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전도서 1장 히브리어 강해] 인생 허무에 대한 총론적 고찰(전 1:1-11)

복음의 능력 2021. 5. 16.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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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전도서 1장 히브리어 강해 중에서 인생 허무에 대한 총론적 고찰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솔로몬 왕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아 살아본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솔로몬이 모든 것을 누려보고 인생은 허무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로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체가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마지막은 허무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의 삶으로 살다가 죽어서 지옥의 고통으로 떨어진다면 너무나 허무한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복음을 깨달았고 이제 주님을 알았으니 인생이 허무하지 않습니다.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살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 허무에 대한 총론적 고찰(전 1:1-11)

 

1절 디브레 코헬레트 벤 다비드 멜렉크 비루솰람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1:1

본서의 필자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솔로몬이다.  그 이유는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 된 자는 솔로몬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화평하다"는 뜻의 자기 이름 솔로몬을 감추고 있는데, 이는 그가 죄악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과 자기 나라에 환란을 초래하였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렸으며 자기 양심의 평안을 상실하여서, 그 이상 더 그 이름으로 불릴 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솔로몬이라고 부르지 말라.  나를 마라라고 불러라.  "보라. 내게 화평함 대신 큰 괴로움을 취하였노라." 그는 자기 자신을 다음 세 가지로 칭하고 있다.

전도자. 이것은 그의 현재적 특성을 시사해 주는 칭호이다.  그는 코헬렛(Koheleth)이다.  이것은 "거두어들인다"는 뜻의 단어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이 말은 여성 어미(語尾)로 되어 있는데, 아마 솔로몬은 자신의 아녀자 같은 유약성을 자책할 심산으로 이 같은 여성 어미를 사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타락은 딴 어떤 요인보다 바로 이 유약함에서 크게 야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우상을 세운 것은 자기 아내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느 13:26). 혹은 이 단어는 영혼이란 말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되며, 따라서 코헬렛은 다음 두 가지로 파악된다.

"참회하는 영혼" 혹은 "거두어들여진 영혼"을 뜻한다.  길 잃은 양과 같이 헤매던 영혼이 이제는 원상으로 복귀하고, 방황으로부터 거두어들여져서 자기 의무의 본향을 찾게 되며, 마침내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수천 가지 헛된 것을 쫓아 분산되어 버렸던 심령이, 이제는 한데 모아져서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게 되었다.  신의 은총은 큰 죄인들이라도 위대한 회심자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의의 길을 안 후에, 그 길에서 돌이킨 자"들조차 새롭게 하여 회개시키고, 비록 어려운 일이긴 하나 "그들의 재 타락을 치료"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은 오직 회개하는 영혼뿐이다.  갈대처럼 하루 동안만 고개 숙이는 머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을 받아 주시며, 아합의 후회가 아니라 다윗의 회개를 받아 주실 것이다.  또 참회하여 곁 길에서 돌아오고 그 이상 더 이방인들의 길로 달려 가지 아니하며"(렘 3:13), "연합하여 하나님의 성호를 경외하는" 영혼은 거두어들여진 영혼뿐이다.  "마음속에 풍성히 차고 넘치면 입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참회자의 말을 대하게 되는 것이며 그 말들이 공포됨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이 큰 죄악에 빠지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명예와 그들이 그의 나라에 끼친 손해를 복구하기 위해, 자기들의 회개를 공공연하게 증언하려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는 독이 퍼진 만큼 그 해독제도 널리 퍼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전도하는 영혼" 혹은 "거두어들이는 영혼"을 뜻한다.  그 자신이 자기 죄로 인해 뛰쳐나갔었던 성도로 거두어들여지고 교회와 화해되었으므로, 그는 자기처럼 방황하고 자신의 본보기를 따라 타락되었을지도 모르는 영혼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려고 노력하였다.  자기 형제를 타락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관여된 자들은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솔로몬은 전에 성전 봉헌 시에 자기 백성의 회중을 전부 모았던 것처럼(왕상 8:2), 이제 자신을 재 봉헌하면서도 회중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전자의 집회에서 그는 하나님께 대한 백성의 입이 되어 기도식을 주재하였으나(12절), 후자의 집회에서는 백성에게 대한 하나님의 입으로서 설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와 화해되셨다는 징표로 자기 성령을 통해서 그를 전도자로 만드신 것이었다.  임무를 부여하신다는 것은 무언의 용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자기의 어린양들과 양 떼들을 그에게 위탁하심으로써 그의 용서를 충분히 입증하신 것이다.  참회자들은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돌이켜서 생명을 취하도록 스스로 경고를 받아들인 자들은, 타인들에게도 계속 범죄의 길로 가다가 죽음을 당하지 말도록 경고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라."  전도는 전도하는 영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심령에서 나오는 것만이 심령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以心傳心).  바울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그의 심령으로 " 하나님을 섬겼다(롬 1:9).

