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아모스 8장 강해 설교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면
성경 본문: 암 8:11-14
구약의 선지자 '아모스'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있었던 때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역대 어느 왕보다 정치를 잘했고, 무엇보다도 경제를 발전시켜 국력을 신장시킨 훌륭한 왕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그를 솔로몬 이후 최고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발전했지만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빈부의 격차가 너무 심했습니다. 나라의 부가 극소수의 권력과 부유층에 사람들 소유였지, 일반 서민들은 오히려 살아가기가 더욱 어려웠고, 극빈자들의 생활은 비참하기가 이루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정치를 지도하는 사람들은, 불의한 생활들을 했고, 그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한 일들을 거침없이 자행했습니다. 또 부유층의 사람들은 극도의 사치와 향락에 빠졌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몰인정하게 대함으로, 부자들의 포학이 극심하였습니다. 또한 그 당시의 종교인들은 타락과 부패에 빠져있었으며, 이러한 사회상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은 밑바닥을 살아가는 가난한 서민층에게는 참으로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일이며, 어디를 가든, 그 누구를 바라보든, 아무런 기대와 소망이 없었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경제가 융성하고 나라가 강대해진다고 해도 그 힘과 그 풍성한 결과는 다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국민이 잘 살게 돼야 합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잘 살고, 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저 밑바닥, 인생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담한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국민 대다수는 불만에 싸여 있었고, 포학과 부정과 타락상을 목격하면서 심한 번민과 갈등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뜨거우신 사랑이 선지자를 그들 앞에 보내시게 되었고, 아모스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묵시와 말씀을 용감하게 위정자와 백성들 앞에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과연 '양식이나 물이 없어' 기갈을 당했던 때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들을 수 없어서 기갈을 당한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탐욕과 타락과 향락에 깊이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따르지도 아니했습니다.
먹을 것은 풍성하나, 진리의 말씀은 기근을 당했습니다. 풍요로운 물질들은 있었으나, 영적인 만족은 없었습니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었으나, 영적 시각은 캄캄하게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그것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사람들에게 올바른 판단력을 주며, 또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도 없고, 또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말씀이 없음으로 당한 국가적인 위기였습니다.
저는 요즈음 신문에 보도되는 일련의 큰 사건들을 보면서 지금 우리나라는 아모스 때와 비슷하다 하고 생각되였습니다. 일부 재벌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돈만 많이 벌겠다는 지나친 탐욕은 사회와 국민에 대한 포악입니다. 또 일부 정치인들이 뇌물 같은 것을 수수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범죄입니다. 또한 오늘날 종교인들이 이와 같은 불의한 처사들을 보면서 말하지 아니하고, 그런 일을 큰 문제로 보지 아니하는 태도도 무책임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언자적 양심과 열정을 가지고 이러한 사회적 비리와 부정을, '문제로 의식해야 하고', 기도하고, 또한 겸손히 충고하고 규탄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그 당시에 그 일이 예언자로 부름 받은 자기의 사명이라고 깨닫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부르짖는 예언자가 됐습니다. 그는 원래 드고아라는 벽촌에 살며, 양을 기르며 뽕나무를 재배하는 순박한 농부였습니다. 이 이름 없는 순진한 농부가 자기의 농산물을 팔기 위하여 여기저기 큰 도회지를 두루 다니며 도시 사람들의 생활을 볼 때, 그는 충격과 울분과 반발과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오로지 돈을 버는 데 혈안이 된 장사꾼들이 저울과 됫박을 속이며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있었으며 관리들은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고 있었고, 이런 것들을 뻔히 보면서 오히려 묵인하고 두둔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극도의 향락과 과소비로 계층 간에 위화감을 갖게 하는 부유층의 여성들, 그러한 부패와 타락상을 보면서 아모스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목표를 찾게 됐습니다.
그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여호와를 찾으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암 5:6) 그리고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암 5:24)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오늘과 같은 세대의 하나님의 교회가 해야 할 사명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메시지가 아닐까 하고 느끼게 됩니다. 물론 아모스 세대와는 달리, 이 시대는 매스컴들이 이런 사명은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런 것을 문제로 '의식하는' 그 의식을 가지고 바른 길을 찾기 위해 생각하며,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뜨거운 기도가 무엇보다도 먼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개인뿐만 아니라, 정부나 국가가 잘못하는 죄, 그리고 사회 전체가 저지르는 사회적인 부정과 불의를 예민하게 의식하고, 거기에 대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우리도 별수 없이 사회악에 물이 들거나 희생을 당하는 존재밖에 될 게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이 '도덕적 위기', 이 걷잡을 수 없고, 개인이 감히 손을 댈 수도 없는 엄청난 부정과 범죄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까? 정부는 정부대로, 법은 법대로, 위정자는 위정자대로 같은 고민을 가지고 애를 쓰고 있지만, 그러면 여러분 이런 때 교회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그 말씀을 따르는 일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아모스도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살 길이 거기 있습니다.
우리의 살 길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 나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5:4-) 물질을 우상시하여, 그것 때문에 자기의 인격과 신임과 양심을 팔아먹는 일, 한도 없는 탐욕 때문에 국민과 국가를 저버리고 간교한 수단으로 제 욕심만을 채우려는 일, 그것은 정녕 사로 잡히겠고, 그것은 모두 허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살기 위해서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5:14)고 했고 '너희는 악을 미워하며 선을 사랑하고 성문에서 공의를 베풀라.'(5:15)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는, 가시적으로 나타난 부정과 비리와 범죄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 않는 데 있고, 그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외치는 자가 많고, 온갖 전달 매개체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들려져도, 이것을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수십만 개의 교회가 있고, '1,200만'신자가 있고, 수천만 권의 성경이 팔리고, 훌륭하고 타당한 설교가 전해져도, 여러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따르지 아니하면' 그것은 말씀 풍년 중에 말씀의 기갈입니다. 따르지 않으면 결국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 왜 사람들은 말씀을 따르지 아니할까요?
