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디모데후서 4장 주일설교말씀] 겨울 전에 어서 오라(딤후 4:1-22)

복음의 능력 2021. 6. 1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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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디모데후서 4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속히 올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 달려갈 길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겨울이 오기 전에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겨울이 오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날이 오기 전에 영적으로 깨어 열심히 주님의 뜻을 전파하고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목: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딤후 4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디모데후서 4:1-22

 

요절: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딤후 4:21)

주제: 순교를 준비하는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디모데에게 속히 올 것을 요청

 

10월 첫 주일입니다. 성찬주일로 지킵니다. 이번 10월은 “개혁의 달”로 지키면서 오직 성경만으로, 오직 믿음만으로, 오직 은혜만으로, 오직 교회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교회 개혁을 마틴 루터가 시작한 달로 지킵니다. 또한 이번 주일은 한국의 추석(한가위, 중추절)이요 성경적으로 장막절(초막절 Feast of Tabernacle, 티쉬리 15-22일)입니다. 코로나로 많은 분들이 예년만큼 고향을 찾지 못해도 한가위는 한해의 추수를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가족이 모여 친교를 나누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신앙 유업을 추모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부터 장막절(초막절)이 시작되어 이번 주 토요일 저녁까지 지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광야 40년 동안 초막을 짓고 지내던 때를 회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레 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다섯 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35 첫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36 이레 동안에 너희는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디모데후서 4장을 강해합니다. 사도바울의 마지막 편지로 순교 직전 유언과 같은 서신입니다. 설교자의 목적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으며, 최후의 일각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며 천국에서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고 있다며,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속히 옥중 심방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1. 설교자의 목적(The purpose of the preacher) (딤후 4:1-2)

 

1 그러므로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 곧 그의 나타나실 때에 그의 나라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 앞에서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온전히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1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설교자의 목적과 의무를 엄숙히 명합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부분에서 성경의 목적에 관하여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구원받은 자로 의로운 인격자가 되고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게 하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복음 전파는 모든 그리스인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 일을 엄숙히 명합니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재림하십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임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천국의 영광을 누릴 것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지옥 형벌을 당할 것입니다. 디모데가 전해야 할 말씀은 일차적으로 복음 진리이며 또 ‘바른 교훈’ 곧 바른 교리와 교훈입니다. 속죄의 복음은 성경적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2절의 ‘전파하라(preach, 케뤽손 κήρυξον)’는 것은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설교는 대화나 토론이 아니고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설교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든지 안 듣든지, 그것을 좋아하든지 안 좋아하든지 관계치 말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견해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토론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토론할 것이 아니고 단순히 선포하면 됩니다. 설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목사들이 항상 힘써야 할 일입니다(be instant in season, out of season). ‘항상 힘쓰다’는 원어(에피스테미 ἐπίστηθι epistethi)는 ‘준비하다, 집중하다’는 뜻입니다. 설교는 언제 어디서나 즉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포츠(야구, 농구, 축구, 미식축구 등)에 시즌이 끝나면 off season이 있어 경기가 없습니다. 다만 시즌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며 설교하는 영적인 목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즉 시즌이든 시즌 아니든 방학이 없습니다. 코로나든 자연재해든 어떠한 재앙이든 헬라말로 카이로스 안에 있든(in season, 유카이로스 εὐκαίρως) 카이로스가 아니든(out of season, 아 카이로스 ἀκαίρως) 예배는 지속되어야 하고 설교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호흡을 중단하면 5분 내로 죽어버리듯이 영의 호흡이 중단되면 영의 사람이 죽어버립니다. 코로나 재앙 핑계로 많은 교회의 예배가 중단되고 비대면 예배가 이뤄지고 기도회가 중단이 되면 우리의 신앙도 죽어버립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예배를 드려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설교해야 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도 많은 죄인들이 지옥 곧 영원한 멸망의 불못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또 구원받은 혼(soul)들도 항상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온전히 오래 참으라 with all longsuffering’는 말은 설교가 어려운 일임을 암시합니다. 혼들의 구원과 변화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사탄은 자기 권세 아래 있는 죄인들을 쉽사리 내어주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의 죄와 인격의 결함은 매우 느리게 변화합니다. 전도의 결실이 금방 보이지 않기도 하며 믿는 자들이 연약한 모습들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설교자를 낙망케 하는 요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온전히 오래 참음으로 이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설교는 복음의 선포와 더불어 가르침과 경책함(reprove)과 경계함(rebuke)과 권면함(exhort)을 포함합니다. 말씀을 통해 회개를 하고 야단을 맞고 잔소리 듣는 것이 은혜입니다. 잘못 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깨우쳐 주는 것이 경책과 경계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며 또 교훈과 책망(reproof)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생명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전도와 양육은 서로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다. 구원의 복음의 증거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에 대한 책망과 경계도 필요하고 권면도 필요합니다. 말씀을 깨닫게 하며 야단치시고 혼을 내시는 목회자가 있다면 행복한 일입니다. 말씀과 복음을 시도 때도 없이 전파해야 하는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합시다.

