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욥기 5장 히브리어 성경 강해 중에서 미련한 자가 당하는 멸망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인과응보식의 해석을 통해서 욥에게 회개하라고 권면합니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께 멸망을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도 율법주의 신앙을 하면 안 됩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신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미련한 자가 당하는 멸망(욥 5:1-7)
1절 케라 나 하예쉬 오네카 베엘 미 미케도쉼 티프네
성 경: [욥5:1]
욥5:1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미련한 자가 당하는 멸망]
거룩한 자 - 본서 서두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아들'(1:6;2:1), 곧 '천사'(angel)를 가리킨다(15:15;시 89:5,7 ;단 4:13,17,23:8:13;슥 14:5). 그러나 KJV는 '성인들'(thesaints), LB는 '그들의 신들'(their gods)로 각각 옮기고 있다. 여기서 LB의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번역을 따를 경우 욥 또는 엘리바스가 이방의 다신교적 관념(the conception of poly theism)을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 경우 욥이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줄 대상으로 이방 신을 찾고 있다고 은연중 엘리바스가 힐책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한 히브리적 유일신론을 소지한 욥이 실제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엘리바스 또한 욥과 동일한 믿음을 소유했던 고로 욥에게 그 같은 일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2절 키 레에빌 야하라그 카아스 우포테 타미트 킨아
성 경: [욥5:2]
욥5: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미련한 자가 당하는 멸망]
본절에서 엘리바스는 구체적으로 욥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하 전개되는(3-7절) 내용에 근거해 볼 때 본문은 욥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 전체는 욥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해 분노와 시기를 터뜨렸으며, 이로 말미암아 결국 여느 악인과 마찬가지로 멸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다. 지금껏 엘리바스는 욥을 직접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으나 이 시점에 이르러 욥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욥이 고난 중에 다소 불신앙적인 것처럼 보이는 저주와 한탄(3장)을 토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믿음을 아예 상시 하지는 아니했으므로 그를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로 매도한 엘리바스의 처사는 분명 지나친 감이 있다.
3절 아니 라이티 에빌 마쉐리쉬 바에코브 나베후 피트옴
성 경: [욥5:3]
욥5:3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악인의 비참한 운명]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을 언급함으로써 2절의 논증을 확인시키고 있다. 이와 비슷한 실례는 4:8에도 나타나는 바,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엘리바스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논증이 직접적 체험에 토대한 무오(無誤)한 진리임을 은연중 내비치고 있다.
뿌리박는 것 - 앞에 나오는 '미련한 자'를 '나무'(tree)로 보면 본절이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즉, 나무가 튼튼히 뿌리를 박고 무성해 가는 것처럼 종종 악인이 현세에서 번성한다는 뜻이다(LB, Those who turn from God may be successful). 이처럼 사람을 특정 사물, 특히 나무에 비유하는 것은 히브리 시가 문학에서 흔히 발견된다(8:16-22;14:7-9;15:32; 18:16;19:10; 24:20; 29:19; 시 1:3;52:8;92:12, 13;잠 12:3, 12등).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그러나 내가 당장에 저주하였다'(KJV, but suddenly I cursed his habitation)이다. 이 번역을 따를 경우 본절 전체는 (1) '내가 미련한 자(악인)의 번성을 보아왔다. 그러나 내가 그 집을 저주하였다(그래서 그 집이 멸망당하였다)'. (2) '내가 미련한 자의 번성을 보아왔다. 그러나 내가 그 집을 저주하였다(그래서 그 집이 멸망당하였다)'. (2) '내가 미련한 자의 번성을 보아왔다(그러나 그 집이 멸망하였다). 그래서 내가 당장 그 멸망한 집을 보고 저주를 하였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전자는 악인이 멸망을 미리 예견하고 엘리바스가 저주한 것이며, 후자는 악인이 멸망하자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인 줄 알고 엘리바스도 저주했다는 것이다. 로린슨(G. Rawlinson), 에발트(Ewald), 쉴로트만(Schlottmann)등은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델리취(Delitzsch), 랑게(Lange), 드라이버(Driver), 그레이(Gray) 등은 후자의 견해를 취한다. 양쪽 다 일리가 있으나 전후 문맥상 후자 쪽이 보다 자연스럽다 하겠다(NIV, but suddenly his house was cursed). 한편 본절에서 시작하여 7절에서 끝나는 미련한 자의 받을 재앙과 17-2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자가 받을 복이 서로 대조되어 나타난다.