첫째는 듣지를 않아서 그렇습니다. 아이의 듣지 않는 것은, 길바닥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밭이 아스팔트 바닥같이 굳을 때로 굳어져 있는 한 싹도 트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사욕의 스승이 있어, 주관이 있고, 고집이 있고 나름대로의 삶의 철학이 쫙 자리 잡고 있으면, 말씀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사욕의 스승입니다. 그래서 바른 교훈을 듣지 않고 언제나 자기 욕심에 더 기울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딤후 4:3) 그러나 사욕의 스승이 시키는 대로 가게 되면, 필경은 멸망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건성으로 읽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의 문을 열고 자세히 보시면, 이 성경에는 우리 사람의 구체적인 세부사항들의 지침까지 다 상세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가령 '뇌물'을 받지 말라 하는 말씀도(출 23:8), 신 16:19, 삼상 8:3, 12:3, 전 7:7, 사 1:23, 미 7:3) 적어도 8번 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 23:8)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건만, 당장 자기 수중에 들어오는 돈이, 자기 눈을 멀게 하고, 자기 말을 굽게 하는, 그것보다 더 귀한 것으로 보게 만드는 것이지요. 가치관을 전도시키고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욕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뇌물이야 인간사회에 어디나 있는 '관행'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자기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마는 것입니다. 공무원의 의식조사에서 뇌물을 죄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한 것이 63%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도외시하고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는 건성으로 들으면 안 됩니다. '삼가 들어야' 합니다. '삼가 듣지 않으면'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말 살 길은 또 우리가 당장 눈앞에 돈 몇 푼보다 더 복되고, 가치 있고, 유익한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는 데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들으십시다. 그리고 사욕의 스승은 쫓아내여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으로 사는 길입니다.
둘째는 듣기는 듣는데, 선뜻 하나님의 말씀에 동감하고 동의하지 않아서 우리는 그 말씀대로 따르지 못합니다. 거기에 우리 인간들의 어려움이 있고 또한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알지만, [아는 것은 아는 거고], 그러나 동의는 못하겠다.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천사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느냐?' 그럴 것입니다. 사실 현실을 보면,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동의하게 되지 않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인간이 땅에 살고, 혈육을 가졌고, 죄악 속에 사는 데 그래서 적당히 타협도 해야 하고, 피치 못할 입장과 사정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알기는 제가 압니다. 그러나 이번만 봐주십시오. 이것만은 이해해 주십시오!' 그럴 때가 왜 없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약한 것을 아시고, 이해하시고 동정하시고 용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탄식하시면서 '너희가 맘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며 용기 있게 따라가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라!' '그래야 진정 너희에게 유익이라!'라고 타이르시고 가르치십니다. '결국 무엇이 유익인지 너희는 알아야 한다. 크게 너희의 신앙이고 결단이며 구원과 축복의 길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실이 그렇다고 하는 것을, 왜 내가 모르겠느냐? 그러나 너희들이 신자라면, 내 백성이라면, 내 자녀들이라면, 나는 너희가 '내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그것을 나는 알고 싶은 것이다.'(신 8:3)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동정만 자꾸 받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쁘고 만족하게 해 드리시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결단으로 각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다만 한 가지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요, 축복과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자란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사모하시고 사랑하시며 거기에 내 생각을 같이 하시고, 전적으로 그러하다고 동의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셋째는 그러면 우리가 말씀에 아멘 하고, 동의까지는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적용해야 될까? 그게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다양하며, 오늘의 사회는 너무나 조직적이고 복잡하기 때문에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는 하지만, 이것을 체계화해서 교리적으로 다시 배우지 아니하면 실제적인 적용과 실천이 막연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배워야 됩니다. 정말 우리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생활 전선에서 어떻게 사는가? 무엇을 결단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말씀대로 한 것인가? 누가 그것을 일일이 알려주고 판단해 주겠습니까? 쉬운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라고 못하게 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귀에게 송두리째 빼앗겨 버리게 된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음식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내가 그것을 먹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말씀도 실천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내 것이 안 됩니다. 적용은 하나님의 보배로우신 말씀을, 내 소유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작업입니다. 말씀을 적용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온전히 말씀대로 따른 사람입니다. 이것을 매일 매시 매 순간 계속하는 것이요, 생활화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가능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그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분의 지도와 도우심을 받을 때에 이 모든 일은 다 가능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요 14:26)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생활을 인도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다. 그분을 의지합시다. 그때그때마다 성령이 인도해 주시고, 알게 하시고, 결정하게 하시고, 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도 주십니다. 우리가 매일 고달픈 인생의 순례를 기쁘게 감당할 수 있는 까닭은 성령의 영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일은 성령의 인도로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면, 그 영혼에는 언제나 만족이 없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아무리 많아도 영적 만족이 없습니다.
그 영혼은 언제나 주리고 목마릅니다. 또 우리가 말씀의 기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성결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기준, 철학, 처세가 아무리 그럴듯해도, 그런 것으로 도덕이 성결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지혜와 명철이 있고, 인생의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도, 말씀에 의지하지 않으면, '영적인 시야'가 열리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 만이, 영적 시각을 뜨게 하여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일은 이렇게 허망하고 비참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르는 일은 복되고 유익하고 아름답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세상은 금방이라도 천국으로 화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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