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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회사 성경공부] 종교개혁 당시 칼빈의 설교 특징 연구

복음의 능력 2021. 4. 26.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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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기독교 교회사 성경공부 중에서 종교개혁 당시 칼빈의 설교 특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칼빈의 설교 특징을 알아보고 종교개혁 당시 칼빈이 어떻게 설교를 했는가 생각하면서 좋은 장점은 우리가 배우면 좋겠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의 칼빈의 설교 특징 연구

 

칼빈은 이런 설교자와 설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설교 사역을 이루어 갔다.

그럼 칼빈의 설교 내용의 특징은 어떠한가?

 

1) 성경을 그 본래의 의미를 찾아 간결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종교 개혁 초기 교회의 사역자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철저히 아는 것을 제 일차적인 임무로 삼았다. 말씀을 전하는 그들의 태도 자체가 이 일을 불가피하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제 일차적 참고 자료는 성경이었다. 그리고 성경 강화가 그들의 설교였다. 칼빈도 예외일 수 없었다. 칼빈은 그의 주석의 원칙을 명료성과 간결성에 두었듯이 설교에서도 이 원칙을 따르려 노력했다. 칼빈의 설교집을 출판한 스위스의 인쇄업자인 콘라드 다비우스는 칼빈의 설교집 머리글을 통해 설교에 대한 그의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바디우스는 칼빈의 설교집(1557년 판)을 내면서 자신의 설교에 대한 관점이 칼빈과 일치함을 표명했다. 바디우스는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의 교회를 풍요롭게 하시려고 사용하신 훌륭한 선물들 가운데서, 가장 유용하고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설교라는 은사이다. 이 은사는 성경의 내용이 가지는 참되고 본래적인 의미(Very et neturel sens)를 따라 그 뜻을 분명히 이해하고 또한 그 뜻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순전하게 설명하기 위한 목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설교자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 말씀을 자기 자신의 시대에 바르게 적용하는 방법을 깨닫기 위한 목적에서 존재한다바디우스는 칼빈의 설교야말로 이런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설교임을 칼빈의 설교집 머리글에 밝혀 놓은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출판)을 통하여, 즉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 우리들에게 말씀의 꼴을 공급해 주고 있는 푸른 목장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리고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나라에 있는 자신의 양 떼들을 위한 목자들로 임명하신 자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단순하고, 순수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어떠한 두려움과 열심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선포되는가를 알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바디우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살스러운 재담과 “세속 작가들이 쓴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이야기들을 섞어서 멋들어지게 말하는 훌륭한 웅변가들을 더 좋아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경건성을 잠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바디우스의 설교관은 바로 칼빈에 의해 만족감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성경을 본래적 말씀을 각자의 시대에 단순하고 순수하게 적용시키되 관계되는 사람에게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순히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훈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도록 권고하는 것도 포함되는 것이다.

칼빈은 연속적 강해를 했기 때문에 특별한 서론이 없다. 단지 지난번에 한 강해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는 것으로 서론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설교할 때 미리 정한 어떤 사상의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다만 본문의 말씀이 놓여진 순서를 따라서만 해 나갔다. 그래서 어떤 주제나 제목을 잡지 않았다.

