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히브리서 11장 강해 설교말씀] 믿음의 선조들(히 11:1-40)

복음의 능력 2022. 6. 25.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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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믿음의 선조들에 대해서 나열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조들(히 11:1-40)

 

본장은 믿음의 장으로 인류 역사 초기로부터 또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믿음의 선조들의 예를 들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한다.

1-7, 믿음의 선조들 아벨, 에녹, 노아

[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 . . .

본문은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얻었음이라].” 본문은 믿음의 성격을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을 믿는 것인데, 그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것이 현재 우리의 믿음을 통해 우리 속에 있다. 우리는 바라는 것들을 믿지만, 장차 우리의 믿음대로 그것들이 실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은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믿음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나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보지 못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이 믿음을 통해 사실과 같이 증거되는 것이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까닭은 선진들이 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본장에 언급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의 인물들을 가리킨다.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 . . .

본문은 말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은 인간 중에 아무도 본 자가 없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에 맨 마지막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순전히 믿음에 의존한다.

천지창조에 대한 믿음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계시해 주셨고 그 진리를 성경 맨 처음에 두셨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증거한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천지창조를 믿지 않는 자는 성경의 다른 진리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천지창조의 사실을 믿는다.

천지창조를 믿는 것은 물질세계가 영원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들은 나타난 것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보이는 물질세계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가 실상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오늘날 그런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이 사람의 몸을 지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나 힘이 기계들을 움직인다. 우리는 물질만 중시하지 말고 영의 존재를 인식하고 또 창조주와 섭리자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으나,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4).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 그럼으로써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 아벨의 제사의 나은 점은 정성(‘첫 새끼’)과 속죄 신앙이었다고 본다. 특히 그는 메시아의 속죄의 죽음을 미리 바라보는 믿음을 가졌다고 보인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장차 메시아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것과 사탄이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을 예언하셨다(3:15). 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에 에덴 동산에서 짐승을 죽이셨고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이신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본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죄의 값은 죽음이라는 진리의 교훈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통해 장차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가리어질 것을 암시하셨다.

아벨은 그 사건을 듣고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했던 것 같다. 그것은 짐승 제사에 대한 최초의 계시이었다. 짐승 제사는 이와 같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을 암시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었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들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나 이런 제사를 통해 의인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이것이 속죄 신앙이며 아벨에게 있었던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이었다고 본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는 말씀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섬길 때 정성과 속죄 신앙이 요구된다는 것을 보인다.

[5-6]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 . . .

본문은 말한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 에녹은 가정을 가지고 자녀들을 낳는 복잡한 세상 현실 속에서 300년이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생활하였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살았다는 뜻이다. 즉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역사상 경건한 신앙의 선조들이 다 그러하였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다. 그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옮기웠다는 뜻이 분명하다. 에녹의 옮기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예표이었고 천국의 실재성에 대한 생생한 증거이었다. 에녹은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고 그래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진 것이었다.

본문은 또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할 것임이니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늘로 옮기워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속에 믿음이 있었다. 에녹의 믿음은 두 가지로 증거되어 있다. 첫째로, 에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기본적으로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요 그런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둘째로, 에녹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새 세계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상이다. 즉 에녹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은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믿음이다(1). 에녹은 이런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옮기워진 것이다. 이와 같이,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상급인 천국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었다.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 . . .

본문은 말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6장 이하에 나온다. 창세기 6:9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에녹과 비슷하게, 노아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았고 흠이 없는 신앙인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죄악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남겨져 있었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믿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홍수를 땅에 일으켜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죽일 것이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믿었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의 평소의 믿음의 결과이었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준비하여 마침내 그의 모든 가족들을 다 구원하였다. 이와 같이, 노아의 믿음은 보지 못하는 일들 즉 장차 임할 심판과 그 심판 중에서 얻을 구원을 믿은 것이다. 노아의 믿음은 심판과 구원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었다.

노아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였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구원을 받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방주 짓는 일을 비웃다가 마침내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 노아의 방주는 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얻은 의와 같았다. 이로써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 모든 믿는 성도들은 그의 뒤를 따를 것이다.

