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3장에서는 성도들이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의 정치 권력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믿지 않는 이웃들에게 어떻게 성도들이 행동해야 할 것인지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까지 주님의 뜻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또한 이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거짓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그들의 말에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아닌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과 단절해야 합니다.
성도의 선행(딛 3:1-15)
1-7절, 선행과 구원
[1-2절]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은 세상의 권세자들 곧 위정자들을 가리킨다. 성도는 세상 위정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해야 한다(롬 13:1).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유익과 질서를 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사자’이며 ‘하나님의 일꾼’이기 때문이다(롬 13:4, 6).
또 성도들은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해야 한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선행은 성도의 필수적 열매이다. 또 성도들은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어야 한다. ‘훼방하는 것’은 그릇되이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관용하다’는 원어(에피에이케스)는 ‘친절하다, 온유하다’는 뜻이다. 성도는 친절함과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어야 한다.
[3절]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본문은 앞에서 교훈한 성도의 선한 삶의 이유를 보인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이었다. 바른 생각도, 바른 깨달음도 없었으며,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도 없었다. 또 우리는 ‘순종치 아니한 자’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뜻에,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다. 또 우리는 ‘속은 자’이었다. 우리는 마귀의 말에 속았고, 세상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속았으며, 심지어 우리 자신의 어리석고 혼란한 생각들에 속았었다.
또 우리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이었다. 우리는 정욕과 쾌락의 종이었다. 하나님 없는 자는 세상이 그의 하나님이요 돈과 정욕과 쾌락이 그의 가치이다. 죄는 이와 같이 인간을 어리석고 허무한 데 빠지게 하며 자신을 소모시키고 멸망시키게 한다.
또 우리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이었고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다. 이것들이 구원받기 전의 모든 인생의 상태이었고, 구원받은 후에도 때때로 우리 속에서 머리를 드는 죄악성의 내용들이다. 구원받기 전의 인간관계는 한마디로 서로 싸우는 질투와 미움과 악독으로 얼룩져 있었다.
[4-5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력해 있었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다. ‘자비’라는 원어는 ‘선하심, 인자하심’이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은 예수께서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나타났다. 그러나 경험적으로는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받았을 때 각자에게 나타났다.
우리를 ‘구원하시되’라는 원어(에소센)는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으로 과거 시제이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내는 것으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단번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구원을 받았다. 우리의 죄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었다. 그가 우리의 모든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않으셨다. 실상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누더기 옷에 불과하였다. 이사야 64:6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말하였고, 또 예레미야 17:9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하여져 있다. 성경과 인류 역사가 이것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이루어졌다. 우리의 구원은 그의 긍휼의 결과이었다. 하나님의 긍휼, 그의 은혜, 그의 선하심과 사랑은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원천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체적으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중생(重生)은 다시 남을 말하며 그것은 죄씻음으로 이루어졌다. 죄로 인하여 영혼이 죽었었기 때문에 죄씻음을 통해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났다. 죄씻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이루어진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셨을 때 우리가 중생케 되었고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곧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동일한 구원 사건이다. 구원은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6-7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신 결과이었다. 그리스도의 대속사역과 그가 이루신 의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부족하거나 메마른 영이 아니시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신 영, 은혜 위에 은혜요 진리 위에 진리인 충만하신 영이시다.
성령께서 풍성히 우리 속에 오셔서 이루신 첫 번째 구원의 일은 의롭다 하심이었다. 구원은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이다. 또한 구원은 영생과 천국, 곧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소망 중에 영생을 얻었다. 영생의 원리는 우리 속에 이미 심겨졌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누림은 아직 미래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천국에서 영광스런 영생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성도는 선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를 예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남을 그릇되이 비난치 않고 다투지 않고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과거에는 어리석고 반항적이며 악하고 이기적이고 남을 미워했던 가증한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구원을 받았다. 그 구원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이며 영생을 얻고 천국을 기업으로 이어받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 위에서도 구원받은 자답게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이제는 헛된 것을 위해 살지 말고, 정욕과 육신적 쾌락을 위해 살지 말고 세상 욕심 때문에 다투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과 성경말씀에 불순종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여 그 뜻대로, 성경말씀의 교훈대로 선하게 살아야 한다.
8-15절, 선한 일에 힘쓰라
[8절]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선행에 대한 교훈과 그 이유에 관한 말씀이다. ‘미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구원하심, 곧 무지와 불순종과 행악과 미움의 상태에서 건져내심과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과, 이 땅 위에서의 선한 삶에 관한 말씀은 믿을 만한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디도는 이것들, 즉 방금 말한 교훈 곧 죄로부터 건짐을 받아 의의 삶, 선한 삶을 살라는 성경적 교훈에 대하여 굳세게 말해야 했다. ‘굳세게 말한다’는 원어(베바이오오)는 ‘확신 있게 말한다, 강하게 주장한다’는 뜻이다(BDAG). 하나님의 믿을 만한 이 진리의 말씀들을 확신 있게 말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야 할 목적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었다. 교훈의 목표는 선한 일을 힘쓰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목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선한 일에 열심 내는 친 백성이 되게 하셨다. ‘조심하여’라는 말은 성도가 조심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악에 떨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선한 일인가? 디도서에서 많이 나오는 ‘선하다’는 원어(아가도스, 칼로스)는 ‘선하다, 유익하다, 좋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한 일들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다.’ 성도가 힘써야 할 선한 일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의 각 방면에 많이 있다. 구원받은 성도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표는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이다. 성도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속이지 말고 뇌물 같은 것을 받지 말고, 남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9절]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확신 있게 말해야 할 말이 있는 반면, 말하지 말아야 할 주제들도 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 등이 그것이다. 그런 것들은 ‘피해야’ 한다. 그것들은 듣는 사람들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헛된 것이다. 물론, 논쟁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필요한 논쟁도 있다. 바른 교리를 규명하고 확증하는 교리적 논쟁은 필요하다. 그것은 선한 싸움이다. 오늘날처럼 자유주의 신학과 연합운동과 신복음주의와 은사주의가 교회들 안에 가득한 때에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타협주의와 싸우고 은사주의에 대한 경계를 주장하는 것은 필요한 싸움이다.
