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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장 설교말씀] 형제 사랑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요일 3:1-24)

복음의 능력 2022. 6. 20.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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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장에서는 하나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지 말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원죄가 사라졌기 때문에 자 범죄를 지으면서 살면 안 됩니다. 자 범죄를 지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형제 사랑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요일 3:1-24)

 

1-6, 죄를 짓지 말라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 . . .

요한은 말한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전에 죄인이요 사망 아래 있던 사람이었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하심으로써 구원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이것은 큰 복이며 큰 특권이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의 이 복과 이 특권을 알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얻은 의도, 영생도, 하나님의 자녀 됨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복, 곧 성도들이 받아 누리고 있는 구원의 복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 . .

요한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하나님의 자녀들의 장래 영광의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주께서 나타내심이 될 때 즉 그가 다시 오실 때 나타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와 같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영광의 모습을 보듯이, 우리도 그와 같을 것이다.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 . . .

요한은 말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성도들은 주의 재림과 그때 이루어질 영광스런 몸의 구속(救贖)과 변화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로마서 8:23-25,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사도 요한은 성도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고 말한다. 직설법이 더 무게가 있다. 그것은 자신을 깨끗게 하지 않는 자는 이런 소망이 없는 자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들이라면 죄를 짓지 말고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천국을 소망하는 자는 천국 백성답게 살고, 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의인답게 죄와 상관없이 산다.

[4-5]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 . .

요한은 또 말한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는 불법, 곧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반대하고 거부하고 어기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이었다. 성육신(成肉身)하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함이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자기 죄 때문에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해 오셔서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진대, 우리는 더 이상 범죄치 말아야 한다.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 . . .

사도 요한은 또 말한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하마르타네이)[계속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하마르타논)[계속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주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범죄치 않아야 한다. 원문에 범죄한다는 말은 다 현재시제이다. 그것은 계속적 행위를 의미한다. 구원받은 자는 계속 범죄하고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만일 누가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일 것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법적이고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적이다. 구원받은 자는 실제로 행동과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1절부터 6절까지는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장차 영광스런 주의 형상을 본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 재림 때 일어날 영광스런 부활을 소망할진대 우리는 모든 죄와 불결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이 바로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는 우리의 더러운 죄 때문에 십자가의 참혹한 고난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깨끗게 하는 대속(代贖)의 죽음이셨다. 우리가 주를 믿고 구원을 받아 주 안에 거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죄 가운데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마땅히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의와 거룩을 행해야 한다.

7-12,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7-8]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는 누구에게든지 미혹받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팎에는 성도를 속이고 잘못 인도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잘못된 교훈을 하고 잘못된 행동의 본을 보인다. 그들은 죄를 짓는 자들이며 죄 짓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다. 그러나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지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

죄를 짓는 자가 마귀에게 속한다는 원어(에크 투 디아볼루 에스틴)마귀에게서 난 자이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죄를 짓는 자의 근원을 나타낸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자요 인간을 범죄케 한 자이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가 인간을 속여 범죄케 함으로 죽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살인인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서 난 자이며 마귀에게 속한 자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성육신(成肉身)을 가리킨다. 태초부터 계셨던 아들, 신성을 가지셨던 그가 육신으로 즉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창세기 3:15, “내가 너[=마귀]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 . . .

요한은 또 말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말씀은 중생(重生) 곧 거듭남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며(3:3, 5) 그 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곧 그를 믿는 것이다(1:12-13).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곧 중생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원어(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 현재시제)는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가진다. 계속 죄를 짓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중생한 자도 간혹 아니 자주 실수하고 범죄한다. 그러나 그는 계속 죄를 짓고 있지는 않다. 그는 죄 가운데 거하지는 않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본 서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중생한 성도는 죄 안 짓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한 자라도 간혹 혹은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은 경험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어린 고백을 하였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하였다(7:21-25). 중생한 자 속에는 이런 갈등이 있지만, 그는 계속 죄를 짓는 자가 될 수는 없다.