1절부터 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우리는 바라는 것들을 믿다가 소유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믿다가 본다. 우리는 눈으로 뵈올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지금 볼 수 없는 천국과 부활과 영생을 믿자.

아벨은 눈으로 뵈올 수 없는 하나님을 믿고 정성껏 섬기며 또 짐승제사의 속죄적 의미를 깨닫고 속죄 신앙을 가졌다고 보인다.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이 예표적으로 이해했던 속죄의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이해한다. 속죄 신앙이 복음 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다.

에녹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상급인 천국을 믿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그와 동행하는 경건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고, 세상의 물질적 복보다 하나님의 상급인 천국과 영생을 더 가치 있게 여기며 살았다. 우리도 그렇게 살자.

노아는 장차 있을 홍수 심판의 경고와 구원의 방주에 대한 말씀을 믿었다. 그는 인내하며 방주를 만들었고 구원을 받았다. 우리도 마지막 불 심판의 경고를 믿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주의 의롭고 선한 말씀대로 순종하며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8-12, 아브라함과 사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 . . .

본문은 말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었다(12: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고자 했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이것이 믿음의 순종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마 큰 목적지는 지시하셨으나 구체적 여정을 알려주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은 순전히 믿음의 걸음이었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이와 비슷하게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단순하게 즉시 주를 따랐다(4:18-22). 천국을 향한 우리의 걸음도 동일하다. 우리의 목적지는 천국이지만 지금 천국 길의 구체적 여정은 분명치 않다. 우리는 그 과정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9-10]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는 하나님께서 설계자요(BDAG) 건축자인, 기초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우거(寓居)하였다. 그 땅은 그에게 아직 낯선 땅이었다. 그러나 그는 믿고 거기에 우거하였다. 그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이 땅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다!’

아브라함의 거처는 이동하기 쉬운 장막이었다. 그는 같은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기에서 아직 영구적인 집을 건축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장차 그의 약속대로 한 도시를 만들어주실 것을 내다보았다. 그 도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시공하시는 도시일 것이다. 그 도시는 참으로 완전한 도시일 것이다. 하나님은 얼마나 지혜롭고 실력 있는 설계자이시며 얼마나 뛰어나고 완벽한 시공 기술자이신가! 하나님의 지혜와 실력과 기술력을 누구와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

구원받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도 아브라함의 삶과 비슷하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그네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다. 천국은 아직 미래의 일이다. 장막을 펼치고 접듯이, 우리의 세상 생활은 때때로 이사하고 이동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듯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우리는 조만간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시공하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 날에는 더 이상 이동이 없는 영원한 집을 얻을 것이다.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전통사본에는 생략됨)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얻었으며 나이가 지났으나 출산하였으니](전통사본)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늙었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었다. 사라는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전하는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18:12). 그러나 사라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은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사라도 늙고 아브라함도 늙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셨다.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틀림없이 성취된다.

8절부터 12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였다. 그는 아직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땅에서 나그네처럼 장막 생활을 하며 우거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친히 만드실 한 성을 기대하며 바라보며 기다렸다. 사라도 인간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 곧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아들을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그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의 말씀들을 그대로 다 믿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을 그대로 다 믿자! 우리의 삶의 목표를 이 땅에 두지 말고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같이 살면서 우리의 삶의 목표를 저 세상, 장차 오는 천국에 두고 믿음과 순종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자.

13-16,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함

[13-1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사라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순종을 했고 그들은 다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우거하며 장막들에 거하였고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안에서 죽었다. 사람은 다 죽는다. 단지, 어떻게 살다가 죽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살다가 죽으면 소망이 있다(14:32). 그러나 믿지 않는 악인의 죽음은 곧 절망이요 멸망이다.

저 믿음의 사람들은 그 자손들을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케 하시겠다는 약속,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 그들의 자손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얻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된 내용들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들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들은 그것들 곧 그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4백년 내지 5백년 후에 그들에게 실제로 주어질 것이다. 그들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만민이 복 즉 구원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2천년 이상이 지난 후의 일일 것이다. 또 하나님의 예비하신 천국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랜 훗날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기쁘게 믿고 소망하였다. 또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하며 고백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세상은 나그넷길이며 우리의 참 고향은 천국이다.