2절은 헤벨 하발림 아마르 코헬레트 하벨 하발림 하콜 하벨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2

헛되고 헛되며 ... 헛되도다 - '헛되고'의 히브리어 '헤벨''', '', '공허함', '속이 텅빔' 등을 뜻한다. 그리고 '하벨 하벨림'(헛되고 헛되며)은 문자적으로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vanity of vanities)이다.

이것은 '헛됨'을 최상급으로 강조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용구적인 표현이다. 이와 같은 관용구적인 표현은 이외에도 '지성소'(the holy of holies, 26:33), '아가'(song of songs, 1:1), '만왕의 왕'(King of kings, 19:16), '만주의 주'(Lord of lords, 19:16) 등이 있다. 한편 본절에서 솔로몬과 같이 지혜롭고(1:16) 부유하며(2:4-8), 수많은 첩들을 둔 자가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한 것은 그가 한때 이방 여인과 연락(宴樂)하다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허무함을 절실히 느낀 자로서 이를 고백한 것으로 보인다.

3절 마 이트론 라아담 베콜 아말로 쎄야아몰 타하트 하솨메쉬

전 1: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1:3

해 아래서 - 본서의 독특한 표현으로서 본서에만 29(9,14; 2:11,17,18,19,20,22; 3:16;4:1,3,7,15;5:13,18; 6:1,12;8:9,15,17; 9:3,6,9,11,13;10:5) 나오는데, 이는 본서 다른 곳의 '하늘 아래'(13;3:1),

'세상에서'(8:14,16;11:2) 등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즉 이는 초월적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과 대조되는 이 땅의 유한하고 제한적인 존재들이 사는 삶의 영역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 유익한고 - 이는 부정적 답변을 유도해 내는 역설적인 질문이다. 즉 이 세상에서의 모든 수고가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고'(아말)'열심히 일함', '진저리 나는 노력'의 뜻을 내포하는데, 이것이 유익하지 못하다는 말은 창조 시 노동의 제도를 설정하셨던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거슬리는 듯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해 아래서'라는 말을 전제 조건으로 삼는 바 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의 가치를 이탈한 모든 수고의 무익함, 부조리함을 암시한다. 근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노동의 사명을 받아 기쁨 가운데 일하게 되었으나 아담의 범죄 이후에 노동의 참의미가 왜곡되었으며(3:17-19) 이제 성도는 예수 안에서 노동의 참뜻과 본질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4절 도르 홀레크 베도르 바 베하아레츠 레올람 오마데트

전 1: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1:4

한 세대는 가고 ... 오되 - '세대'(도르)'(동시대 사람들이 사는) ', '기간'을 뜻하는 말로서 성경에서는 '시대'(1:6;2:14;73:15), '세대'(창7:1;신 1:35;14:5;78:8;2:31) 등으로 번역된다. 이는 보통 40년으로 간주하100년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15:13,16). 본 구절은 유한한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한 것으로 본서의 전제 '모든 것이 헛되도다'(2)라는 말에 부응한다.