욥기 강해 설교(욥38:1-4)의 설교를 살펴보면 우리는 앞에서 엘리후 자신도 죽을 인생이라는 걸 단언한 것이 욥을 책망하기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엘리후가 그렇게 말한 것은 욥으로 하여금 너무 높은 권세로 취급받는다는 불평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 그의 설교를 시작하고 있다. 그의 서론이 그의 설교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사람들을 방편으로 사용하시어 말씀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하고 명료하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보다 더 자유롭게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하려 함이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분량밖에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전혀 회개의 가망이 없이 굳어지고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리지 않는 자에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시기 위해 위엄을 입고 서신다고 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하나님께 충성을 드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을 이렇게 강해해 갔다.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임재의 표증을 욥에게 보여주시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하여 폭풍같이 자신을 내 보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뇌성을 타신다는 말씀을 자주 합니다. 자기를 안 믿는 미친 자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실 때 말입니다. 그러나 특히 여기서는 그 장소와 상황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욥은 아직 완전히 유순한 자세를 가지지 않고 있는 만큼 하나님께서 욥에게 무서운 권세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이 까닭에 욥으로 하여금 주인(主人)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천둥을 치시며 폭풍 속에서 운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패역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무섭게 드러내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근하게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 수 있기만을 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꺼이 복종할 때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한 인정 어리게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악함이 있음을 보시면 처음부터 우리를 납작하게 만드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멸시를 받거나 아니면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전혀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반포하실 때 천둥으로 두렵게 하며, 나팔 소리가 들리게 하며, 모든 사람들이 그걸 듣고 무서워 떨게끔 하신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모두 죽고 엎드러지겠나이다라고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째서 그처럼 온 땅을 요동케 하셨고 그의 목소리로 무섭게 만드셨습니까? 백성들을 철저하게 견책 하사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하나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라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오히려 백성들의 거만함을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표적이 함께 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에 엎드리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 욥에게 말씀하신 것이 쓸데없지 않았음을 잘 주목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온 힘을 쏟았던 그처럼 거룩한 사람에게도 그런 식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면 우리야 어떠하겠습니까? 욥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 봅시다. 욥은 마치 천사적인 거룩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인물입니다... 그가 인간으로서는 가장 극한 고난을 받으며, 불만을 토로했고, 과격한 진술을 했지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원리만은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부분적으로 넘어지기는 했지만 보편적으로 그 원리는 갖고 있었습니다....

... 이제 우리는 다음 말씀으로 넘어가 봅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 지니라 먼저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비웃음 어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욥이 패역한 것만큼 말입니다. 욥이 생각할 때는 이치를 통해서 자기의 입장을 아뢰어 지기가 이길 것 같이 느꼈으니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는 누구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누구인지를 보여줄 때, 그것은 우리의 모든 거만을 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신들을 자랑합니다. 자기들이 어떤 존귀함이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잘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에서 악취만을 맡으실 뿐이라 그들을 슬어 버리십니다.... 비록 우리가 그처럼 어리석어, 우리 자신이 어떤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함으로 자랑하는 주제넘음에 빠진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비웃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을 잃도록 하기 위해 단 한마디 말씀이면 족합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사람이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 그것은 우리에게서 모든 자랑할 기회를 한꺼번에 박탈해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한 방울의 선도 없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우리 자신을 앞세워 내세울 만한 어떠한 경우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라고 덧붙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네가 갖고 싶은 것으로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마치 거인인 양 스스로 생각하며, 잘 차려입고, 네가 할 수 있는 한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장을 해 보거라. 그런다 할지라도 네가 결국 그것을 통해서 무슨 유익을 얻겠느냐? 이 불쌍한 피조물아, 내가 너를 대적할 것이면 네가 스스로 버틸 한 가지 길이라도 생각해 낼 수 있겠느냐? 네가 무엇을 가졌느냐?”.... 하나님께서 이러한 차원에서 말씀하실 때 한 두 사람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인류 전체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까지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영광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수치와 혼미스러운 것밖에 아님을 알고서 말입니다.

너는 누구냐?”라는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사도 바울이 다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하나님께서 어째서 자신이 창조한 자들을 버릴 것인가? 어째서 까닭 없이 하나님은 사람마다 차별하시는가? 이 사람은 구원받도록 부르시고, 저 사람은 버려두시니 그게 어찌 이치에 합당한 일인가?”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논박할 어떤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의 도전을 사도바울은 그렇게 제압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너의 인생이여, 너는 누구냐? 네가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려 드느냐?” “너는 누구냐?”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요점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각자 거만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뿔싸! 너는 누구냐?”... 자 이제 특별하게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으라”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은 온 세상이 있는 힘을 다해 무장하고 과시한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 욥이여 스스로 무장하고 거인처럼 차려 입거라. 아니면, 이 세상에서 가장 날쌘 사람처럼 차려 입거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욥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을 훨씬 더 분명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또한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선언하시는 것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밀한 것에 대한 생각 다음에는, 분명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모든 두려움을 진지하게 가지고 나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치란 말을 통해서 욥이 말한 높은 것들을 나타내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 이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높은 비밀들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경외심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순전하신 선하심을 통하여 그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실 의향을 가지지 않는 한,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알아내려고 주제넘게 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러한 논란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하나님을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술 취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민활한 사람들이고, 성경을 가장 많이 체험한 삶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마땅히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런 방식으로 성경이 기록된 순서에 따라 설교해 나갔다. 그래서 한 설교에 여러 개념들이 설명되고 있다. 그는 성경의 구절구절을 기록된 순서대로 강론하며 그때그때 적용을 했던 것이다. 그는 흔히 대지를 구분하는 식으로 설교하지 않았다. 그는 본문의 흐름에 따라 본문의 순서대로 설교해 나갔다. 그리고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고 설명하여 성도들의 삶에 적용토록 호소했다.

