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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 좋은 성경 말씀] 예루살렘 회의(행 15:1-41)

복음의 능력 2022. 6. 20.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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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에서는 예루살렘 공의회와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에 대한 할례 문제에 대해서 제기되었습니다. 유대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교회는 율법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면 안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행 15:1-41)

 

1-11, 예루살렘 회의가 열림

[1-2]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교회에는 교훈이 중요하다. 교회는 바른 교리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잘못된 교리가 들어오면 교회를 어지럽히고 무너뜨린다. 그런데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잘못된 교훈을 하는 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신자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할례를 받는 것은 구약의 율법을 지킨다는 약속의 뜻이 있었다. 즉 그들은 사람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런 사상을 율법주의라고 부른다.

그들의 잘못된 교훈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교회 안에서 교리적 논쟁은 필요하다. 그것은 회피할 일이 아니다. 교리적 논쟁은 주로 잘못된 교훈 때문에 생긴다. 잘못된 교훈은 사탄의 끊임없는 활동과 우리의 지식과 이해력의 부족 때문에 지상 교회 내에서 항상 있을 것이다. 교리적 논쟁은 실상 진리에 대한 관심과 충성심에서 나온다. 교리적 오류가 있는 데도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관심과 충성심이 없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지키려 할 것이고 교리적 오류를 비평하고 배격하려 할 것이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형제들은 율법주의 오류의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그 교회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그것은 반드시 사도들과 장로들의 권위와 지식이 더 나아서라기보다 교회의 일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이었을 것이다. 교훈의 차이는 교회의 일체성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다. 교회는 교리 사상에 있어서 하나이어야 가장 이상적이다.

[3-5]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했다.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성도들과 사도들과 장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선교 보고이며 간증이었다. 그들의 선교 보고대로, 그들이 행한 일들은 그들이 행한 일들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보고를 들은 사람들 중에서 과거 바리새파에 속했던 어떤 믿는 사람들은 일어나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안디옥 교회에 들어왔던 바로 그 율법주의 사상이었다. 구약의 증표이었던 할례는 영원한 규례인가? 구약의 율법은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고 신약 아래서 폐지되지 않은 영원한 법인가? 이 문제는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속죄사역이 모세의 율법을 완성하였다는 것은 처음부터 쉽게 이해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아직 적었던 사도 시대 초기에 어떤 바리새파 배경의 교인들이 복음을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하려 한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6-11]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모였다. 그것은 교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최초의 교회 회의이었다. 그 교회 회의에서는 많은 변론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권위적 계시로 선포하게 하시는 대신에 많은 변론을 통해 깨닫도록 하셨다. 사람들의 무지와 이해력의 부족은 토론을 통해 서서히 극복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방법이었다. 그 후에도 교회는 일치된 교리적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때때로 그런 과정을 밟아야 할 것이다. 교리적 논쟁은 힘든 과정이지만, 교회의 교리적 순결성과 일치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단지 그것은 기도와 겸손과 인내로써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 회의에서 베드로의 발언은 몇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셨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셨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셨다. 넷째로, 우리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마음의 깨끗함을 얻었다.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감당할 수 없었던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지우려 한다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그들과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는다고 말했다. 즉 그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율법은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정죄하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것이요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었다(10:4; 고후 5:21; 3:13). 그러므로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율법은 폐지되었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 구원의 은혜성에 대한 이 진리는 모든 교인들이 처음부터 이해한 것이 아니고 교리적 논쟁을 통해 서서히 밝히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주의도 오류이지만, 복음 안에서는 율법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반()율법주의, 즉 율법폐기론도 오류이다. 율법, 특히 도덕법은 구원의 방법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지만, 생활 규칙으로서는 모든 성도가 여전히 지켜야 한다는 점도 있다. 신약성경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교회는 교리적 순결성과 일치를 가져야 한다. 교리적 순결성과 일치는 교회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둘째로, 교회의 교리적 순결성과 일치는 교리적 토론을 통해 온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교리적 토론은 힘든 과정이지만 필요하다. 단지, 그것은 말씀의 묵상과 기도, 겸손과 사랑과 인내로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로, 율법주의는 오류이다.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똑같이 그러하다. 도덕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고, 단지 구원받은 증거와 열매일 뿐이다.