 

2. 설교자의 사명(딤후 4:3-5)

 

3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 것이기 때문이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3절에서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는 원어대로 ‘견디지 못하며’(우크아넥손타이 οὐκ ἀνέξονται ouk anexontai “not endure”)입니다. 설교자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를 힘써야 할 이유는 어려운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고 교회가 곳곳에 세워졌다고 해서, 세상의 미래가 밝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어려운 날이 있을 것을 예언합니다. 물론, 역사상 부흥의 때도 있었으나,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되고 속화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당하는 코로나 재앙은 교회 부흥에 찬물을 껴 언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바른 교훈은 역사적 기독교, 즉 모세와 대언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로부터 전달된 바른 교훈, 신구약 성경책에 밝히 계시된 교훈을 말합니다. 그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와, 윤리 즉 생활 교훈으로 구성되어 우리 신앙의 고향입니다. 바른 교리의 요점은 속죄의 복음 진리입니다. 성경적 진리는 옛적부터 믿어온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른 신학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간이 누구이며 특히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분께서 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는지, 구원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내세의 소망은 무엇인지 등이 그 주요 내용입니다.

 

바른 윤리는 헛된 우상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며 섬기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부모 거역,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심 등의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겸손하고 사랑하며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의 때가 이르면 사람들은 이런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둘 것입니다. ‘귀가 가렵다 having itching ears’는 말은 귀를 긁어주는 말, 곧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들의 주제는 영적이지 않고 세상적이고 육신적이며 개그맨 수준의 우스개입니다. 그것은 육신적 욕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욕망을 충족시킬 스승들을 많이 두어 게임에 중독되고 오락에 빠져 있습니다.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들을 좇을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적 바른 교훈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 대신 헛된 이야기들을 좋아할 것입니다. 4절에 ‘허탄한 이야기’라는 원어(투스 뮈두스 τοὺς μύθους tous mythous)는 ‘신화들’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들입니다. 이것은 재미있을 수는 있으나 무가치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좋아하게 됩니다. 확실한 근거가 없는 예화들이나 과장된 간증들도 이런 유에 해당합니다.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악한 시대에도 목회자는 자기 직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본문은 네 마디의 명령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라. 고난을 받으라. 전도인의 일을 하라. 네 직무를 다하라.” 첫 번째 명령어는 “모든 일에 근신하라 watch thou in all things(σὺ δὲ νῆφε ἐν πᾶσι)”는 것입니다. 목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가 깨어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시대의 풍조에 물들고 영향을 받아 변질되기 쉬울 것입니다. 두 번째 명령어는 “고난을 받으라 endure afflictions (κακοπάθησον)”는 것입니다. 고난을 각오하는 것, 이것이 어려운 시대에 부름을 받은 목사들의 마음가짐이어야 합니다. 마귀의 종들이 세력을 얻고 악한 자들이 앞장서서 분주히 왕래하며 무지한 교인들이 그들을 지지하는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에, 그런 때에는 주의 참된 종들이 고난을 각오하고 죽을 각오도 해야 합니다. 세 번째 명령어는 “전도인의 일을 하라 do the work of an evangelist (ἔργον ποίησον εὐαγγελιστου)͂”는 것이고, 네 번째 명령어는 “네 직무를 다하라 make full proof of thy ministry (τὴν διακονίαν σου πληροφόρησον)”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일차적 직무는 설교입니다. 또 설교의 일차적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는 주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최대의 과제입니다. 물론, 설교는 복음을 전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하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가르치며 경책하며 경계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직무를 다해야 합니다.

