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를 보시고 영혼을 낚는 어부로 사용하기 위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 요한을 제자로 불러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제자로 선택(마 4:18-22)
18절 페리파톤 데 호 이에수스 파라 텐 달랏산 테스 갈릴라이아스 에이덴 뒤오 아델푸스 시모나 톤 레고메논 페트론 카이 안드레안 톤 아델폰 아우투 발론타스 암피블레스트론 에이스 텐 달랏산 에산 가르 할리에이스
성 경: [마4:18]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갈릴리 해변 - 구약 성경에서는 '수금'이란 뜻의 '긴네렛' 바다(민 34:11;수 13:27)로 불리웠는데(수 12:3에는 '긴네롯 바다') 그것은 아마 이 호수의 모양이 수금(竪琴)과 비슷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성읍(신 3:17;수 11:2;19:35;왕상 15:20)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 '게네사렛 호수'(참조, 14:34;막 6:53;눅 5:1)로 불리웠으며, 신약 시대에는 '갈릴리 바다' 또는 헤롯이 남서쪽 해안에 건설한 도시 이름(요 6:1;21:1)을 따라 '디베랴 바다'로 불리웠다. 히브리어에서의 '바다'(얌)라는 말과 헬라어에서의 '바다'(달라싸)가 독일어(See)와 같이 '호수'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곳은 다른 바다보다 염분 정도가 5배(25%)가 되는 남쪽의 사해와는 달리 담수호로서 남북이 14마일(20km), 동서가 가장 폭이 넓은 곳이 9마일(12km)이며 해수면보다 보통 212m나 낮아 헤르몬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태풍이 풍랑을 자주 일으킨다(마 8:24;14:24;막 4:37;6:48;눅 8:23;요 6:18). 또한 이곳은 어족(魚族)이 풍부하여 어업이 번창하였고 그 해안에는 예수의 전도활동이 주요한 배경이 된 성읍들(마 4:13;11:20;요 6:23)이 위치해 있었다.
베드로라 하는 시몬 - '베드로'라는 헬라어 이름은 '반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님의 역사적 예견의 방법에 의해서 주어진 이름이다(10:2;16:18;막 3:16;눅 6:14). 이에 대한 아람어 동의어인 게바(반석)가 당시에 이미 널리 사용되던 이름이지만(Best, Wilson) 예수께서 시몬에게 붙여 주심으로 그의 신분과 미래의 가능성을 통찰하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케 한다. 시몬은 히브리어 이름으로 '들음'을 의미하며 베드로의 본명(本名)이다.
안드레 - 이 이름은 순수한 헬라 이름으로서 '남자다움'을 뜻한다. 그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요 1:40) 예수께서 메시아이신 것을 확신하고 자기 형제인 베드로를 그리스도께 인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최초의 선교사란 칭호를 받았다. 또한 그는 이웃을 돕는데 신속하게(요 6:8, 9;12:21, 22) 그리고 은밀하게 선(善)을 행하는 숨은 일꾼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후에 그는 아가야(Achaia)에서 X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물 던지는 것 - '그물'(암피블레스트론)이란 용어는 신약성경에는 단 한 번 밖에 안 나오는 단어로서 둥근 모양의 투망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물'의 보다 포괄적인 용어 '따튀아'('그물들', 4:20)와 '사게네' ('그물', 13:47) 등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본문에 제시된 '그물을 던지는 것'이란 '그물을 어깨 위로 돌리며 던진다'는 의미로 동작이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용어로 보는 것이 좋다. 이는 결국 주님께서는 그들이 생업에 바쁘게 전념하고 있을 때 제자로 택하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한편 본 기사는 눅 5:1-11의 내용과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즉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는 것을 보신 것으로 묘사한(눅 5:2) 반면에 본절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18절)과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다(21절). 이 같은 차이점이 두 기사가 각기 다른 전승(傳承)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차이점은 (1) 공관 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엄격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한 사건이 드러내고 있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그 사건을 시간적 순서를 무시하고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2) 또한 저자의 독특한 관점 내지는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동일 사건을 묘사하는데 세부 내용상 차이점이 생기는 것이다. 마태는 누가와 동일한 사건을 다루되 동일한 방법으로 기록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본문의 '다니시다가'라는 말에서 한층 명백해진다. 독자들은 본 사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현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면서 골방에나 기도원에 앉아만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일할 것을 찾아 적극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위대한 소명을 맡기실 것이다.