한편 본 구절의 '가고 ... 오되'( ... , 할레크...바)란 분사의 형태로서 하반절의 '있도다'(아마데트)와 함께 어떤 사건, 행동의 연속성을 나타내며(Eaton) 여기서는 인생의 유한성와 가변성(可變性)을 더욱 강조한다.

땅은 영원히 있도다 - 이는 하나님께서 그 기초를 놓으셔서 항상 견고히 존재토록 하신 땅은 변함없이 존속하리라는 생각에 근거해 언급한 말로서(38:4-6; 119:90; 8:29) 인생의 가변성(可變性), 무상함을 더욱 극적으로 나타낸다.

5절 베자라흐 하쎄메쉬 우바 하솨메쉬 베엘 메코모 쇼에프 조레아흐 후 솸

전 1: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1:5

해는 떴다가 ... 돌아가고 - '돌아가고'의 히브리어 '솨아프'는 '(숨을) 헐떡거리다', '동경하다', '갈망하다' 등의 뜻을 갖는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1)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떴다가 저녁에 서쪽으로 지는 단순한 반복을 거듭한다는 사실(Delitzsch, T.H. Leale) 혹은 (2)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떴다가 저녁에 서쪽으로 지고 밤에 다시 억지로, 힘들게 그 떴던 동쪽으로 가서 아침에 다시 뜬다는 뜻을(M.A. Eaton, Cleric) 암시한다. 즉 본절은 해가 단조롭고, 덧없이 아침에 떴다가 저녁에 지며 밤새 다시 그 떴던 그곳으로 가서 아침에 뜬다는 뜻으로서 해(자연)의 운행의 무료함과 무상함을 암시한다.

6절 홀레크 엘 다롬 베소베브 엘 차폰 소베브 소베브 홀레크 하루아흐 베알 세비보타이브 솨브 하루아흐

전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1: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 돌이키며 - 앞절에 이어 바람의 운동이 끝없이 지루한 반복을 계속한다는 점, 곧 바람의 무상함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본절의 '남과 북'란 앞절에서 해가 뜨는 동쪽과 지는 서쪽이 이미 언급되었기 때문에 다른 측면에서 언급되어진 방향으로 본다. 왜냐하면 팔레스틴 지역에서 대부분의 경우 바람은 동서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G.A. Barton). 한편 '불다가 ... 돌이키며'( ... 홀레크...소베브)는 뒤에 오는 '돌며'(소베브)란 말과 함께 분사로서 4절의 경우처럼 바람의 단조로운 반복을 강조적으로 표현한다(Eaton).

7절 콜 하네할림 홀르킴 엘 하얌 베하얌 에네누 말레 엘 메콤 쎄하네할림 홀르킴 솸 헴 솨빔 랄라케트

전 1: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1:7

모든 강물은 ... 채우지 못하며 - 5절의 '', 6절의 '바람'에 이어 강물의 무상함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강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할림'은 보편적''을 뜻하는 '네하림'(창 15:18; 18:1)과는 어휘면에서 다른데, 혹자는 전자가 '물이 흐른다'는 측면을 부각시킨 말이라고 주장한다(Delitzsch). 물의 흐름을 강조할 때 본 구절의 의미는 한층 명확해진다.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솸 헴 솨빔 랄라케트) - 이는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엘 메콤 쉐하네할림 흘레킴)의 해석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영역본 NIVKJV'물이 흘러나온 그곳으로'(To the place the streams come from, NIV; unto the place from when the rivers come, KJV)를 뜻하는 것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RSV'강물(계속) 흐르는 그곳으로'(to the place where the streams flow)의 뜻으로 옮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후자를 취하여 강물이 순환하여 그 원천지로 간다는 뜻이 아니라,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흐른다는 뜻을 고수한다(Delitzsch, Eaton, Deance). 이는 강물이 바다를 채우지 못하면서도 계속 그 흐르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무상함을 암시한다 하겠다.