[15-16]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그들이 나왔던 이 세상의 고향 즉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다. 만일 그 고향이었다면, 그들은 그 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찾았던 곳은 그 고향이 아니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 ‘더 나은, 더 좋은이라는 말이 신약성경 전체에서 19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13번이 히브리서에 나온다. 복음은 더 좋은 소망’(7:19)이며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7:22)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8:6)이시다. 우리의 속죄는 더 좋은 제물’(9:23)로 이루어졌고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복음을 위해 고난도 받고 그들의 재산도 빼앗겼던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10:34)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 즉 천국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이다.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10:34)이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하나님이 건축자요 만드신 이인, 터가 있는 성’(11:10)이며, ‘장차 올 영구한 도성’(13:14)이다.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고 이 땅의 것을 바라지 않고 장차 올 것을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 그 성이 바로 주 예수께서 가서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처소이며(14:2) 요한계시록 21장에 예언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성을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성이었다(21:2, 11). 또 그는 하늘에서 나는 한 음성을 들었는데, 그것은 눈물이나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거기에 다시 없을 것이라는 음성이었다(21:4).

13절부터 16절까지는 아브라함 등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고 비록 그것들을 그들 생애 가운데서 경험하지 못했을지라도 그것들을 바라며 하늘에 예비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음을 증거한다.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굳게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복락을 약속하셨다. 우리는 저 믿음의 선진들처럼 그것들을 굳게 믿고 믿음 안에서 살ㄷ가 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헛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이루실 정하신 때가 있는 것뿐이다.

둘째로, 우리는 저 믿음의 사람들처럼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천국 약속을 믿는 성도들의 바른 모습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되고 언젠가는 떠나야 할 나그네의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들에 바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약속하신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시고 예비하신, 영원히 요동치 않을 성이다. 천국은 우리의 더 나은 본향이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아 구원얻고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자들은 다 그 곳에 들어갈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적이다. 우리가 그 곳에 들어갈 때, 인류의 비극적 역사는 끝나고 기쁨과 평화의 새 역사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도 저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가자!

17-22,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

[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 . . .

본문은 말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명령을 받은 때에도 한번 더 드러났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대로 이삭을 아들로 주신 후 어느 날 그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순종을 하였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敬畏)하였고 그 경외의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것은 심지어 사랑하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하였다. 그는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다.

오늘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늘의 별 같게하리라고 말씀하셨었고(13:16; 15:5), 또 이삭을 주신 후에 이삭에게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21:12). 그런 이삭을 하나님은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보인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은 그는 부활의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 그 사건에서 이삭은 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한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준비하셨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과 같았다. 이것은 죽은 이삭이 다시 산 자가 된 것과 같았다.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도 믿음 있는 선조이었다. 이삭은 부친 아브라함이 자기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대항하지 않고 잠잠히 순종했던 것 같고(22),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우물들을 여러 번 빼앗을 때에도 싸우지 않고 피하는 온유한 모습을 보였다(26). 이삭의 믿음은 특히 그가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한 말에서 나타난다. 그는 아들 야곱에게 유언적 축복을 하면서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라고 말했는데(27:29),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을 그가 그대로 믿고 선포한 것이었다. 또 그는 에서에게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다 그가 믿음으로 한 말이었다.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 . . .

본문은 말한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헬라어 70인역 본문)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란에서 20년의 세월을 지나며 많은 단련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인간적, 육신적, 세상적 욕심들과 애착들을 하나씩 제거하셨고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던 아내 라헬을 하란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죽게 하셨고, 몇 년 후에 그의 사랑하는 라헬의 아들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은 줄로 알았으며 또 수 년 후 라헬의 남은 아들 베냐민까지 애굽에 담보물로 감금되었다. 그의 심적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고통의 현실 속에서 세상 줄을 끊고 하나님만 소망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자가 되었고 죽을 때에 침상 끝에서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특별히 그가 자기를 찾아온 요셉을 맞으며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오른손을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두고 왼손을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에 이끌리는 그의 믿음의 행위이었다. 또 그는 후손들이 장차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을 믿음으로 예언하였다.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객지에서의 종살이 중에서도 범죄치 않았다. 특히, 그는 많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터득하였고 그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형들에게 증거하기를,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자가 형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고 했고(45:8), 형들은 그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했다(50:20).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다. 또 그는 임종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증거하며 그때 자기 해골도 그곳으로 옮겨줄 것을 맹세시키며 부탁하였다(50:24-25).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과 경외함으로 순종하였다. 그것은 절대적, 무조건적, 즉각적 순종이었다. 이삭과 야곱과 요셉도 다 하나님의 약속들, 곧 자손이 번성케 되리라는 약속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이나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을 그대로 믿었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유언적 축복의 말에서 드러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것을 소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확실하게 천국과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믿고 소망하자!