 

3. 사명자의 길(딤후 4:6-8)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의 유언적 말씀입니다. 바울은 로마 옥에 갇혀서 순교의 시간이 가까움을 느끼면서 이 마지막 편지를 썼습니다. 6절의 ‘관제’(灌祭, drink offering)는 포도주나 기름을 붓는 예배를 말합니다. ‘부음이 된다 to be offered’는 말은 ‘부어지고 있다’는 뜻인데, 준비된 제물이 기름을 붓고 바로 불을 댕깁니다. 순교 직전의 상황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암시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붓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도자의 길입니다. 목회자, 선교사, 전도인은 복음을 위해 언제든지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부탁하신 말씀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들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에서 ‘증인’이 되리라 ye shall be witnesses는 단어(ἔσεσθέ μου μάρτυρες)는 순교(martyr)라는 말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전도자는 진리를 위해 살다가 진리를 위해 죽기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름을 받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위해 언제든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제단에 올려진 관제와 같은 심정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 복음은 순교자들의 피로 인쳐진 복음입니다. ‘떠날 기약 the time of my departure’이라는 말은 죽을 때를 가리킵니다. 죽음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 즉 천국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영과 혼은 거기서 임시로 거하다가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함께 와서 몸과 결합하여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거주지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7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는 그의 사명의 생애를 세 마디로 표현합니다. “①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② 나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③ 나는 믿음을 지켰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 I have fought a good fight,”는 말은 성도의 생애가 싸움의 생애임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선한 싸움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입니다.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죄악성과 싸우며 세상의 악한 풍조와 싸우며 그 배후에 활동하는 사탄과 악령들과 싸웁니다(엡 6:12). 전도와 설교는 큰 싸움입니다. 바른 말씀의 전파는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일입니다. 사명의 길은 싸움의 길입니다. 진리를 전파하는 것도, 진리를 보수하는 것도 싸움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무슨 싸움이든지 싸움은 언제나 힘들고 피곤해지고 지치기 쉽습니다. 영적 싸움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싸움과 목회자의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입니다.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I have finished my course”는 말은 바울이 어떻게 사명의 길에 충성했는지를 증거 합니다. 바울의 ‘달려갈 길’이란 전도자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명의 일, 곧 전도를 위하여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충성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24에 보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그의 사명의 길에는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면서 그의 일을 다 마쳤습니다. 사명자는 중간에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말고 사명의 목적지를 향해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내가 믿음을 지켰다 I have kept the faith”는 말은 믿음의 귀중함을 증거합니다. 지킬 것 중에 지킬 것은 믿음입니다.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생명이며 보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죄 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파선되고 변질되는 것은 가장 슬픈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온갖 고난 중에서도 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순수한 성경적 믿음을 끝까지 잘 지켜야 합니다.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님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의의 면류관’은 천국에서 누릴 완전한 의(義)를 말합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과 ‘영광의 면류관’(벧전 5:4)이라는 표현들은 영원한 생명과 천국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바울에게 의롭다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장차 심판대 앞에서 최종적으로 다시 의롭다고 선언될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에서 인류가 의인과 악인 두 부류로 나뉠 때, 바울은 의인으로 인정을 받고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받을 의는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의가 아닙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한 것을 말합니다. 성도의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고(롬 10:4)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롬 3:21-22). 의(義)는 바울에게만 주실 복이 아니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실 복입니다. 성도는 예수님 믿고 그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을 사모하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에 대한 소망과 사모함이 없는 자는 참 성도가 아닐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필수적 덕목입니다. 모든 믿는 자는 마지막 심판 날에 의를 얻을 것입니다.