 

2) 칼빈은 성경 중심의 설교를 했다.

오늘날 흔히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신문들고 설교하라고 말한다. 어떤 때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성경을 선택하여 설교하기도 한다. 이 시대의 상황과 성경 말씀에 의한 조명은 무시할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대 프로테스탄티즘에 있어서는, 설교학의 주요 원천이 성경이나 신조가 아닌 시구(詩句)나 매일 발행되는 신문이 되어 가고 있다. 국제적 회합에 대한 논문들이나 잇슈(issue)가 설교의 자원이 되기도 한다. 비록 이런 일이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의 두드러진 특징이긴 하지만, 보수주의자들도 그런 기풍에 젖어들고 있다.

종교개혁 초기의 사역자들은 성경 연구를 철저히 하여 제 일차적 참고자료는 성경이었다. 그후 17세기엔 설교자들의 주 자원이 교의와 신조였다. 성경이 무시된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수사술(修辭術)이 설교의 구조를 장악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성경이나 신조가 아닌 당시의 시사성 있는 문제나 일간 신문, 잡지 등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상황에 따라 설교하지 않았다. 그는 소위 오늘날 흔히 말하는 상황에 따른 설교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절기에 대한 설교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쫓겨났다가(스트라스부르그에서 사역함) 제네바로 다시 돌아온 날 그는 그의 설교에서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서나 자신의 처지와 심경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 기대했으나 그는 쫓겨나던 당시의 본문을 가지고 계속하여 강해해 나갔던 것이다. 칼빈은 이 일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설교하기 위해 회중 앞으로 갔습니다. 각자는 큰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분명 기다렸던 사건들에 대한 언급은 완전히 침묵 속으로 흘러 보냈고, 나는 나의 사역의 원리들을 간단하게 발표했으며, 그다음, 나를 부추겼던 신앙과 공명정대함을 상기시켰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다음 나는 강해 할 본문을 택했는데 그것은 내가 전에(추방 전에) 멈추었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통해 내가 가르치는 임무를 그만두었었다가 보다는 잠시 중단했었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성경을 최고의 본문으로 삼고 상황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대와 상황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죄인 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상황이 설교를 좌우하는 경향이 있으나 칼빈은 성경이 상황을 극복해 가도록 했던 것이다.

 

3) 칼빈은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했다.

 

또한, 칼빈의 설교는 항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섭리를 확신하는 가운데 전달되어졌다. 하나님은 설교자를 위한 권위요 동기일 뿐 아니라, 모든 설교의 자원과 대상이요, 모든 설교의 중심적인 요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삼위적인 충만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매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신다. 그는 신명(神名)을 칭할 때 하나님이라는 포괄적인 칭호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였다. 루터는 매우 의도적으로 성경의 매 대목을 강해 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았다. 루터가 그리스도를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설교한 반면에, 칼빈은 성삼위 구속주 하나님을 보다 더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설교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칼빈은 복음을 제시할 때 하나님 중심적으로 복음을 제시했다. 칼빈은 교회를 중심에 삼고 있는 로마 교회 체계와 사람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자유사상가들의 철학을 배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성삼위의 제 2격위나 제3격위에만 초점을 맞추어 강조하려는 종파들의 잘못된 경향을 논박할 의도도 갖고 있었다. 칼빈은 성령을 중심 삼는 종파는 치명적인 주관주의로 빠져들어가는 제일보를 내디딘 것이라고 확신한 것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에 삼고 있는 것은 휴머니즘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칼빈에게 있어서 모든 영광스러운 충만함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은 모든 설교안(說敎案)의 근원이요 꽃이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중심의 설교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강조에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교리는 마음의 주림을 채워 주는 데 있어서 끈과 같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상처를 싸매는 붕대였다. 칼빈의 사상에 있어서 섭리와 보전의 교리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지를 주목하는 것은 흥미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구별되어 있으면서도, 자주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데 함께 처방되는 일이 흔하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통일된 과정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섭리적이고 구원론적이고, 자연적이고 영적으로 통일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칼빈은 창조와 구속, 곧 성삼위 하나님 안에 포용되어 있는 창조와 구속 속에서 드러난 그 섭리를 힘 있게 전하는 설교자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의 궁극적인 차원은 계시된 뜻이라기보다는 계시되지 아니한 뜻이다. 이러한 관점이 드러나지 아니한 칼빈의 설교는 거의 없다.