19절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류테 오피소 무 카이 포이에소 휘마스 할리에이스 안드로폰
성 경: [마4:19]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나를 따라 오너라 - 예수의 신적 권위에 입각한 절대적이며 강권적인 명령이다. 그런데 여기서 명령의 효력을 갖는 '따라 오너라'(듀테)라는 표현은(10:38;눅 9:23;14:27) 예수의 사역 수행 기간 동안 육체적으로 '좇아 다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단순히 예수의 육체를 장소적 의미에서 좇으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그들이 처한 삶의 방법과 목적과 관심을 모두 청산(淸算)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하여 전환할 뿐만 아니라 그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라는 희생적 의미이다(10:38, 39).
사람을 낚는 어부 -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과 사명을 진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직업과 새로운 사명을 연결시켜 그들에게 주어질 직무가 사망의 땅과 그늘(16절)에 영원히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성령과 복음이라는 그물을 가지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 구절은 렘 16:16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포로로 삼기 위해 어부를 보냈듯이 이제 예수는 포로 시대가 끝나고 메시아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어부를 보내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영광스러운 직책에 대해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전(以前) 직업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렇듯 주변 환경과 밀접한 일상사를 문학적인 표현(비유)을 사용하여 하늘에 속한 신령한 진리를 교훈하시고 나타내실 때가 많다.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진실로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추종해야만 했다. 여기서 '사람'(안드로포이)이란 복수 용어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모든 인류를 말한다. 아무튼 이 명령은 28:18-20의 대선교 명령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모름지기 이웃의 영혼을 돌아보는 데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절 호이 데 유데오스 아펜테스 타 디크튀나 에콜루데산 아우토
성 경: [마4:20]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곧 -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적어도 제자로 부름 받는 두 사람이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요 1:35-51) 크나큰 영적 감화력(感化力)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을 받는 순간 그들이 내.외적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버려 두고(아펜테스) - 이 용어는 '멀리 내던지다', '포기하다'는 뜻으로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세상적인 욕망을 버린 제자들의 철저한 자세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이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떠났다거나, 그들의 생업을 영원히 버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를 따른 것이었고, 전에 이미 알고 있던(요 1:35이하) 제자로서의 소명을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즉 이때부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제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자신들의 생업을 버려야 한다는 해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하지만 그것은 단지 모든 것을 미워하고(눅 14:26), 그것들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10:37)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 된 자들은 마땅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기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6:33).
21절 카이 프로바스 에케이덴 에이덴 알루스 뒤오 아델푸스 이아코본 톤 투 제베다이우 카이 이오안넨 톤 아델폰 아우투 엔 토 플로이오 메타 제베다이우 투 파트로스 아우톤 카타르티존타스 타 디크튀나 아우톤 카이 에칼레센 아우투스
성 경: [마4:21]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세베대 - '여호와의 주심'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이자, 예수의 이모인 살로메의 남편(27:56;막 15:40;16:1)이다. 그의 집에서는 삯꾼을 부리고 있었으며(막 1:19,20), 예루살렘에도 그의 가옥을 가지고 있었던(요 19:27) 점으로 보아 사회적으로 상당히 유력한 가문 출신인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선교 활동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아들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음으로 주의 사역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야고보 - 이스라엘의 조상의 이름과 같은 '발꿈치를 잡았다'란 뜻이다(창 25:26). 야고보와 그의 동생(17:1;막 3:17)은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들로서 예수와 사촌 형제간(요 19:25)이 된다. 그는 요한과 함께 예수께서 가장 신뢰하던 제자 중 한 사람이다(17:1;막 5:37;9:2;13:3;눅 8:51;9:28). 후에 그는 해롯 아그립바에 의해 피살되어 사도 중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행 12:2).