12-29,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

[12-18]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奇事) 고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들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이 말을 마치자, 예수님의 동생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었던 야고보는 일어나 베드로의 증거가 선지자들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말하면서 아모스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였다. 그것은 메시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 즉 유대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과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에 대한 예언이었다.

[19-21]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야고보는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몇 가지 점들만 조심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그가 말한 몇 가지 점들이란 첫째로 우상의 더러운 것과 둘째로 음행과 셋째로 목매어 죽인 것과 피이다. 그는 예수님 믿는 이방인들이 이런 것들을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첫째로, 야고보는 이방인 신자들이 우상의 더러운 것을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이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가리킨다(29). 그것은 우상제물 자체가 죄악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연약한 자들의 마음을 더럽히고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하기 때문이었다(고전 8:9-10; 10:23-28). 우상숭배는 어느 시대나 인간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죄악이다.

둘째로, 그는 이방인 신자들이 음행을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음행은 우상숭배와 더불어 인간 사회의 대표적인 죄악이다. 오늘날과 같이 옛날의 이방 사회는 너무 음란하여서 음행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그럴 수 없다. 음행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다(1:24, 26-27).

셋째로, 그는 이방인 신자들이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목매어 죽인 것은 피를 빼지 않은 고기를 가리킨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옛 시대에 이방 세계에서 식용 고기는 피를 빼지 않은 것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율법은 피가 생명이므로 피 먹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3:17; 7:26-27; 17:10, 14; 19:26 ) 목매어 죽인 것과 피는 유대인들에게 큰 거리낌이 되었다.

야고보의 제안은 영속적 성격을 가진 내용은 아니라고 본다. 우상숭배와 음행은 어느 시대에나 큰 죄이지만,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은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의 교회생활을 위해 일시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만일 이방인 신자들이 율법에 금지된 그런 것들을 용납한다면, 옛날부터 율법을 지켜왔던 유대인 신자들은 마음에 큰 거리낌을 가졌을 것이며 교회생활에서 마음의 상당한 불편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 신자들은 이런 점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모세의 율법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이방인 신자들도 이런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22-29]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장로들과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너희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서](전통본문)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예루살렘 회의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 유다와 실라를 선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였고 또 그들의 편에 한 편지를 부치며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문안하였다.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편지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표현하였다. 바울과 원사도들 간에는 아무런 불일치가 없었다. 야고보의 제안으로 그 회의는 일치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여러 시간의 교리적 토론은 하나님의 은혜로 마침내 일치된 좋은 결론을 가져왔다. 그들이 특히 일치 가결이라는 말(호모뒤마돈)을 쓴 것은 교회들의 하나됨을 보여주는 기쁜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교리적 토론은 마침내 사도 시대 교회들의 사상적 일치를 드러내었다. 얼마 동안의 혼란과 심적 고통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다.

사도들과 장로들과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였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라고 쓸 수 있었다. 이로써, 이방인들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와 구약 율법과의 관계에 관해, 바른 깨달음과 생각이 정리되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구원의 근본 교리들에 있어서 명료하다. 성경에 불명료한 어떤 교리적 주제들이 있을 수 있지만, 구원의 근본 교리들, 즉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代贖) 진리 등은 분명하여서 바른 생각과 그릇된 생각이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의 어떤 지엽적 교리들에 대해 다른 견해들을 용납한다 할지라도, 근본 교리들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는 근본적 교리들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명백히 이단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를 통해 주신 교리적 결론들을 존중해야 한다.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초대교회가 이방인의 구원의 은혜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던 것과 같이, 역사상 교회는 여러 차례의 세계적 회의들을 통해 기독교 교리들에 대해 공적인 진술들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러한 신앙고백들의 내용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초대교회의 니케야 회의와 칼케돈 회의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성(二性) 일인격(一人格)의 고백과, 17세기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도르트 회의의 신앙고백들을 귀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당면한 잘못된 교리적, 윤리적 사상들과 풍조들에 대해 주장과 토론을 통해 성경에 계시되고 역사적으로 검증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확신하며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삶을 굳게 붙들고 교회의 거룩함과 하나 됨을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교리적, 윤리적 토론은 그 무엇보다 귀한 일이다.

