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사야 26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주의 빛난 이슬이라는 설교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성경: 이사야 26:16-19
제목: 주의 빛난 이슬
본문 19 하반절을 보면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슬이 땅에 내리면 메말랐던 땅과 초목이 되살이 나는 것처럼 죽었던 생명이 부활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슬은 대개가 긍정적이고 좋은 뜻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27:28을 보면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삭이 그 아들 야곱에게 축복하면서 들려준 말입니다. 하나님을 하늘의 이슬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32:2를 보면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말씀은 가문 땅에 내리는 단비이며 풀잎 끝에 맺히는 이슬과 같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적당한 때 자주 비가 내리는 경우라면 이슬의 의미나 가치가 별로 소중하지 않지만 팔레스타인 지방은 파종할 때 내리는 이른 비와 결실할 때 내리는 늦은 비가 고작이기 때문에 이슬이 내리지 않으면 초목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 지방의 이슬이야말로 절대로 필요한 생명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니님의 말씀과 은혜는 우리의 영혼이 살라가는 데 절대 불가결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슬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람은 소리가 요란하고 불은 그 빛과 열이 찬란하고 뜨겁지만 이슬은 소리도 없고 빛같이 찬란하지도 않습니다. 소리 없이 내려서 대지를 적시는가 하면 초목을 윤택하게도 해줍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만난 하나님은 불같이 뜨겁고 강한 하나님이었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450명과 많은 민중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보여 달라는 엘리야의 가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불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불이 엘리야의 제단 위에 놓였던 모든 제물과 도랑의 물을 태웠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과 이세벨 왕후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던 엘리야가 호렙 산에서 만났던 하나님은 조용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불법과 부정과 불신의 화신인 아합과 이세벨의 손에 붙잡혀 참형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손에 죽는 것이 낫겠다면서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산 위로 올라가 서서 하나님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겨우 힘을 되찾아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강풍이 불고 산이 갈라지고 바윗돌이 부서지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엘리야는 그 이변 속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강풍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땅이 흔들리는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 무섭고 뜨겁게 불타오르는 불길이 엘리야 앞을 지나갔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은 불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불길 속에 나타나실 것이라고 믿고 찾았지만 불길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길이 꺼지자 가늘고 작은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는 강풍 속에서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조용한 소리 속에서 만났고, 지진 속에서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을 소곤거리는 소리 속에서 만났으며, 불길 속에서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음성을 지극히 고요하고 작은 소리 속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작은 소리처럼 작고 무능한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슬과 같다고 해서 무력하고 나약한 하나님은 결코 아닙니다.
본문 19 하반절을 보면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으면 살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땅이 있습니다. 그런 땅을 가리켜 박토, 가시밭, 자갈밭이라고 부릅니다. 제아무리 씨가 좋고 나무가 좋아도 그런 땅에 뿌리면 살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으면 고스란히 자라서 무성하게 되는 땅에 있습니다. 그런 땅을 가리켜 옥토라고 합니다. 땅이 옥토가 되는 것은 적당한 때 비가 내리고 이슬이 내려서 항상 촉촉하게 적셔주고 있기 때문이며, 식물이 자라기에 필요한 영양소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으면 그때마다 죽어버리는 박토처럼 그 영혼의 밭이 메마르고 강퍅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하고 찬송을 불러도 그 심령이 딱딱하게 굳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생명의 역사라든지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의 심령은 항상 메마르고 거친 자갈밭이며 가시밭과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옥토와 같은 심령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수록 더 윤택해지고 아름다워 가는 심령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 믿음이 곱고 예쁘게 자라는가 하면 예쁜 꽃이 피고 탐스런 열매를 맺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는 시편 1편의 노래처럼 멋이 있고 아름다운 심령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심령이 옥토가 되는 것은 주의 이슬이 거기에 내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의 심령은 강퍅하고 평안이 없고 원망과 불평이 항상 가득하고 질펀하게 깔려 있지만 은혜를 받은 사람의 심령은 늘 기쁘고 평안하고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8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던 처녀 마리아를 찾아간 사건이 나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간 것은 그녀가 잉태하여 예수를 낳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리아를 찾아간 가브리엘의 첫 인사말은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는 것이었습니다.이 문안 속에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항상 평안이나 평강이 은혜의 결과임을 가르쳐 줍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야 그 마음이 항상 평안하고 안정되고 기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일수록 불편하고 불안하고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 불안을 내쫓으려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시기와 미움과 불평스런 마음을 이기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쓴 편지마다 “너희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했고 주님도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래 “은혜”라는 말의 뜻은 유쾌하다, 행복하다, 만족스러운, 호의, 선물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은혜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나 선물을 의미합니다. 옷이나 집 그리고 가구나 식료품은 돈을 주고 살 수 있지만 은혜는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마음속의 평안이나 기쁨은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으면 근심이나 걱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감사할 조건이 없음에도 감사하게 됩니다. 찬송할 이유가 없음에도 찬송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이유가 달라지고 삶의 차원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였던 본 훼퍼 목사는 “우리의 적은 값싼 은혜이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추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값비싼 은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자신이 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평안과 감사하는 마음을 주시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를 내가 내 심령 속에 모실 때 나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부정하고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물 없는 사막 같은 삭막한 인생을 살 것이며 고독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20세기의 가장 큰 비극은 인간들의 부정적 사고(negativism)”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물고 두 귀를 틀어막고 믿지 않겠다고 악을 쓰는 사람, 듣기는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 매사를 부정하고 시비 걸려는 사람들은 그 공동체의 문제 거리이고 교회의 문제 거리이고 20세기의 문제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대작곡가였던 쇼팽은 절망적인 폐결핵 때문에 죽음의 그늘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그의 조국인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서 지냈습니다. 어느 날 파티에 모였던 사람들이 쇼팽을 놀려 주기 위해 그가 들어오기 전 방안의 불을 끄고 모두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유령처럼 괴성을 내고 있었습니다. 방안에 들어선 쇼팽은 아무 말 없이 피아노 있는 대로 가서 앉더니 그날 그 방 안의 분위기를 즉흥곡으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훗날 유명한 쇼팽의 소나타인 장송 행진곡이 되었습니다. 암울하고 답답한 상황도 명곡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쇼팽의 음악적 센스와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만 하면 유령이 괴성을 지르는 공포 속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될 것이고 우리에게 믿음만 있다면 고통이나 아픔도 능히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와 삶을 창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성난 파도를 밟고 배 있는 데로 걸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한 베드로가 소리쳤습니다. “주님, 저도 주님처럼 파도를 밟고 바다 위로 걸어보고 싶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물 위로 걸어서 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마디 대화가 오고 간 직후 갈릴리 바다에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성난 파도를 밟고 걸어오시는 주님과 그 주님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베드로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물 위로 걸어가던 베드로가 파도를 바라보는 순간 공포에 사로 잡혔고, 공포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는 물속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허우적거리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 이끌어 내시며 주님은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왜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주목합시다.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우리에게는 주의 은혜의 단비와 이슬이 필요합니다. 메마르고 강퍅해진 내 심령을 촉촉하게 적시고 윤기 나게 해 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마음의 문을 엽시다. 그리고 주의 은혜를 받아들입시다. 오늘 여기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가슴 가득히 안고 이 성전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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