23-29, 믿음의 사람 모세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 . . .

본문은 말한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본문은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증거한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낳았을 때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 모든 아이들이 다 아름답겠지만 여기의 이 말은 그들의 첫눈에 어떤 느낌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아이를 석 달 동안이나 숨겼다. 그들은 남자가 나거든 강에 던지라’(1:22)는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비록 그 기간이 석 달에 불과했고 그 후 더 이상 아이를 집에서 숨기며 키울 수 없었지만(2:3), 그들은 그 동안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왕의 명령대로 아이를 죽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믿음은 귀한 믿음이었고 그것이 모세에게 전수되었음이 분명하다.

모세의 부모가 석 달 후에 그를 포기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선을 기쁘게 사용하셨다. 그들이 그 아이를 그대로 키웠다 할지라도 그는 결국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을 것이며 혹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부족했을 듯하다. 하나님께서는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그를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므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애굽의 최고의 궁중 교육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처음 5권을 기록하는데 충분한 언어적, 지식적 훈련도 포함되었다. 부모의 집에서 자랐더라면 그는 그렇게 준비될 수 없었을 것이다.

[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 . . .

본문은 말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왕자급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상당한 권력과 부귀와 영광을 수반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세상적 권세와 부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성경의 증거대로, 그의 모친은 모세의 유모가 되어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되었었다(2:8-9). 모세는 아마 젖을 먹던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통해 자신의 신분에 대해 들었을 것이며 커서도 기회 있는 대로 그러했을 것이다. “너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이다”--어머니는 모세에게 그 사실에 대한 생각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너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천국 백성이다는 생각이 심겨져야 한다.

모세는 이 세상의 즐거움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었다. 육신적 즐거움은 지나가는 즐거움이다. 또 많은 경우 그것은 죄악된 것이다. 그것이 허무한 것임을 알면서도 거기에 의미와 가치를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세는 그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하였다. ‘더 좋아하다는 원어(헬로메노스)선택하다는 의미이다. 세상적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이 모세의 귀한 점이었다. 모세는 단지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고난받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즉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는 표현은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메시아 약속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모세도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었다(12:3; 22:18).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온 세상이 구원의 복을 얻을 것이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의미와 가치가 있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그런 의미와 가치가 있었고 세상에는 어디에도 그런 의미와 가치가 없었다.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렸던 애굽의 모든 보화들은 다 이 세상에 속한 것뿐이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죄악된 것들이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장차 모두 다 불타 없어질 것들이었다. 그러나 메시아의 사역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죄를 대속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세상 영광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오지만, 메시아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평강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만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된 영생과 천국의 상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생과 천국의 상까지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무서워 아니하였으니 이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참았음이며].”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 그것은 익숙하였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난 것이었으며,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 즉 위로부터 주신 새 원리를 따라 새 삶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과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모세는 애굽을 떠날 때 애굽왕 바로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당시의 대제국 애굽의 막강한 세력을 한 손에 지닌 바로의 분노와 위협이 어찌 두려움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모세는 바로보다 더 크시고 두려우시고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명령만을 두려워하며 모든 인간적 두려움을 물리쳤던 것이다. 모세의 담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 믿음은 인내를 낳고 담력과 평안을 가져온다. 그러나 불신앙은 조급과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올 뿐이다.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규례]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정하다는 원어(포이에오)만들다, 지키다는 뜻이다. 모세는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포하고 지켰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의 문설주(양 기둥)와 문인방(, 아래를 가로지르는 나무)에 바르게 했는데, 이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의 천사로 하여금 이스라엘 집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었다. ‘유월’(逾越)이라는 말은 심판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건드리지 않고 넘어간다는 뜻이다.