칼빈의 목회신학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는 것들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다루시는 모든 행사의 모든 궁극적 비밀을 역시 강조하고 있다. 그는 고통당하는 심령들에게 주권적인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게 가지고 계신 비밀스러운 목적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처럼 좋은 위로는 없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그의 욥기 34:21-26의 설교에서 이렇게 설교한다. “... 우리가 이미 논의한 진술 바로 다음에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완력으로 그러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님을 덧붙여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기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큰 징계가 주어져, 능한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쓰러지고 나라가 적에게 정복당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시행하시는 까닭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공의를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냉혹하게 처리하시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지각할 수 없지만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아는 지식을 활용하여, 여기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만족하게 여겨야 합니다.... 어째서 우리가 하나님의 판단에 대하여 변론하거나, 그 판단이 우리에게 이상하게 보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길을 판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에 동조해야 합니다. 어째서 그러시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행사는 언제나 정당하고 선한 이유를 기초하고 있음을 인식합시다.” 또한 칼빈은 (욥기 1:20-22)의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가 고난 받을 때 까닭 없이 일어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도록 역사하심을 확신할 은혜를 주십사고 기도합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환난을 잘 참아 내게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게 만들 것입니다...”라고 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믿고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가 안식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맹목적인 절망을 꾸짖었다. 삶을 의미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마치 밝혀지지 않은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온전히 다 이해할 것처럼 생각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에 대해 억지를 부리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도가 엿보이는 곳에선 승리에 차서 그 하나님의 의도를 펼쳐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당하는 여러 가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풀려고 애를 쓰거나, 그들의 슬픔을 완벽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가 회중들에게 목회자로서 주었던 위로는 결국한 가지만으로 충분하였다. 다시 말하면 주권적인 하나님의 감추어진 은혜였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신적 난해성(難解性)에 대해 하나님 중심으로 강조하는 것과 함께 선택 교리에 대한 강조가 그의 설교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선택은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광범위하고 사활적인 요점이다. 그것은 하나의 신학적 파편이거나, 성경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또한 본문이 요구할 때만 간헐적으로 언급된 것도 아니다. 모든 설교에서 이 선택 교리는 은연중에 깔려 있고, 하나의 분명한 선()으로 자주 힘 있게 두드러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예정론의 입장에서 모든 거짓된 교리를 논박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로마교회의 근본적 오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문제였던 반면에, 칼빈에게 있어서 로마교회의 근본적 오류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주도권을 준다는 점이었다. 셀베투스(Servtus)로부터 재 침례파 등, 칼빈에게 정죄당한 모든 사람들은, 다른 실수는 고사하고라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높이고 선택을 거부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것이 결국에는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이 기각당한 것이다.

칼빈이 선택을 설교한 방식,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다. 그것은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Heidelberg Catechism)이 정의하는 것과 같다. 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을 사람의 죄와 비참에 대한 오직 유일한 위로로 전한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추상적이거나 교의학의 한 페이지로 장식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이 은혜와 떨어진 것은 더욱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주권적 은혜가 모든 설교의 테마였던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욥의 고난도 주권적 은혜의 한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칼빈은 (욥기5:17-18) 설교에서 “...언뜻 보기에 하나님께서 상처를 내놓고 그 상처를 치료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평안하고 풍부한 자리에 앉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실까?....