4절 이르하쿠 바나이브 미예샤 베이다케우 바샤아르 베에인 마칠
성 경: [욥5:4]
욥5:4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악인의 비참한 운명]전절(3절)
이 미련한 자(악인)에 대한 저주를 선포한 것이라면 본절에서부터 7절까지는 그가 받을 재난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본절은 가족에게 임할 재앙을 첫 번째로 묘사하고 있다.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 우리는 이를 죄가 그 자식에게까지 미친다고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엘리바스는 이러한 의도를 가졌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후에 욥이 본인의 죄는 본인 스스로에게 갚아져야 한다고 반박하기 때문이다(21:19,29). 성경은 '아비의 죄가 삼사 대까지' 간다(출 20:5; 신 5:9 등)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표현은 죄에 대한 강한 경계심과 경종을 주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처럼 아비의 범죄가 그 자손에게 악영향을 미쳐 그 역시 아비와 동일한 범죄를 자행하여 심판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실제로 성경은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겔 14:20;13절)고 말함으로써 죄와 의에 대한 보응이 각 개인 주체에 한정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성문에서 눌리나 - '성문'은 '법정'(court)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고대 히브리인들이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공적(公的) 장소의 하나인 성문에서 재판을 한 실례에 비추어 볼 때(신 25:7; 시 127:5; 사 29:21; 암 5:10) 매우 설득력이 있다. 만일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본절은 미련한 자(3절)의 자녀가 재판에서 불의한 판결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욥 당시는 족장 시대였던 고로 성문에서 재판이 실시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실제 족장 시대를 다루고 있는 창세기에는 재판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성문'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KJV, RSV, gate). 따라서 본문은 악인의 자녀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성문(城門) 또는 대로(大路)에서 부당한 처사(공동 번역, '몰매를 맞아도')를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럴 때 '구하는 자가 없다'는 말은 악인은 그 쌓은 죄로 인해 위경(危境) 시에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편 앤더슨(F.I.Anderson)은, 본절의 '성문'이 이례적으로 '광풍', '대풍'(1:19)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문'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광풍'과 철자가 똑같기 때문이다(두 단어 모두 '사아르'임). 만일 이 주장을 취하게 될 경우에 본절의 '성문'은 1:19에 나오는 '대풍'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고 본절은 대풍에 의해 그 자녀를 잃은(1:19) 욥의 재앙을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3절에서 욥을 은근히 '미련한 자', '어리석은 자'로 간주하려 한 엘리바스의 의도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해석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 하겠다.
5절 아쎄르 케치로 라에브 요켈 베엘 미치님 이카헤후 베솨아프 차밈 헬람
성 경: [욥5:5]
욥5:5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악인의 비참한 운명]
4절에서 악인의 가족이 받는 재앙을 묘사한 엘리바스가 본절에서는 그가 받을 재산상의 손해를 언급하고 있다. 즉, 악인은 그 재물을 불의한 방법으로 획득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또한 그것을 방비하기 위해 아무리 공교(工巧)한 계책을 마련한다 할지라도 잃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으며 - 족장 시대의 근동인들은 추수한 뒤 곡식단을 가시나무로 가려 보관하거나 그 낱알을 왕겨로 덮어 보관하였었다. 이는 짐승이 물고 가거나 먹는 것을 방비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종종 출몰하여 식량을 약탈하는 침입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따라서 본절은 악인이 그 곡식(재산)을 보전하기 위해 자구책을 강구하나 결국 그것도 별로 소용이 없을 것임을 나타내 준다.