[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일은 모세의 믿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증거한다. 그래서 본문은 믿음으로 저희가라고 말한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 안 가서 큰 위기를 만났었다. 그것은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놓여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다시 쫓아오는 것이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으로 손을 들어 홍해를 가리켰으며 백성들은 믿음으로 홍해 바다 속으로 담대히 나아갔던 것이다.

홍해는 육지같이 갈라졌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늪을 지나간 것이 아니고, 출애굽기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바닷물이 양쪽에 벽이 되어(22)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같이 통과한 기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큰 위기에서 구원하신 기적이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서 바다 속으로 들어왔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통과해 저편 육지로 올라오자마자 바다가 원래대로 됨으로 다 물에 잠겨 죽고 말았다. 이것은 그 강퍅한 애굽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추가적 징벌이었다.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왕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고 아기 모세를 석달 동안 숨겼다.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선한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

모세는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잠시 이 세상의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불에 다 불타 없어지고 말 것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고난도 받을 각오를 하자.

모세는 또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애굽왕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였고, 또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규례를 행하였고, 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 성도는 구원을 받은 후에도 세상에서 종종 장애물과 위기를 만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속죄를 믿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야 하고 시시때때로 닥치는 큰 장애물과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30-31,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정복함

[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본문은 또 말한다. “믿음으로 [저희가]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여리고 성의 정복에 대해서는 구약성경 여호수아 6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여리고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조용히 돌라. 6일 동안 그렇게 하라. 7일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일곱 번째는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고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치라. 그러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의 이성과 상식에 비추어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의 명령대로 순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은 6일 동안 매일 성을 한번씩 돌며 제7일에는 일곱 번이나 성을 돌도록 인내하며 순종하였다. 그것은 놀라운 믿음의 순종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은 인내하며 순종하는 믿음이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벽이었다. 그 성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아내렸고 성문을 굳게 닫고 결사적 각오로 성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문이 굳게 잠긴 큰 성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첫 번째 큰 어려운 문제이었다. 그런데 그 성벽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성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성안에 있는 남녀노소와 우양과 나귀를 다 칼날로 멸하였다. 그들은 여리고 성 정복에서 너무 쉽게 승리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그들의 믿음의 순종을 통해 얻은 승리이었다.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 한 가정은 예외적으로 구원을 얻었다. 그것은 라합의 가정이었다. 이 일은 여호수아 2장에 기록되어 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다. ‘기생이라는 원어(포르네)창녀, 매춘녀라는 뜻이다. 그는 자기의 몸을 팔아서 생활해야 했던 비천하고 불쌍한 여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명백히 어기고 죄악된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여인이었다. 그는 분명히 큰 죄인이었다.

그러나 라합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큰 죄인 라합 속에 믿음의 은혜를 주셨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그는 벌써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가 갈라져 바다를 육지같이 건넌 것을 듣고 알았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멸한 소식을 듣고 알았었다. 그는 이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서와 땅 아래에서 참 하나님이시며 또 그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실히 주셨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 들어와 자기 집에 머물렀을 때 그들을 지붕 위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고 신고를 받고 달려와 그들을 찾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에 나갔다고 속여 말하였다. 그가 거짓말 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되지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숨겨주고 하나님의 일에 협조한 그의 중심은 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들을 했던 것이다.

그런 후에 그는 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작정된 대로 몇 일 후면 멸망당할 것이다. 그 멸망 중에서 구원 얻는 길은 한가지뿐이었다. 그것은 그 정탐꾼들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구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가 성 전체를 위해 간청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의 집, 즉 자기 형제들을 위해 간청할 수 있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고 그의 간청은 지혜로웠다. 그 여자는 그 정탐꾼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케 함으로써 약속을 얻어내었다.

라합과 그의 형제들은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서 구원을 얻었다. 라합은 순종치 아니한 자들과 함께 멸망치 않았다.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는 라합과 똑같이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소식을 들은 것은 40년 전이었다. 40년 동안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확인하고 죄악된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도 회개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우상숭배적이었고 음란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교만하고 무지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멸망하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오직 라합 한 사람은 믿음으로 그 자신과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였다.