 

4. 복음 사역의 어려움들(딤후 4:9-22)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왜냐하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기 때문이라.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17 그러나 주님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 주님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분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분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2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 나는 주님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9-10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왜냐하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기 때문이라.” 바울은 디모데가 속히 자기에게로 오기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동역자가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한데, 복음 사역의 어려움 중에 가장 큰 것은 복음 사역자들의 부족입니다. 데마(Demas)는 골 4:14에 보면 바울의 동역자로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문안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마게도니아주 수도)로 떠나갔습니다. 요일 2:15는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레스게(Crescens)는 갈라디아(Galatia)로, 충실한 일군이며 동역자인 디도(Titus)는 달마디아(Dalmatia, 현재의 유고슬라비아)로 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곳으로 간 이유를 모릅니다. 그들은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해 바울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바울 곁에 있지 않습니다. 옥에 갇혀 몸이 부자유스럽고 나이 많은 사도 바울 곁에 그를 도울 수종자가 없었습니다.

 

11-12절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누가는 골 4:14에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언급하듯이 그는 의사로서 바울과 더불어 전도 활동에 참여했고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저술했으며 지금도 바울 곁에 있어 주치의로 바울의 건강을 돌보고 있습니다. 두기고(Tychicus)는 에베소로 파송했다고 함으로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디모데와 협력을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디모데가 로마를 방문할 때 그 빈자리를 채우려던 것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누가만’이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의 곁에 필요한 동역자들이 부족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본문 20절 이하에도 몇 명의 인물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복음 사역을 위해 중요한 일꾼들이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가(Mark)는 바울과 바나바의 처음 전도 여행시에 동행했으나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돌아갔기 때문에,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할 때 동행하기를 강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이런 신념 때문에 바울은 마가의 삼촌 되는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고 마침내 서로 헤어지기까지 했었습니다(행 15:36-41). 그러나 이제 바울은 마가가 그의 일에 유익하므로 데려오라고 부탁합니다. 이전에는 마음이 약하고 제 고집대로 하던 마가가 이제는 바울에게 유익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복음 사역에는 좋은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충성된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많으나,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충성된 일꾼은 많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아직 디모데 같은 동역자가 있었고 누가도 있었습니다. 또 마가도 이제 그에게 유익한 동역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어서 속히 바울에게 와야 했습니다.

 

13절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사역의 어려움은 동역자의 부족뿐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데 이 감옥은 춥고 배고프며 기타 육신적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더군다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21절). “내가 드로아 가보(Carpus in Troas)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는 의미는 2년 전 그가 잠시 로마에서 석방되었을 때 소아시아 지방을 심방할 때 드로아에 있는 가보라는 제자의 집에 겉옷을 두고 왔는데 이를 가지고 오라는 부탁입니다. 옥중에서 겨울을 지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디모데에게 가죽 종이에 쓴 책들(βιβλία, the books, but especially the parchments)을 가져오라고 부탁합니다. 이 가죽 책은 물론 성경책입니다. 원문에는 복수명사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 개의 두루마리들을 의미합니다. ‘가죽 종이’라는 원어(멤브라나 μεμβράνας membravas)는 양피지 즉 양의 가죽을 말려서 만든 종이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배고픔과 추위가 있는 옥중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쉬지 않았고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14-15절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복음 사역의 또 하나의 어려움은 대적자가 있는 것입니다. 구리장색(coppersmith) 알렉산더는 딤전 1:20에 언급된 인물 즉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자들 중에 한 사람인 그 알렉산더(Alexander)일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 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직분자 중에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옛날 광야시절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처럼, 또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이었던 가룟 유다처럼, 그는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해를 많이 보였습니다. ‘해를 많이 보였다 did me much evil’는 말은 ‘악한 일을 많이 행했다’는 뜻입니다. 또 그는 바울의 말을 심히 대적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무시했고 그와 변론했고 그의 말씀을 심히 대적했습니다. 이런 자들이 구약교회 안에도, 신약교회 안에도 있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로 전파하였던 예수님에게도, 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우리의 목회 사역에 대적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복음 사역에는 항상 그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요한삼서에 보면, 더 기가 막힌 일이 있었는데 요삼1:9-11절에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영접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부당하게 비난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영접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교회 안에는 구리장색 알렉산더 같고,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도 그를 주의하라”라고 합니다. 진실한 성도는 이런 자를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자가 있다고 해서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이지만, 현세에서도 그들의 악을 보응하십니다. 그것은 악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의 일이 너무 방해를 받지 않고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6절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복음 사역의 어려움은 대적자가 있는 것뿐 아니라, 또한 때때로 외로이 홀로 싸워야 합니다. 바울이 처음 복음을 변명할 때 그의 편에 선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외로운 사역의 발걸음인가요! 이것이 진실한 주님의 종들과 성도들이 때때로 가야 했던 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버렸던 자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저 무지하고 깨달음이 없었던 사람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감싸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보여주셨던 긍휼과 사랑입니다.