30-41, 말씀으로 교회를 돌아봄

[30-32]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바울과 바나바와 및 예루살렘 교회의 보냄을 받은 형제들은 수리아 안디옥에 내려가 예루살렘 교회가 회의의 결론을 담아 보낸 그 편지를 전달하였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그 편지를 읽고 그 권면과 위로와 격려의 말을 인해 기뻐했다.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와 실라는 선지자들이었다. 그들은 여러 말로 안디옥 교회 교인들을 권면했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였다.

[33-35]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사도들](전통본문)에게로 돌아가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多數)한[여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예루살렘에서 보낸 형제들은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받고 사도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유하며 여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였다. ‘여러 다른 사람들이라는 말은 안디옥 교회에 말씀의 사역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보인다. 교회에 말씀의 일꾼들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다. 교회에 주일학교 교사나 권찰 후보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복된 일이다. 모든 교인들이 성경말씀의 지식에 정통하여 서로를 권면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11:29).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교회들 안에 풍성한 은혜를 주셔서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기를 원한다.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그것은 심방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말이다. 믿는 자들은 서로 권면하고 격려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히브리서 3:13,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오늘날도 교인들에게, 특히 문제를 가진 자들에게 심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주일학교 교사의 사역이나 구역 권찰의 사역은 매우 필요하고 귀한 사역이다.

[37-41]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심방 동반자 문제로 다투었다. 바나바는 온건한 생각을 가졌다. 그는 전에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서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13:13) 마가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강하였다. 그는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않은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심히 다투었으며 그 결과 그들은 피차 갈라서서 각자 자기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 둘의 신앙 사상이 다른 것은 아니었으나, 일하는 방식에 대하여 생각이 달랐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갔다. 그 후의 행적을 우리는 잘 모른다.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히 다투고 나누인 것은 말씀 사역자들의 연약을 보이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동역(同役)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아모스 3:3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말한다. 주의 일을 함께할 자들은 생각과 뜻이 같아야 한다. 또 말씀의 사역자들은 주를 사랑하고 주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칠 각오가 되어야 하며 심령이 단련된 자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주의 뜻을 함께 받들 수 있고 하나님의 일과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일꾼들을 부르시고 사상의 일치와 온전한 헌신과 심령의 굳셈으로 훈련시켜 사용하시며 영광 받으실 것이다.

이제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미 믿는 자들을 심방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심방의 유익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말씀 사역자는 전도든 심방이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일해야 한다. 그때 그의 사역은 교회를 견고케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오늘날도 교회에는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는 일이 필요하다. 전도가 중요하지만, 심방도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서로 돌아보고 권면하고 격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신실한 말씀 사역자들, 주일학교 교사들, 구역 권찰들이 부족하지 않고 많이 있기를 기도하자. 또 우리 자신이 다 성경말씀에 정통하고 믿음과 인격이 온전하여 말씀의 봉사자 되기를 소원하자.

둘째로, 말씀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영혼을 구원하고 또 영혼을 권면하고 세우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서로 권면하고 격려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 성도들의 믿음은 굳세어지고 하나님의 교회는 견고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주의 일을 함께 하기 위해 뜻을 같이해야 한다. 말씀의 사역자들도 사람이므로 때때로 생각의 부족함 때문에 다투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주의 일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뜻을 같이해야 한다. 두 사람이 생각과 뜻이 같지 못하면 동행할 수 없다. 우리는 이 혼탁한 말세지말의 교계의 상황 속에서도 생각과 뜻을 같이하며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주의 일에 충성하는 자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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