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에서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았으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말씀(요 1:14-18)
14절 카이 호 로고스 사르크스 에게네토 카이 에스케노센 엔 휘민 카이 에데아사메다 텐 독산 아우투 독산 호스 모노게누스 파라 파트로스 플레레스 카리토스 카이 알레데이아스
성 경: [요1:14]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라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 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 (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 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을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케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유일한')와 '게노스'('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 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 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 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 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 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15절 이오안네스 마르튀레이 페리 아우투 카이 케크라겐 레곤 후토스 엔 혼 에이폰 호 오피소 무 에르코메노스 엠프로스덴 무 게고넨 호티 프로토스 무 엔
성 경: [요1:15]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 사도 요한은 '마르튀레오'('증거하다')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인 '마르튀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세례 요한의 사역을 극적이고도 생생하게 재현시킨다. 그리고 그의 증거 사역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일치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사 40:3).
내가 전에 말하기를 - 원어상으로 본절은 '내가 전부터 그에 대하여 증거해 왔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혹자들의 이해대로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저자 요한의 삽입적인 해석(Westcott, Hort)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세례 요한의 부단한 증언이라고 봄이 문맥상 타당하다.
나보다 앞선 - 앞에서 언급한 '내 뒤에'라는 표현과 대조된다. 즉 (1)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태어나셨으며(눅 1:36), (2) 세례 요한의 사역의 시작 뒤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막 1:14, 15). 그러나 예수가 세례 요한보다 '앞선'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1) 세례 요한이 인간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예수는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선재하셨던 분으로서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빌 2:6). (2) 따라서 신분이나 권능에 있어서 당연히 세례 요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특히 세례 요한은 예수의 우월성을 당연하게 시인하였으며(3:22-30), 예수를 가리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눅 3:16), '하나님의 어린양'(29, 36절),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분'(막 1:7) 등으로 호칭하였다. 이처럼 세례 요한과 예수는 결코 비교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세례 요한과 예수가 상호 비교되어 묘사되어 있는 것은 (1) 예수의 공생애 직전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많았다는 점과 (2) 그에 따라 세례 요한이 메시야로 오인(誤認)되었다는 점, 그리고 (3) 초대 교회의 선교 당시에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는 점 등에서 기인한다. 즉 사도 요한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1) 예수께서 참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2) 요한 사역의 핵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16절 카이 에크 투 플레로마토스 아우투 헤메이스 판테스 엘라보멘 카이 카린 안티 카리토스
성 경: [요1:16]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 '충만한'의 헬라어 '플레로마토스'는 '플레로마'의 소유격 단수로 '차고 넘치는 완전한 분량'을 의미하며 14절의 '충만하더라'는 표현과 연관된다. 그러나 14절의 '충만하더라'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사용된 반면, 본문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은혜가 차고 넘쳐서 성도에게 미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한편 헤르마스 목자서(Shepherd ofHermas)는 '충만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나님은 만유인 동시에 하나이다. 그것은 만유의 충만함이 하나이며, 하나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신론적 경향은 당시의 영지주의의 영향에 의한 결과이다. 즉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자들은 '플레로마'를 최고의 영적 세계로 간주하고, 예수가 '플레로마'에서 이 세상으로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사도 요한은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며, 성도들에게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명시함으로써 당시의 영지주의의 거짓된 학설을 물리쳤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자면, 이 충만함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것이며(골 1:9)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다(엡 3:8). 그리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아무리 물을 퍼내어도 고갈되지 않는 샘'에 비유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 '...위에'라고 번역된 헬라어 '안티'는 원래'...와 대조하여'라는 뜻이나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대신에'(눅 11:11)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은혜 위에 은혜'(one blessing after another, NIV)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은혜 대신에 은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한 번 받은 은혜가 그 능력을 다 발하고 나면 또 다른 은혜를 받게 된다'는 의미로서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공동번역)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는 넘쳐흐르는 충만함으로 인하여 성도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은혜임을 요한은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제 성도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존재인 자신을 자각케 된다. 당시 유행했던 인본주의적 이방 종교와 이방 철학들 그리고 형식주의적 유대교라는 어두움을 뚫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과 은혜를 성도들에게 끼치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선포하였다.