올무 - 매우 난해한 단어로서 대략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1) 침탈자:이러한 번역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는 KJV, LB, ICC, 랑게 주석, 풀핏 주석이 이 번역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뒤에 나오는 '입을 벌리느니라'는 '마셔버리다'(swallowethup)로 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본절 상반부에 나오는 '주린 자'(the thirsty)='먹다'(eat up)와 본절의 '목마른 자'(the hungry)='마시다'(swalloweth up)가 자연스러운 대구가 되기 때문이다. (3)'올무' 또는 올무를 만드는 사람:이러한 번역은 시리아 벌게이트(Aqulla Symmacus Syr Ug), 카알 델리취 주석(Keil & Delitzsch Commentary)등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견해는 모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올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밈'이 단순히 '올가미'(18:9)를 의미할 뿐 아니라 상징적으로 '도둑', '약탈자', '음모자'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올무'는 악인의 재산을 빼앗는 침입자(약탈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결론짓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한편 본문의 사건은 욥이 불의의 약탈자, 즉 스바 사람(1:15)과 갈대아인(1:17)에 의해 그 재산과 자녀를 잃은 사건을 연상시킨다. 아마 엘리바스는 이러한 암시적인 사건을 예로 제시하며 욥의 은밀한 죄를 추궁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6절 키 로 예체 메아파르 아벤 우메아다마 로 이체마흐 아말
7절 키 아담 레아말 율라드 우베네 레쎄프 야게비후 우프
성 경: [욥5:6,7]
욥5:6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욥5: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주제1: [계속되는 엘리바스의 충고(2)]
주제2: [고난 그 자체인 인생]
여기에서 주장하는 엘리바스의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난의 원인(thecause of sufferings): 엘리바스는 인간의 고난이 외부적인 원인이 아닌 인간 내부의 원인에 의해 발생되는 것으로 보았다. 즉, 그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나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문제(죄성, 부패성)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철저히 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창 3:17, 19에서 분명히 보듯 인간은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적대적인 자연환경과 부단히 투쟁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2) 고난의 범위(the extension of sufferings) :엘리바스는 7절 상반부에서 '인생은 곧 고난이다'라는 논리를 통해 고난이 모든 인간들에게 임함을 역설하고 있다. 즉, 인간 모두는 이 고난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7절 하반절의 표현 역시 인생의 고난이 변개될 수 없는 자명한 이치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엘리바스의 논리는 다분히 일반론적 측면에 기울어진 감이 농후하다. 즉, 4:17-21에서 인간의 보편적 유한성과 부패성을 주장한 그는 본문에서도 인생의 고난을 보편적 원리에 의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이론은 원칙론적 측면에서 지극히 타당하다. 따라서 욥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도식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에서만 현실 상황(욥의 고난도 포함)을 파악하여 그것을 단순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즉, 그는 욥(의인, 1:1;2:3)이라는 특수한 한 개인을 인생 일반(죄인)의 범주에 포함시켜 그의 고난을 정당화시키고 따라서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난에 아무런 불평 없이 무조건 순응하기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불티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르쉬프의 아들들'(sons of Resheph)이다. 고대 가나안 신화에 의하면 르쉬프는 역병과 파괴의 신이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는 이것(또는 '르쉬프의 아들들')이 '불', '역병'(신 32:24; 합 3:5), '번갯불'(시 78:48)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도 '르쉬프의 아들들'로 직역하는 것보다는 '불티'(LB,flames)로 옮기는 것이 좋다(Hahn, Barnes, Delitzsch, Dillmann 등), 본절은 불이 탈 때 그 재가 항상 위로 치솟는 것처럼 인생의 고난이 피할 수 없는 자명한 것임을 나타내 주는 비유이다.
[전도서 2장 히브리어 강해설교] 인생 쾌락과 부(富)의 허무(전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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