도 그렇게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내 영혼의 생명을 다시 얻은 것에 대해서는 왜 자랑하지 않습니까? 병 좀 나았다고 그처럼 떠들어 대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이 내 것이 된 감격은 왜 전하지 못한단 말니까?

 

네 번째는, 교제해야 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보수파인 나 자신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인격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만 자란다도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틈바구니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신앙은 참 좋은데 옆에 가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옆에 가면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열심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반면에 이웃들에게 피해도 제일 많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인격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신앙인격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의 약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특별히 연합운동을 못하는 것이 보수파의 맹점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내 개인적으로도 요한복음 17장을 강해할 때마다 뼈아픈 죄책감을 하나님 앞에 느낍니다. “진리로 하나 되게 하옵소서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우리는 회개하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잘 타는 장작불도 흩어 놓으면 꺼지고 맙니다. 모두어질 때 그것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교회가 서로 모여서 교제할 때 깊은 신앙적인 성숙이 따르게 됩니다.

오늘날 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교회 형편은 어떠합니까.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도망가듯이 흩어집니다. 마치 밀물처럼 몰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현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교회 교인간에게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도 교회가 커짐에 따라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성도 간의 교제의 부족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 가운데 웃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세계 과학자대회가 하와이에서 열린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 대표로 참석했던 사람들이 식당에서 두 사람씩 마주 보고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분이 앞에 않은 분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기도를 마친 다음에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박사님, 교회에 나가시는군요.” “예 교회에 나갑니다.” “어느 교회에 나가십니까?” “남서울 교회에 나갑니다.” “, 그래요! 저도 남서울교회에 나갑니다.” 그분들이 둘 다 우리 교회 평교인도 아니었습니다. 한 분은 대학부 부장이고, 또 한분은 초등부 부감입니다. 그런데 한 교회 안에서는 모르고 지내다가 하와이에서 알게 됐다니 얼마나 웃지 못할 일입니까.

 

마지막으로 봉사해야 됩니다.

자랐으면 살도록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작년의 경우 전 예산의 62%가 교회 밖으로 사용됐습니다. 무료 급식소, 구치소, 감별소, 고아원, 양로원, 정신병원, 빈민촌 등을 대상으로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힘을 합해서 그들을 위해 교회 예산을 쓰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봉사를 통해서, 자기희생을 통해서, 신앙이 얼마나 성장하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그것을 우리 교회 의료선교회 회원들에게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75명의 의료인으로 구성된 의료선교회는 자기들의 없는 시간을 쪼개서 봉사하기 시작하면서 신앙이 부쩍 부쩍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교회가 그렇게 예산을 잘라서 사회봉사에 쓰니까 교인들도 어떻게 하면 자기 생활을 줄여서 이웃들에게 봉사할까 하는 패턴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배운 대로 실천이 안 되면 오히려 그것이 자기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천을 전제로 한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결 론

 

지금까지 교회가 제자 삼은 일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다섯 가지 원리를 언급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전도와 교제와 봉사, 이 다섯 가지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다섯가지 중에서 올해 어느 부분이 부족했는가를 평가하면서 내년 계획을 세웁니다 또 올해도 진행하는 중에 어느 부분이 강조되어야 하겠는가를 당회와 같이 의논합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너무나 간단하고 단순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잘 알고 있고 간단한 것들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목회자 여러분은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에 따라서 한 사람의 제자 삼는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커리큘럼을 만들기 바랍니다. 하나가 안되니까 열이 안 되는 법입니다. 열이 안되니까 백이 안되는 법입니다. 하나를 잘 키울 때 여기에서 시작된 제자 사역이 교회를 놀랍도록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줄로 믿습니다.

[민수기 히브리어 주석 강해설교] 성막 지성물을 운반하는 고핫 자손(민 4:9-20)

 

[민수기 히브리어 주석강해설교] 성막 지성물을 운반하는 고핫 자손(민 4:9-20)

민수기 4장에서는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이 성막의 지성소에 있는 지성물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지성소는 더 거룩한 장소입니다. 이곳에 법궤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

skh12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