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4장에서 바울은 사역자들이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 금지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성도를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교만한 것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남을 비판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교만치 말라(고전 4:1-21)
1-5절,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1-2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나님의 복음은 만세 전부터 구약시대까지 감취었다가 말세에 밝히 계시된 비밀의 말씀이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즉 관리인으로서 그 복음을 충성되이 해설하고 전파했다. 신약교회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또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 즉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것이다. 충성한다는 것은 항상 믿음으로 행함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믿을 만한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충성은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이다(갈 5:22).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범사에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한다. 특히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
[3-4절]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사도 바울은 사람의 판단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사람의 이런 저런 판단에 너무 마음을 쓰면 주의 일을 힘있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으며 스스로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성도는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서 자책할 것이 없어야 한다. 바울은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겼다. 우리가 바울처럼 행하면 어떤 환경 처지에서도 낙망치 않고 주의 일을 담대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의 큰 전략의 하나는 하나님의 일꾼들의 힘을 빼어 하나님의 일을 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낙망은 큰 시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말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며 충성해야 한다.
[5절]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는 말씀은 두드러진 이단 사상이나 도덕적 오류도 판단치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 것은 지적하고 책망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여기에 판단치 말라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점들,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진실성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들은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므로 그가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까지 우리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고 철저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때 주의 선하고 충성된 종들은 위로와 칭찬을 받을 것이며, 악하고 불충성된 종들은 책망과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 때까지 우리는 드러나지 않은 점들을 거론하여 남을 비난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충성의 여부와 충성의 정도를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드러난 이단 사상과 오류는 지적되어야 하지만,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주님께 다 맡겨두면 된다. 주께서 완전히, 철저히 판단하실 날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복음의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한다. 또 우리는 사람의 충성의 정도 같은 드러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공의로 심판하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6-8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라
[6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말씀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라](전통사본)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종들에 불과하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성도는 그들을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그들을 지나치게 생각해 자랑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지 말고 자신의 무익함을 항상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역자들을 높이어 파당을 만들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지켜야 한다. 성도는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대적하는 자리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교만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의 큰 결함이다. 그것은 마귀의 죄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크게 생각하며 자기의 위치를 벗어난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고 자기 위치를 지키며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한다. 참된 성도의 모습은 온유하고 겸손함에 있다.
[7절]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누가 성도를 세상 사람들 중에서 구별하였는가? 또 누가 직분자들을 성도들 가운데서 구별하였는가? 이 모든 것을 구별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여 구원하셨고 또 우리 가운데서 어떤 이들에게 교회의 직분까지 주셨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직분은 우리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주신 것들이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도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세상을 떠나갈 수밖에 없다. 건강도 우리의 것 같지만 하루아침에 그것이 우리를 떠나갈 수 있다. 부모님도,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다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섬기게 된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 죄사함 받고 천국과 영생을 기업으로 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성령을 받은 것 등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모든 영적인 것들과 육신적인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본래부터 우리의 소유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은 남의 것을 가지고 자기의 것인 것처럼 자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자랑해야 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만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8절]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노릇하기를 원하노라.
고린도 교인들은 물질적 부요함과 풍족함, 또 하나님 나라의 자유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높아져 서로 분쟁하고 파당을 만든다면 그들의 그 부요와 풍족, 그 자유와 특권은 복이 되지 못한다. 차라리 사람을 겸손케 하는 가난과 속박이 그들에게 복이 될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교만은 큰 죄악이다. 우리의 가진 모든 좋은 것은 다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것이다. 바울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진 그 무엇도 자랑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9-13절, 바울의 낮아짐
[9절]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사도 바울의 형편은 고린도 교인들의 형편과 정반대이었다.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선택하시고 복음의 말씀을 맡기시며 기적 행할 능력을 주신 자이며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귀한 직분이었다.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이었다(엡 2:2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존귀한 직분인 사도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다. 가장 존귀한 자를 가장 미천한 위치에 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상의 구경거리, 천사들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
[10-13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 일행의 비천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미련한 자가 되고 약한 자가 되고 비천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가 전한 그리스도 때문에 지혜를 얻고 힘을 얻고 존귀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이 인류의 구원이 되었듯이, 주의 종들이 비천함을 당하며 이룬 사역들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복에 이르게 한 것이다.