8절 콜 하데바림 예게임 로 유칼 이쉬 레다베르 로 티세바 아인 리르오트 베로 티말레 오젠 미쉐모아

전 1: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1:8

만물의 피곤함을 ... 할 수 없나니 - 혹자는 '만물'을 뜻하는 '칼 하데바림'에서 '데바림'''(words)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M.A. Eaton, Ewald, Hengstenberg) '만물의 피곤함'이란 '모든 말들이 고통스럽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70인 역(LXX)'만물'''(로고스)로 취하여 '모든 말씀들이 피곤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럴 경우 상반절의 의미는 '모든 만물, 자연현상들이 무상하므로 이것을 말하려면 피곤하여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주석가 델리취(Delitzsch), 바톤(G.A. Barton) 등은 '만물'을 개역 성경처럼 그대로 '만물'로 취한다. 그리고 영역본들도 대부분 이렇게 본다(All thing, KJV, RSV, NIV, NASB). 이럴 경우 '만물의 피곤함'이란 앞절들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든 만물이 무상하고 헛된 수고로 인해 곤비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중 후자의 해석이 더 자연스러운 듯하며, 이는 '피조물이 ...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롬 8:22)이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눈은 보아도 ... 아니하는도다 - 만물이 무상하고 헛됨으로 인해 그것을 보고 듣는 자가 만족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피곤하다는 의미이다.

9절 마 쎄하야 후 쎄이흐예 우마 쎄나아사 후 쎄예아세 베에인 콜 하다쉬 타하트 하솨메쉬

전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1:9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 이 죄악된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이 세상 만물의 헛됨, 무상함을 거듭 강조한다(3절 참조).

전에는 결코 알려지지 않았던 신기한 발명에 대한 잘못이다.  여태까지 어느 누구도 우리 만치 지식에 있어서 장족의 진보를 이룬 자도 없으며 그 지식을 통해 이토록 눈부신 발견을 해낸 자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또 지금까지 우리만큼 재산이나 무역을 향상시키고 그 이익을 누리는 기술이 탁월한 자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발명은 은혜로운 일이 될는지 모른다.  과거의 고안들과 구조물들은 죄다 천대를 받고 낙후돼버리고 말았으며, 우리는 새로운 모형과 새 가설들, 새 방법들과 새로운 표현들을 자랑하게 되었으니, 이 새로운 것들은 옛 것들을 밀어젖히고 압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결국은 오산이다.  "지금 있는 것과 후에 있을 것도" "과거에 있던 것"과 꼭 같은 것이며, 후에 "행해질 것"도 이미 "행해진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그것은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은 없기"때문이다(9절).  이 말씀은 10절에서 질문 형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다' 할 것이 있으랴?"  이 말씀은 관찰력 있는 자들에 대한 호소이며, 현대의 학문을 고대의 지식보다 앞세워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도전이다.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열거해 보라.  

비록 이전 시대에 관한 기록의 부족 때문에 꼬집어 나타낼 수는 없을지 모르나 우리는 "우리보다 앞선 옛적에 그것이 이미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자연의 왕국에서 "이것은 새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일들은 세상의 기초가 놓아진 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히 4:3).  우리에게 새로운 것으로 보이는 것들은 우리 자손에게도 또한 새로운 것이 될 것이다.  즉 그것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늘은 옛적에 있었고 땅은 영원히 존재하고 있다.  

자연의 힘과 자연의 인과 관계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과 같이 변함이 없다.  섭리의 세계에서는 비록 그 진로와 방법이 자연계와 같이 잘 알려진 확실한 법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언제나 동일한 궤도를 따라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언제나 여전히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과 또 그 마음의 부패도 여전히 같다.  그 욕망과 추구하는 것과 불평도 여전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성경 말씀과 인간의 행동에 따라서 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위는 되풀이된다.  

