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이 간음에 대하여 새로운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육체로 직접 간음할 때 간음으로 인정했는데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으로 법을 강화시켰습니다.
간음에 관한 예수님 말씀(마 5:27-30)
27절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토이스 아르카이오이스 우 모이큐세이스
성 경: [마5:2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간음(姦淫)치 말라 -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계명(출 20:14; 신 5:18)은 유대교 문헌에서는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간음이란 남의 아내(약혼자도 해당)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는 그 행위를 모든 부녀자에게로 확대시키고 있다(28절).
28절 에고 데 레고 휘민 호티 파스 호 블레폰 귀나이카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테스 에데 에모이큐센 아우텐 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성 경: [마5:2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여자를 보고...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예수는 제7 계명을 다른 차원, 즉 음욕조차도 용납되지 않는 완전한 순결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제10 계명에서 이미 이러한 점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한편 '여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귀네'는 '아내'보다는 '여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예수는 유대 법에서 크게 문제시하지 않는 범위까지 확대하는 철저한 도덕률을 원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율법을 무효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의도에 맞추어서 변경하는 것이다'(Davies).
음욕을 품는(에피뒤메사이) - 이 단어는 과거 부정사로 사용되었으며 원형이 '에피뒤메오'로서 '갈망하다', '욕망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로 '원하다'는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롬 1:24에서는 분명히 성적인 욕망과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본 구절, 즉 '여자를 보고 음욕(carnal desire)을 품는'의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텐'이라는 표현은 목적의 의미로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려고'라는 뜻이 되거나, 결과적인 의미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게 되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즉 '아우테스'(소유격)보다 '아우텐'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우텐'이라는 목적격은 부정사에 대한 지시의 목적격(즉 의미상의 주어)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음욕을 갖게끔 하려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Carson). 따라서 카슨(Carson)은 이 구절에 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는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 하려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의도가 성취되며 그는 '그 여자'와 간음을 하고, 여자도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인하여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문제의 핵심(核心)이 여전히 음욕과 마음속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마음에(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심장을 의미한다거나 또는 인간이 지닌 지. 정. 의 가운데 감정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지. 정. 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은 '떨리다', '두근거리다'라는 어원을 갖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외적인 행위 이전에 눈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간음에 그 중요성을 두신다(Robertson).
29절 에이 데 호 오프달모스 수 호 덱시오스 스칸달리제이 세 엑셀레 아우톤 카이 발레 아포 수 쉼페레이 가르 소이 히나 아폴레타이 헨 톤 멜론 수 카이 메 홀론 토 소마 수 블레데 에이스 게엔난
30절 카이 에이 헤 덱시아 수 케ㅔ이르 스칸달리제이 세 에크콥손 아우텐 카이 발레 아포 수 쉼페레이 가르 소이 히나 아폴레타이 헨 톤 멜론 수 카이 메 홀론 토 소마 수 블레데 에이스 게엔난
성 경: [마5:29,3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네 오른눈...빼어 내버리라 - 죄를 범하게끔 하는 신체의 부분들을 경계하라는 본 구절 때문에 오리겐(Origen)과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만족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에 철저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음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우리 신체 중 우리를 범죄 하게 하는 것, 특히 성적인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비난을 받았던 부분이다(민 15:39; 잠 21:4;겔 6:9;18;12;20:8). 그리고 '오른눈'은 가장 좋은 눈을 말한다. 한편 '실족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나로 인하여 걸림돌이 되다', '나로 인하여 범죄 하게 하다'(18:6-9;눅 17:2; 롬 14:21) 또는 '타인의 길을 방해하다', '믿지 못하게 하다'(11:6;15:12), '오해하게 하다'(17:27; 요 6:61) 등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 '스칸달론'은 덫을 작동시키는 '미끼가 달린 막대기', 즉 멸망으로 인도하는 유혹물(enticement)또는 '죄짓게 하는 유혹'(temptation to sin)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실과 본문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너로 실족케 하거든'이란 오른눈이 '너의 전존재를 죄짓는 유혹으로 이끌거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오른눈은 유혹의 도구와 동기(動機)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음욕에 대한 것을 다루는 곳에 왜 '오른손'이 나오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를 들기 위한 것이거나 음욕도 도둑질의 일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자(Lachs)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이 말이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기 위한 완곡어법이라고 한다. 즉 히브리어로 '야드'('손')가 사 57:8에서는 이러한 용법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이 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어쨌든 죄를 짓는 부분을 잘라내거나 빼어 버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문자적인 것보다 상징성이 강한 교훈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은 죄의 문제를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는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다. 그러나 눈으로 인하여 더러운 것만 보게 된다면 상상력은 오염되게 될 것이다. 성적인 죄뿐만 아니라 모든 죄가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상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 천국의 의(義)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빌 4:8). 모든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다 똑같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28절). 그렇지 못하면 아예 멀리하고 바라보지도 말라(Scott). 실로 이같이 죄악의 시초에서든 그 과정상에 있든 일단 자신의 죄악이 자각되는 순간 어떠한 여유나 합리화도 용납치 않고 단호한 결단으로써 죄악의 본질을 근절(根絶)하고 멀리하는 것만이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지혜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는 것은 죄의 대가인 지옥뿐이다. 이런 사실은 너무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는 여러 곳에서 이것을 되풀이하고 있다(18:8, 9).
[신약 히브리어 성경 마태복음 말씀] 맹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마 5: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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