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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사] 한국의 선교 역사의 시작

복음의 능력 2020. 12. 3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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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 선교사 중에서 한국의 선교 역사의 시작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은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전도를 하여 기독교가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렇게 도움을 받던 한국교회가 이제는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미국도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도 그에 못지않게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한국의 선교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도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의 선교 역사의 시작

 

초기 한국교회 선교와 네비우스선교전략… 자전자치자립 원칙

 

현재 1646명의 한인 선교사들이 163개국에 파송돼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세계 개신교 선교사 201260명 중 한인 선교사의 비중은 약 5%에 달한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선교는 파트너십 및 네트워크 부족 등으로 인해 적잖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선교 전문가들은 한국교회의 선교동력을 '자전''자치''자립'이라는 삼자 원칙과 성경 중심으로 대표되는 네비우스 선교전략(본보 13일자 33면 참조)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보는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사무총장 강승삼 목사의 도움말을 통해 초기 한국교회가 네비우스 전략을 어떻게 선교현장에 적용, 부흥의 주춧돌을 놓았는지 알아보고 교파교단을 초월한 하나님 안에서의 선교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초창기 한국교회(19071937)는 네비우스 선교전략을 국내에서는 물론 선교지에서도 철저하게 적용하려고 애썼다. 따라서 일본 만주 시베리아 중국 등지에 파송된 한인 선교사들은 타교단과의 협력시스템 구축과 현지 성도들의 자립정신 구현에 힘써 섬김의 선교라는 토대를 형성해나갔다.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초기 선교 모습을 제주도 일본 만주 시베리아 중국 등지로 나눠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 제주도 선교=한국 장로교회는 독노회를 조직한 다음날인 1907년 9월 18일에 전도위원회를 외지 전도국으로 변경, 국원 12명을 선정한 뒤 처음으로 목사 안수받은 7명 중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견하면서 봉급 및 필요한 경비를 전국 노회 차원에서 부담하기로 작정했다. 따라서 제주도 선교는 모든 장로교회가 기도와 물질로 동참한 첫 타문화권 선교였다. 또 목사 전도사 평신도 학생 및 현지 성도들이 함께 한 팀사역이었다.

 

초기 일본 선교=독노회는 한석진 목사에 이어 임종순 목사를 도쿄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일본 선교 또한 삼자 원칙에 따라 진행됐다. 예를 들어 일본 고베 신학교 유학생들은 전도에 힘썼으며 고베 예배처소는 현지 성도들의 헌금으로 운영됐다. 19209월 총회는 매월 셋째 주일을 정해 총회 소속 전국 모든 교회가 일본과 시베리아 선교를 위해 헌금토록 결의하고 실천했다. 1933년 총회는 일본 선교비를 400원으로 삭감할 정도로 일본 현지 성도들의 자립 정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또 일본 선교는1912~1927년까지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사역으로 진행됐다. 그 결과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가 주관해 도쿄 간사이 규슈 세 지방으로 구분해 선교에 힘써 1932년 당시 일본 내 교회수는 46개로 성장했으며 시무하는 목사는 18명, 기타 교역자 7명, 신자는 2414명, 세례교인은 826명에 달했다.

 

초기 시베리아 선교=목사 전도사 등을 보내 함께 팀사역을 했다.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협력했다. 하지만 선교사를 파송해 놓고 한국교회가 재정 후원을 지속하지 못해 선교사가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초기 만주 선교=한국교회는 1901년부터 1945년까지 100명 이상의 선교사를 공식적으로 만주 땅에 파송했다. 그 결과 6개 노회가 조직됐다. 선교사들은 팀사역과 함께 서양 선교단체들과도 협력사역을 펼쳤다. 미국 선교사들은 만주 한인교회 방문, 사경회를 인도했으며 각 선교회가 협의해 지역분할 선교정책을 펼쳤다.

 

초기 중국 산둥성 선교=네비우스 선교사가 실패한 산둥성에서 한인 선교사는 네비우스 방법론에 따라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초기 한인 선교사들이 한자권에 충분히 숙달돼 있었으며 겸손하게 현지인들을 섬겼기 때문이다.

 

1913년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들이 3년간 언어를 배우면서 래양현 서문내에 복음당을 설립한 이래 1916년 교인의 총수가 40여 명에 달했다. 19211935년 지방 보조비 명목으로 20003300원을 보조받다가 19351942년 절반 이상 삭감된 것을 보면 현지 교회의 자립 정도도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선교사들에게 훈련받은 중국인 성도들은 스스로 가가호호 방문, 복음을 전했으며 성경적 청지기 직분론을 강력히 실천해나갔다. 1923년 당시 십일조 성도가 9명이나 됐다. 선교사들은 매주 4일씩 16개 처소 성경공부반을 운영했다. 그중 1개 처소는 중국 관리들을 위한 성경공부반이었다. 20여 명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물질과 노동을 통해 교회를 헌당하기도 했다.

또 김순호 김윤식 주현직 등 한인 선교사들은 여성 사역과 자비량 진료 사역에 힘썼다. 방효원 홍승한 방상순 이대영 등 한인 선교사들은 중국 래양에 교회사역자 양성을 위해 3년제 성경학교를 설립했다. 1922년 제11회 총회에서 허락받아 시작된 이 성경학교에서 매년 1528명의 학생들이 공부했다. 특히 한인 선교사들이 지역분할 정책을 적용함으로써 중복투자와 다른 선교부들과의 갈등에서 벗어나 효율적인 선교를 담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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