 

17절 “그러나 주님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바울의 복음 사역에는 대적자가 있었고, 또 사람들의 지지나 격려는커녕 오히려 모든 사람이 그를 버림으로 홀로 외로이 싸워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고 그를 강건케 하셨습니다. 복음 사역자의 용기와 힘은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그 한 가지 사실에 있습니다. 실상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강건케 하신 목적은 그를 통해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들이 듣게 하기 위해서이었습니다. 복음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설교자들을 강건케 하시는 것은 이 말씀이 전파되어 택한 백성이 다 구원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극심한 반대와 비난, 그리고 위협과 고난이 바울에게 있었지만, 그는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습니다. ‘사자의 입’이라는 말은 그를 죽이려는 무서운 악의 세력을 비유한 말입니다.

18절 “주님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분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분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구원하신다’는 원어(소죠 σώσω soso)는 ‘구원한다’는 뜻 외에 ‘지킨다’는 뜻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셨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바울뿐 아니라, 주님의 신실한 모든 종들과 자녀들에게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만 신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강건케 하시고 모든 악에서 구원하시고 끝까지 보존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에게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돌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 합니다. 그는 신적 능력을 가지시고 일하시며 신적 영광을 받으시는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19-22절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나는 주님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브리스길라(Priscilla)와 아굴라(Aquila), 오네시보로(Onesiphorus)의 가족 등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는 동역자들입니다(롬 16:3-4; 딤후 1:16-18). 또 바울은 에라스도(Erastus), 드로비모(Trophimus), 으불로(Eubulus), 부데(Pudens), 리노(Linus), 글라우디아(Claudia), 그리고 그 외의 모든 형제들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다 교회들의 모범적인 봉사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드로비모는 병든 채 밀레도에 두었다고 합니다.

 

특히 21절에 노 사도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부지런히 오라 Do thy diligence to come before winter”라고 부탁합니다. 겨울이 되면 지중해가 얼어서 배가 다니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다가 얼기 전에 어서 속히 오도록 부탁합니다. 사도의 겨울(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순교 전에 디모데를 한번 더 보고 싶어 한 것입니다. 교회 전설에 의하면 디모데는 결국 겨울 전에 로마로 떠나지 못했고 이듬해 봄에 로마에 도착하니 바울은 순교 당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 겨울을 로마 옥중에서 누가와 함께 지내면서 쓸쓸하고 춥게 지내다가 AD 67년 봄이 되면서 네로 황제의 명령으로 참수되었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4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매카트니 목사님은 매년 연말 겨울이 오기 전에 이 본문을 가지고 똑같은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Before winter comes"라는 이 설교를 듣기 위해서 이 교회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겨울이 오기 전에 월동 준비하며, 김장하며, 양식과 땔감을 충분히 준비하며, 두꺼운 이불과 복장도 준비하며, 자동차 타이어도 미끄러운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는 것으로 교체하고, 월동액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늘나라 상급을 위해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유비무환(有備無患) 즉 준비를 하면 화를 면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과 은총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로 목회서신 강해를 마칠 수 있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게 하옵소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리게 하시며 믿음을 지켜 하나님께서 예배하신 면류관을 받게 하옵소서. 겨울이 오기 전에 월동 준비를 하여 새 봄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하소서(마 6:9-13)

 

[마태복음 주기도문 설교]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하소서(마 6:9-13)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주기도문 설교 중에서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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