바울은 그때까지 그의 일행이 당한 고난을 증거했다. 그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없었고 매맞았고 거처할 곳이 없었고 손으로 일했고 비방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축복하였고 참았고 권면했다. 바울은 자신들이 한 마디로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비천함에 두신 것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그들로 겸손케 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확실히 가난과 고난은 사람을 겸손케 만드는 장점이 있다. 둘째로, 그것은 그들로 하나님과 내세에 소망을 견고히 두게 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가난과 고난은 육신적 쾌락의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풍족함보다 장점이 있다. 셋째로, 사도들의 가난은 믿음이 어린 신자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한 뜻도 있을 것이다. 넷째로, 그것은 복음 사역자의 길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것임을 증명하고 또 그가 전한 진리의 진리 됨과 진리 운동이 육신의 양식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증거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상에서 높아지고 존경을 받고 부유해지고 존귀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세상의 영광이 헛됨을 밝히 말씀해 주셨다(전 1:2-3; 사 40:6-7).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약속하신 새 세계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 현재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계 21:5). 장차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올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헛되고 무가치함과 오는 세상의 참된 가치를 알고 하나님 중심, 진리 중심으로 살아야 하며,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내세의 소망 안에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려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셨고 주께서 세우신 사도들과 전도자들도 많은 고난을 당했다. 바울 일행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었다. 그들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부귀 영광을 구하지 말고 우리의 소망을 내세에 두고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자.
14-21절, 나를 본받으라
[14-16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사도 바울이 자신의 비천한 형편을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을 부끄럽게 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면하기 위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다.
사도 바울은 스승이라는 말과 아비라는 말을 구별하여 사용한다. 스승은 단순히 이미 믿은 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아비는 처음 전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 자를 가리킨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전도를 통해 설립되었다. 그는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 좋은 선생도 사랑을 가지고 가르친다. 그러나 아버지는 많은 선생들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가르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하였다. 그것은 그의 낮아짐, 그의 비천함, 그의 겸손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첫째 문제점은 높은 마음에서 생긴 분쟁과 분열이었다. 그들은 이제 높은 마음을 버리고 자신들을 낮추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울이 당한 비천함을 듣는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7-21절]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생생하게 확증할 한 사람을 그들에게 보내었는데, 그는 디모데이었다. 그는 사도 바울이 주 안에서 아들같이 사랑하는 신실한 사역자이었다. 그는 사도 바울과 함께 전도활동을 했으므로 각처 각 교회에서 그의 가르친 바들과 그의 행한 바들을 그들에게 증거하여 줄 수 있을 것이다. 디모데의 증거는 고린도 교인들이 겸손을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 신앙을 가지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그들에게 나아가 교만한 자들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말한다. 사람은 말로는 가장 고상한 이상을 논할 수 있고 가장 고결한 윤리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말뿐이라면 공허하다. 말과 실제는 다르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전력의 힘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듯이, 말은 이론이요 힘은 실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말씀은 곧 능력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능력의 나라이다. 그 나라에는 생명의 힘이 일한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이론만 있지 않고 또한 실제적 삶이 있다. 참된 교회에는 교인들의 바르고 선한 인격과 삶이 있고 또 그들의 거룩한 헌신과 사랑의 봉사가 있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단지 교사로서가 아니고 그들을 낳은 아버지처럼 그들에게 감히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한다. 그는 그들에 대한 큰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서 성도들의 변화된 삶을 보기를 원한다. 참된 구원은 단지 아름다운 말에 있지 않고 변화된 인격과 삶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심으로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구원 진리는 변화된 인격과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도 바울을 본받고 또 남에게 본이 되기를 기도하고 힘쓰자.
[욥기 35장 설교말씀] 사람의 선악이 하나님께 영향을 주지 못함(욥 3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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