여기서 우리는 이중적 은혜를 엿보게 됩니다...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게 하실 때 우리의 유익을 위하시고, 우리로 회개케 하시며,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에서마저 건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은혜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은혜가 여기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내신 상처를 싸매시고 치료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언급한 바입니다(고전10:1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밖에는 허락지 아니하시며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으로 유익을 얻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유익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해 나갔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그의 설교의 날줄과 씨줄이었다.

 

4) 칼빈은 문답을 사용하여 청중의 이해를 돕는 교육적 설교를 했다.

칼빈은 그의 설교에서 자주 질문을 사용한다. “그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질문하고 그리고 답하면서 그의 강해를 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설교의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질문을 통해 문제를 좀 더 확대해 나가거나 심층적으로 다루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청중이 알아듣고 이해하기까지 반복적인 설명을 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말하면” “왜냐하면” “좀 더 설명하면” “바꾸어 말하면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따라서 문자로 기록된 칼빈의 설교들을 보면, 흔히 한 가지 요점을 전개시켰다가 다시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확인하느라고 되돌아오곤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것은 어떤 요점들을 청중들이 이해하기까지 그 요점을 떠나지 않는 지극한 섬세함을 보이는 대목들인 것이다. 그는 그의 설교에서 재빨리 눈치채지 못하게 이 일을 다루어 가고 있다.

그는 이렇게 청중의 이해를 돕고자 그의 재능을 다 사용하기에 힘썼다. 예를 들면, 칼빈은 그의 십계명 설교(신5:21)에서 죄의 깊이와 멸망케 하는 성격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거듭거듭 설명하고 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단지 하나, 혹은 둘, 아니면 세 가지 정도의 죄만을 지었습니까? 정확히 말해서 일단 우리가 지은 죄의 수를 세기로 한다면, 우리 모두는 지옥에 던지우는 것이 마땅하며, 우리가 당혹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여기에서 우리들이 헤아린 수십만 가지의 죄들은 실상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저지른 죄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죄에는 끝이 없고 또 그것을 헤아릴 만한 방법 또한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한량없으신 긍휼로써 우리를 받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마치 우리가 율법 전체를 다 이루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정말무결한 상태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들을 그렇게 의로운 자들로 여기시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므로, 우리들은 주님을 믿는 그 믿음에 의하여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로 깨달아야 하겠으며, 아울러 주님을 향하여, “주여, 우리의 구원이 당신의 순전하신 선하심과 은총 가운데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영광을 그분께 돌려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의 무수한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또한 우리를 자신의 의의 옷으로 다시 입혀주시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우리들의 연약한 부분을 얼마나 극진히 떠 받쳐 주고 계신가 하는 것을 입증해 보이시는 증거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고로 비단 우리의 욕심이 셀 수 없이 많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고, 또한 우리가 마치 거대한 산들에 의하여 파묻혀 있는 것처럼 엄청난 죄악에 묻혀 있다는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겨 줄 때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너무나 가혹하게 대하시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절망 가운데 버려두시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오히려 우리가 쓰러지더라도 지체 없이 다시 일어나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까닭에 믿는 자들은, 비록 자신들이 정죄된 자리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죽음의 심연에서 건지시고 또 우리들이 하나님의 순전하신 은혜 가운데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이와 같은 파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설사 우리들이 매일 우리의 몸 안에 수 백만의 죄가 있음을 느끼게 되더라도, 우리가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것을 밀쳐 내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죄를 멀리 할 것을 권고하는 가운데, ‘너희 안에 죄가 거할 곳이 없도록 하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죄로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죄가 언제나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고 했을 때, 그렇게 말하는 근본적 목적은 우리에게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 대하여 일깨워 주려는데 있으므로, 우리들에게는 죄를 상대로 한 매일매일의 전투가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으며, 이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힘과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보다 더 강건하게 해 주실 것을 그분께 기도하면서 한층 더 뜨겁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칼빈의 자신의 청중들이 충분히 깨달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질문과 함께 다시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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