구원받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또 주의 일을 수행하면서 여리고 성 같은 큰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 때, 우리는 그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자. 문제는 여리고 성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만 산다면 우리 앞에 놓인 여리고 성 같은 난관은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이성과 상식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될 것이다.

또 사람의 구원은 세상의 신분 여하에 달려 있지 않고 참된 회개와 믿음에 달려 있다. 비천한 이방 죄인 라합이라도 참 하나님을 믿었을 때 멸망에서 건짐을 얻었다. 그러나 사회에서 가장 존귀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사는 자라도, 교만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32-40, 세상을 초월한 신앙인들

[32-34]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 . . .

본문은 또 말한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의 예들이 더 많지만 그것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단지 몇 사람의 이름을 추가하고, 그가 언급한 혹은 언급하지 않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행위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체험에 대해 열거한다.

앞에서 언급한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등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경험들을 하였었다. 사무엘이나 다윗 같은 인물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자들이었다(삼상 12:4; 삼하 8:15). 또 다윗 같은 이는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약 10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다 왕이 되었다(삼상 16, 17; 삼하 5:4).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심으로 구원을 얻었다(6).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불무불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셨다(3). 다윗이나 엘리야는 사울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였고, 삼손이나 히스기야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었다. 앞에서 언급한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그리고 요나단 등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진을 물리쳤었다.

[35-38]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 . . .

본문은 또 말한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엘리야 때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도 그러하였다(왕상 17; 왕하 4).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자들의 믿음이었다. 예를 들어 므낫세 때에 무죄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었는데(왕하 21:16) 그 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더 좋은 부활’(크레이톤 아나스타시스)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세의 부활(아나스타시스)과 비교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내세의 영광스런 부활을 가리킨다.

유다의 경건한 아사 왕은 말년에 범죄하여 자기에게 바른 말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다(대하 16:7-10).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참 선지자 미가야는 동료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힘을 당하였다(왕상 22:24-27). 선지자 예레미야는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움을 받았으며(20:2) 또 토굴 옥 음침한 방에 감금되었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도 던지웠다(37:16; 38:6).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바른 말을 했던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였다(대하 24:21). 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동료들 85명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삼상 22:18). 또 어떤 이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유리하였다. 38절 초두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는 원어(혼 우크 엔 악시오스 호 코스모스)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아니하였도다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들은 세상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과 핍박을 감당할 수 있었다.

[39-40]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 . . .

본문은 말한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증거, 그들이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이요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증거를 말할 것이다. 그들은 증거를 가진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성이다. 예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19:30; 3:24; 10:4).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우리에게 소망 중에 주어졌다(8:24). 이 구원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로마서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앞의 세대들은 소망 중에 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마지막 세대들은 그 영광의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것이다.

32절부터 40절까지의 내용은 믿음으로 어떤 이들은 세상의 복, 육신의 복을 받기도 하였고 또 다른 이들은 더 나은 복을 바라며 그것을 포기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세상의 복, 육신의 복을 받을 수 있다. 병약한 자가 건강의 회복을 얻고 빈곤한 자가 경제의 회복을 얻고 세상 생활에서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는 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복이 있다. 그것은 세상을 초월하는 복이다. 세상은 지나가는 세상이다. 세상의 복, 육신의 복은 영속적이지 않다. 그것은 언젠가는 버리고 떠나야 할 복이다. 많은 신앙의 용사들은 한 차원 더 높은 신앙생활을 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초월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들은 더 나은 생명, 곧 하나님의 약속하신 영광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소망하면서 담대하게 살았다. 우리는 세상의 복에 머물지 말고 세상을 초월하는 복,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복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믿음의 선진들은 다 진실한 성도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체험하지 못하였다.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약속으로 받았으나 아직 그 성취를 체험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을 소망하며 마음의 눈을 열어 그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것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참된 믿음과 견고한 소망과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레위기 17장 좋은 성경 말씀] 피를 먹지 말 것(레 17:1-16)

 

[레위기 17장 좋은 성경 말씀] 피를 먹지 말 것(레 17:1-16)

레위기 1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소나 양이나 염소를 여호와 하나님께 예물로 바치지 않으면 피 흘린 자로 여긴다고 말씀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화목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죄인은 먼저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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