우리에게 놀랍게 보여지는 일도 그다지 놀랄 필요가 없다.  이전에도 그와 같은 일이 있었으며 이전에도 그처럼 뜻밖의 진보나 실망이 있었고, 그와 같은 생소한 혁명이나 돌연한 변혁이 있었으며 그 같은 급격한 사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생활의 여러 가지 참상은 언제나 대동소이(大同小異)하며, 인류는 해와 바람처럼 끊임없이 돌아가는 회전 무대에 올라서 있어 그 있던 자리에 머물고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10절 예쉬 다바르 쎄요마르 레에 제 하다쉬 후 케바르 하야 레올람밈 아쎄르 하야 밀르파네누

전 1: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0

무엇을 가리켜 ... 있었느니라 - 이것은 9절 하반절 즉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에 대해 야기될 수도 있는 반론을 반박하는 내용이라 볼 수 있으며, 부정적 답변을 유도하는 의문문이다. '오래전 세대'( , 레올라밈)는 원문상 4절의 ''(도르)라는 말이 없이 단지 '오래전'을 뜻한다. 혹자는 이를 시간의 끝없는 연속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ange).

우리가 피조 세계에서 행복을 구하거나 만족을 기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여태껏 아무도 행복이나 만족을 발견하지 못한 곳에서 왜 그것을 찾아야 할까?  이 세계가 우리보다 앞서 간 자들 이상으로 우리에게 더 친절하리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세상에서 새로운 것은 도무지 없으며 우리 선조들은 이 세계를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깊이 파보지 않았는가?  "너희 조상들은 만나를 먹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지 아니하였느냐? (요 8:8, 9; 6:49 참조)

11절 에인 지크론 라리쇼님 베감 라아하로님 쎄이헤이우 로 이흐예 라헴 지카론 임 쎄이헤이우 라아하로나

전 1: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1: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 없으리라 - 2절에서부터 진행된 일련의 주장이 인간 역사 전반의 허무성을 갈파하는 구절로 결론에 이르고 있다. 해 아래서는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해 아래서'라는 전제를 조건으로 한다. 한편 '거억함'(지크론)은 단순한 기억뿐만 아니라 그 기억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뜻한다(13:31). 그리고 본절의 '세대'에 대해서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나(NIV, Lys) 인생과 상황을 포함한 역사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더 나을 듯하다(Aalders, Thilo).

우리가 영적으로 영원한 축복을 얻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것들을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을 숙지(熟知)하여 새로운 본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에는 "옛 것이 지나가고 만물은 새롭게 된다"(고후 5:17).  복음은 "우리 입에 새 노래"를 머금게 해 준다.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우며"(계 21:5) 그곳은 참으로 새로운 세계이다(눅 20:35).  

그곳은 이 세상의 상태와는 달리 처음에도 새롭고 영원토록 새로우며, 언제나 신선하고 언제나 번성한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얼른 죽고 싶어진다.  즉 이 세상에는 몇 번이고 같은 일만 반복될 뿐이며, 우리가 이미 겪은 것에 비하여 더 많고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어서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인간들이 행한 업적이 그들의 사후에도 알려지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라는 업적의 기억에 대한 잘못이다.  그들의 이름은 불후한 것이 될 것이고  그들의 후손은 자기들이 이룩한 행위와 자기들이 획득한 명예와 자기들이 불려 놓은 재산을 기념해 줄 것이며, "그들의 집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시 49:11)는 점에서 충분한 만족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 그들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셈이다.  당대에 아주 위대하게 보이고 크게 두각을 나타냈던 "이왕지사"와 인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어떤 기억도 없지 않은가!"  그들은 망각 속에 매몰되어 버리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주목할 만큼 뛰어난 인사나 일은 친절한 역사가를 만나 기록에 남을 수 있는 운을 가지나 동시에 그보다 못지 아니하게 비범하면서도 누락되어 버리고 마는 인물이나 일도 또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올 것들에 대해서도 기억함이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기억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희망도 사라져 버리거나, 가볍게 여겨지고 말 것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요한일서 1장 강해설교말씀] "생명과 빛 되신 하나님”(요일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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