요한 - 이 헬라명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란 뜻을 가진다. 그는 예수의 최초의 제자가 되었고(요 1:35-37),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눅 22:8;요 13:23;19:26, 27), 장수하면서 성경의 마지막 계시를 기록한 자(계 1:1)이다. 또한 그의 성격은 내성적(요 20:1-10)이면서도 과격한 성격을 가져(눅 9:49,54) 주님으로부터 '우뢰의 아들'이란 뜻의 '보아너게'란 별명(막 3:17)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만큼 남자 제자로서는 유일하게 주님의 십자가 최후를 지켜보았으며(요 19:26), 전설에 의하면 그는 예수의 당부에 따라 마리아를 예루살렘에 있던 자기 집에 모셔다가 그녀가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극진히 봉양했다 한다(Irenaeus, Polycrates, Clement).
배(프로이온) - 모든 배에 대한 일반적 용어로써 여기서는 서너 명이 함께 타고 조업할 수 있을 만큼의 배였던 것 같다(막 1:20).
그물 깁는 것 - 야고보 형제는 그물을 깁고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다. '깁고'(카타르티조)라는 동사는 '준비하다', '수선하다' 또는 '원상태로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눅 5:1-11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은 후에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된다. 어부에게 있어서 '그물을 깁는 일'은 '고기를 잡는 일'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한편 이 같은 상황을 영적으로 이해한다면 후자는 일선에서의 '복음 전파 활'을, 전자는 배후에서의 '도움'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부르시니 - 여타의 말씀을 생략하신 채 단지 예수께서 영적 주도권을 가지고 그들을 부르셨다. 여기서는 부름에 따른 어떤 특별한 의미가 담겼다기보다는 22절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의 즉각적 순종에 그 초점이 맞춰진 묘사이다.
22절 호이 데 유데오스 아펜테스 토 플로이온 카이 톤 파테라 아우톤 에콜루데산 아우토
성 경: [마4:22]
주제1: [시험 승리와 공생애의 개시]
주제2: [네 제자를 부르심]
저희가 곧...버려두고...좇으니라 - 베드로나 안드레처럼(20절) 야고보 형제는 지체 없는 순종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의 '버려두고'란 말도 그들이 혈연관계를 포기하거나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부로서의 직업에 충실하였지만 이후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명령만 좇아 제자로서의 소명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부친의 권한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삯꾼들을 부릴 정도로 부유했던 가정과(막 1:20) 인정 많은 가족들을 '버림'으로써 그리스도를 '얻은' 바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제자 됨의 필수 요건이다.
[사사기 5장 주일 설교 말씀]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삿 5:1-31)
'신약 설교 알쓸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강림주일 성경 좋은 말씀]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히 8:1~13) (0) | 2022.01.05 |
---|---|
[빌립보서 3장 성경 좋은 말씀] 신앙의 기쁨의 이유(빌 3:1-21) (0) | 2022.01.04 |
[송구영신 예배 주일설교말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갈라디아서 3장 23-29절) (0) | 2021.12.31 |
[성탄절 예배 설교말씀] 동방에서 베들레헴까지(마태복음 2:1-12) (0) | 2021.12.24 |
[에베소서 3장 복음 설교말씀] 복음의 비밀이 있는 교회의 세계성(엡 3:1-21) (0) | 2021.12.18 |
[요한복음 8장 예수님의 말씀] 죄에서 자유롭게 하심(요 8:1-59) (0) | 2021.12.12 |
[누가복음 8장 예수님의 말씀]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자를 치유(눅 8:1-56) (0) | 2021.12.12 |
[마태복음 예수님의 말씀] 예수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마 20:1-34) (0) | 2021.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