사도 요한은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이유를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고 했다. ‘하나님의 씨는 새 생명의 원리를 가리킨다. 중생할 때 심기는 이 생명의 원리는 범죄할 수 없는 원리요 의만을 지향하는 원리이다. 중생한 영혼 속에는 이 생명의 원리가 심기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중생한 영혼은 그 지배적 성향에 거룩한 변화를 얻었다. 전에는 무지와 부도덕이 그를 지배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과 도덕성이 그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도 간혹 혹은 자주 넘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법적으로 완전히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 또 실제적으로도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러므로라는 원어(엔 투토)이 점에서라는 뜻이다. ‘이 점이란 성도가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 하는 점을 가리킨다. 계속적으로 죄 가운데 사느냐 아니면 즉시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려고 결심하고 노력하느냐 하는 이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드러난다. 사도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누구든지 의를 행치 않거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강조하는 바는 중생한 성도가 실제로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근원과 그의 소속을 증거한다.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에, 성도는 모름지기 죄 안 짓는 생활을 힘써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죄를 짓는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것이 합당한 일이 되겠는가?

[11-12]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사도 요한은 옛날 가인의 예를 들면서 우리가 가인같이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는 악을 행치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잘 증거하는 표가 된다. 의인과 악인은 그 행위로 드러난다. 우리는 의인이 되어야지 결코 악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7절부터 12절까지는 앞의 부분에 이어서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할 이유를 증거한다. 앞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이며 장차 영광스런 모습을 입을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죄의 대속 혹은 죄의 없이함을 받았기 때문에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본문에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더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났고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은 다른 말로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계속 범죄치 않는다. 그는 혹 넘어질 수 있으나 곧 일어나 회개하고 죄를 버린다. 그는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분명하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마음과 입술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그의 행위로 증거되는 차이점이다.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한마디로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한 자는 계속 죄를 지을 수 없다. 우리가 구원받았고 중생한 자일진대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하고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3-18, 사랑은 생명에 들어온 표임

[13-15]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 . . .

요한은 또 말한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도 요한은 세상이 신자들을 미워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미움은 사망의 표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들을 미워하고 또 때때로 서로를 미워한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이다. 미움은 사망의 표요 세상의 표이다. 그러므로 만일 구원받은 우리가 서로 미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자들일 것이며,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얻은 자들이 아니고 사망에 거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은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사랑은 생명의 표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말한다. 형제 사랑은 영생의 구원을 얻은 표이다. 그러나 형제 사랑이 없는 자는 아직도 사망에 거하는 자일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한다. 물론 살인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빈번히 보듯이, 자살 폭탄 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는 극악한 살인 행위이다. 혁명이나 폭력 시위가 정당화 될 수 없듯이, 테러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사회의 개량과 개선은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비폭력적 시위는 정당한 의사 표현 방식이며 사회 개선을 위해 유익하지만, 무질서한 폭력적 방법은 사회의 개량보다는 악화를 가져오기 쉽다. 또 정당한 이유 없이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전쟁도 역시 극악한 살인 행위이며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테러와 부당한 침략에 대한 연합적 응징과 보복은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보다 더 큰 현대적 살인 행위는 낙태 혹은 인공유산이다. 그것은 태아 살해의 행위이다. 사람의 생명은 임신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분명하다. 시작된 생명을 살해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임신된 생명은 반드시 출산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이나 세계에서 낙태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은 1, 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다고 한다. 낙태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현대적 죄악이다.

물론 이런 행위들이 다 살인에 해당하지만, 이런 것들뿐 아니라 가정이나 교회에서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것도 똑같이 살인에 해당한다. 또 모든 살인한 자는 영생을 소유한 자가 아닐 것이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워한 죄가 있으면 그것을 다 회개하고 버리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 . . .

요한은 또 말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 사랑의 목표는 무엇일까? 사도 요한은 주님의 본을 따라 형제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즉 참된 사랑은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15:13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확증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가장 큰 사랑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17-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 . . .