17절 호티 호 노모스 디아 모세오스 에도데 헤 카리스 카이 헤 알레데이아 디아 이에수 크리스투 에게네토
성 경: [요1:17]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 6절부터 16절까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충만한 은혜를 묘사한 저자는 이제 구약의 율법 시대와 신약의 은혜 시대의 대조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새 시대의 특성을 간략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준다. 먼저 사도 요한은 율법 시대의 대표자인 모세를 통하여 율법의 특성을 간명하게 규정한다. 즉 율법은 피조물인 인간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롬 3:20), '몽학 선생'(갈 3:24)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 율법에 대조되는 은혜와 진리란 단순한 은사의 차원보다 더 높은 것이다. 은혜와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발견될 수 있고 이는 예수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예수 자신이 곧 은혜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본 구절에 사용된 동사 '온'이라는 말에 의해 강력히 뒷받침된다. 은혜와 진리는 율법의 경우처럼 수동적으로 주어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과 선교(Mission) 가운데 임했던 것이다. 또 '온'의 헬라어 '엥게네토'는 '발생하다'라는 뜻을 지닌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임함으로써 기독교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는 바로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근거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말씀임과 아울러 교회의 근거를 확고한 참 신앙의 반석 위에 세우는 말씀인 것이다.
18절 데온 우데이스 헤오라켄 포포테 호 모노게네스 휘오스 호 온 에이스 톤 콜폰 투 파트로스 에케이노스 엑세게사토
성 경: [요1:18]
주제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주제2: [말씀의 성육신]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문자적으로는 '결코 보이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란 의미이다. 비록 모세가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명성을 얻기는 했으나(출 33:11;신 34:10) 그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 것은 아니었다(출 33:17-34:9). 왜냐하면 유한하고 죄악 된 인생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출 33:20).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신대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예수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격렬 하였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10:20-33).
아버지 품속에 있는 - 이 표현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즉 1절의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이 표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고 계셨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암시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까지도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구절이다.
독생하신 하나님 - 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와 상호 연관되는 이 칭호는 바로 은혜와 진리의 부여자(附與者)이신 예수 그리스도(17절)를 가리킨다('독생자'에 대해서는 14절 주석을 참조하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본성인 은혜와 진리로 교회를 형성하신 분이라는 의미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독교가 당시의 이방 철학이나 종교 그리고 율법주의 및 로마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源泉)이었다. 특히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시 성도들 사이에 암호로 통용된 물고기 그림에서 당시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 헬라어로 '물고기'는 '익뒤스'로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텔,)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굳건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교회가 온갖 박해를 이기고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었듯이, 오늘날의 물신주의와 이데올로기(ideology)의 와중에서도 교회가 설 수 있는 기반이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마태복음 헬라어 성경 예수님 말씀] 간음에 관한 예수님 말씀(마 5:27-30)
'신약 설교 알쓸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9장 성경 주석 성경 좋은 말씀] 예정과 선택(롬 9:1-33) (0) | 2022.03.13 |
---|---|
[로마서 11장 주일 설교말씀] 이스라엘의 구원 3(로마서 11:1~36) (0) | 2022.03.10 |
[마태복음 천국 비유 설교문] 청함 받은 신앙, 택함 받은 신앙(마 22:1-14) (0) | 2022.03.02 |
[요한계시록 9장 주석 설교말씀] 다섯째 나팔부터 여섯째 나팔 재앙(2) (0) | 2022.02.28 |
[마태복음 헬라어 성경 예수님 말씀] 간음에 관한 예수님 말씀(마 5:27-30) (0) | 2022.02.17 |
[신약 히브리어 성경 마태복음 말씀] 맹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마 5:33-37) (0) | 2022.02.14 |
[데살로니가전서 성경 좋은 말씀] 재림의 위로(살전 4:1-18) (0) | 2022.02.03 |
[골로새서 성경 좋은 말씀] 예수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골 3:1-25) (0) | 2022.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