[10-11절]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 . .
바울은 또한 말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이단에 속한’이라는 원어(하이레티코스)는 ‘당파적인, 이단적인’이라는 뜻이다. 실상, 교회는 하나이다. 하나님의 진리도 하나이다. 그러나 오류들이 교회에 침입해 들어왔다. 잘못된 생각들이 교회 안에서 지지자들을 얻었고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사탄의 미혹이며 인간의 무지와 연약이다. 그래서 이단이 생기고 잘못된 당파가 생겼다.
‘한두 번 훈계한 후에’라는 말은 이단과 당파의 잘못을 먼저 지적하고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그때 거기에 빠진 자가 돌이키면 문제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사상이나 행위에 있어서 실수와 부족이 있을 수 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과 부족을 깨달을 때 거기서 돌이키는 자는 깨끗함을 받는다. 그러나 한두 번 훈계한 후에도 돌이키지 않는 이단자와 당파적 인물은 성도가 멀리해야 할 자이다. ‘멀리하다’는 원어(파라이테오마이)는 ‘받아들이지 않다, 거절하다, 피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단과 오류를 버리지 않는 자들과 계속 교제하는 것은 그 악을 인정하는 것이든지 그 악에 물드는 일이다. 이 경우, 성도 개인과 교회 회중의 순결을 위해 교제를 단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멀리하는 것은 소극주의가 아니다. 이단자들이나 오류에 빠진 자들과 멀리하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른 방법이다.
‘네가 아는 바와 같이’라는 원어는 ‘이러한 사람이 . . .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라’라고 번역해야 한다(NIV). ‘부패하다’는 원어(에크스트레포)는 ‘심히 비뚤어지다’라는 뜻이다.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라는 원어(온 아우토카타크리토스)는 ‘스스로를 정죄하면서도, 자책하면서도’라는 뜻이다. 한두 번 훈계해도 고치지 않는 이단자들은 심히 비뚤어져서 스스로를 정죄하면서도 죄를 짓는 자들이다. 그들은 강퍅한 심령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무지해서, 실수로 죄를 짓는 자들이 아니고,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완악한 심령으로 죄를 짓는 자들이다. 민수기 15:30는 이런 자를 ‘짐짓 악을 행하는’ 자로 묘사하였고, 히브리서 10:25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것으로 묘사했고, 요한일서 5:16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다고 본다. 바로 이단들은 이와 같이 성경 진리와 교훈을 알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고의적으로, 심히 완악한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
[12-14절]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때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過冬)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바울에게는 아데마와 두기고 같은 동역자들이 있었다. 또 그는 디도가 속히 오기를 원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니고볼리에 있고 거기에서 겨울을 지내려고 작정하고 있다. 니고볼리는 아가야 지방 서쪽 해안에 있는 도시이었다. ‘교법사’라는 원어(노미코스)는 ‘율법사, 법률가’라는 뜻이다. 세나는 율법을 연구한 자이었던 것 같다. 아마, 세나와 아볼로는 다 성경에 능통한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경비가 다 떨어졌던 것 같다. 바울은 지금 그들로 궁핍함이 없도록 속히 보내라고 디도에게 부탁한다.
바울은 교인들이 선행을 힘쓰기를 배우게 하기를 원하였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악을 행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므로 선을 행해야 할 줄은 알지만, 선을 행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또 행할 능력도 부족하다. 마치 갓난아이가 홀로 서기나 걷기가 힘든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선행을 배움으로써 선행을 힘쓸 수 있다. 선행은 신앙의 열매이다. 선행이 없는 자는 열매가 없는 자이지만, 선행이 많은 자는 열매가 많은 자이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구원은 좋은 생명, 새 생명의 씨이다. 이제 이 좋은 새 생명은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 기대된다.
무엇이 선행인가?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여기시는 선행은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이다. 이 전도의 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자를 세우고 훈련시키고 후원하는 것은 가장 귀한 선행이다. 많은 전임(專任) 전도자들이 일어나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을 가감 없이 전파하고 오늘 시대의 배교적 풍조와 타협치 않고 충성되이 일할 일꾼들이 많이 필요하다. 교회는 그들을 훈련시키고 파송하고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그것은 진실한 성도들이 맺어야 할 좋은 열매들이다.
[15절]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성도들의 상호 문안은 아름다운 일이다. 바울과 함께한 자들은 그와 함께 디도에게 문안하였다. 바울은 또 디도도 바울과 함께한 자들에게 문안하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하였다. 인간 바울은 연약한 자이지만, 그가 받은 사도의 직분과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 때문에 성도들은 그를 사랑하였다. 오늘도 진실한 성도들은 진실한 종들을 사랑할 것이다.
우리는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 구원의 목표는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하나님의 뜻하신 세계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전도는 모든 성도가 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요하고 선한 일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전도 사업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는 이단과 오류를 회개치 않고 고집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거절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이단과 오류에 빠진 자들과의 교제는 개인과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다. 이단자나 오류에 빠진 자를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는 것은 결코 소극주의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유일한 바른 방법이다.
[고린도전서 9장 성경 좋은 말씀] 스스로 자유를 제한함(고전 9: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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