요한은 또 말한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돕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라면 우리는 참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목숨까지 형제를 위해 버리기를 원한다면 재물로 궁핍한 형제를 구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목숨은 물질보다 더 귀중하다. 그러므로 희생적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한 우리라면 우리는 물질로 구제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3절부터 18절까지도 형제를 사랑할 것을 교훈한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요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우리는 이로써 우리 자신이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 수 있다. 사랑의 목표는 우리의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요, 그 실천 방법은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돕는 것이다. 구제가 없으면 사랑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구제를 통하여 형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증거해야 한다.

19-24, 순종과 담대함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 . . .

요한은 말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이로써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대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라는 뜻이다.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게 된다고 증거한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도 진리에 대하여 자주 말했다. 진리를 행함에 대하여(1:6), 진리가 우리 속에 있음에 대하여(1:8; 2:4), 진리를 앎에 대하여(2:21) 말하였다.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 그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했다(1:13).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자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형제 사랑은 진리에 속한 증거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자, 사망 아래 있는 자, 사탄에게 속한 자의 표이지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구원받은 무리인 교회에 속한 자,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자, 하나님께 속한 자의 표이다.

요한은 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할 것이라고 증거한다. ‘굳세게 하다는 원어(페이도)확신케 하다, 평안케 하다는 뜻이다(BDAG).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또 우리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확신케 하고 그 진리와 그 구원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람은 죄를 지을 때 두려움을 가진다.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한 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에 숨었었다(3:10).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48:22; 57:21).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행하면 우리는 두려움 대신에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20-22]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 . . .

요한은 또 말한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보냐 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는 이유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으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을 수 없지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러나 우리는 범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담력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때 실제적으로 더욱 담력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했다(28:1).

요한은 순종의 또 하나의 결과로서 기도의 응답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7:7-8). 그러나 그는 기도의 응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셨다(7:12). 이것은, 우리가 기도와 간구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원하고 기대한다면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의 계명을 순종할 때 그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뜻을 거슬러 범죄하면서 그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 . . .

요한은 또 말한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계명을 두 마디로 요약한다. 첫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요, 둘째는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선언하신 가장 긴급하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엇보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자들에게 주시는 중요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 . . .

요한은 또 말한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주님과의 영적 연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가서는 신랑과 신부의 연합과 일체를 신랑이 신부에게 속하고 신부가 신랑에게 속한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아가 2: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이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영적 연합을 나타낸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 영적 연합을 포도나무의 비유로 강조하셨다.

요한복음 15:1-5,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중생할 때 주님과 영적으로 한 몸이 된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켰었다. 그러나 죄인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을 때 즉 그의 죽었던 영이 다시 살리심을 받을 때 곧 중생할 때, 그는 주님과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고 주 안에 거하게 된다.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며(8:9; 4:6) 그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주께서 우리 속에 계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되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더욱 확인되고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실제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확인되고 확증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우리의 행위, 즉 의와 선을 행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는 우리가 받은 그 구원을 확증하는 것이다.

19절부터 24절까지는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을 밝히 증거한다. 그것은 첫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요, 둘째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본 서신에서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며 형제를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정말 중생했고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의와 선을 행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본문은 우리가 주의 계명에 순종하여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몇 가지 복된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을 증거한다. 첫째로, 그때 우리는 주 안에 거하는 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둘째로, 그때 우리는 마음에 담대함과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셋째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한 바의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단지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더 이상 범죄치 않고 의를 행하며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순종의 삶을 통해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고 기도 응답을 체험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20장 성경 좋은 말씀] 천년왕국과 대심판(계 20:1-15)

 

[요한계시록 20장 성경 좋은 말씀] 천년왕국과 대심판(계 20:1-15)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천년 왕국과 백보좌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천년 왕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왕 노릇 하게 됩니다. 천년이 지난 후에 사탄이 무저갱에서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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