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요한복음 강해 설교문] 태초에 계신 말씀(요1:1-18)

복음의 능력 2020. 6. 27. 16:33
반응형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강해 설교문 중에서 요한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제 목: 태초에 계신 말씀

 

성 경: 요1:1-18

 

 

우리는 요한복음을 읽을 때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요한복음 서두에 나온 말씀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면 왜 예수를 말씀이라고 표현했을까?

 

 

1. 태초에 와 같은 말은 만일 요한복음이 마태복음보다 순서상 먼저 나온다면 신약을 시작하는 말로서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이 없을 것이다. 냐하면 그렇게 할 때,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이 보다 더 선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태초에 누가 계셨는가? 이에 대한 당연한 답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이. 요한도 물론 이에 동의하지만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계셨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요한의 때가 신약의 시대에 속하여 있으며 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쓰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계신 분임을 보여주기 원한 것이다. 말씀의 영원성은 성부의 영원성과 완전히 일치하며, 따라서 하나님과 말씀은 더불어 영원하시며, 서로 대등하신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말씀이란 어떤 분이신가? 말씀은 성부께서 피조 된 분이 아니듯이 자신 또한 피조 된 분이 아니시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면 영원하신 분은 본질상 한 분이실 수밖에 없음으로 그도 또한 영원하신 분이셔야 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 사실을 요한은 요한복음 제1장 서두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2. 말씀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로고스(λογος)라는 말에서 왔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가리켜 말씀이라 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일까? 말씀은 바로 의사전달이자 계시인 것이다.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 양쪽 모두의 침묵을 깨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의 생각에다 자신의 생각을 개입시키는 것 즉, 전달하고, 드러내 보이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것이며,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신적 계시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8:3),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서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시며,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람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 또 그가 이룩한 모든 말씀과 행위에서 뜻깊은 의미를 지닌 하나님의 계시를 보게 된다.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에 있어서 유일하고도 새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의 족보(1:1-17; 눅 3:23-38)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족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곳에 기록되어 있. 그런데 이 두 곳의 족보가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마태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위한 메시아임을 보여주기 원했으므로 그는 다윗을 거슬러 아브라함에게까지 소급하여 언급을 한다. 반면 누가는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제시하기를 원했으므로 그리스도를 모든 인류의 아버지인 아담의 후손인 것으로 언급을 한다. 이 두 족보의 주요 목적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리아를 통해 성육신하심으로 예수님이 인류와 동일시되신 사실과 예수님이 구약 역사의 전통을 이어받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요셉의 족보를 추적하여 예수님이 어느 계통에서 태어나셨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님의 실제의 아버지가 아니므로 예수님이 요셉의 피를 한 방울도 이어받지 않았다. 그러나 의로운 유대인들은 아이에게 법적으로 정당한 어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었다. 따라서 마태는 예수님이 참으로 요셉의 법적 자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이며 적법한 언약의 자손임을 보여준. 그런데 마태와 누가가 기술하는 족보상의 이름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 중 세 여인은 다말, 룻, 라합이며 또 한 여인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채,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6)라는 말로서 표현되고 있다. 이들의 이름이 들어있는 첫 번째 이유는 예수님이 단지 유대인 만의 구세주가 아니요 이방인들의 구세주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룻과 라합은 둘 다 이방의 여인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에 여인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죄로 오염된 피를 지닌 자들과 동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물론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으시며 순수하다. 그러나 그의 족보에는 창기들과 탐욕스러운 죄들을 지은 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조상으로 하고 태어난 예수님은 그가 어떠한 죄에도 인격적으로 오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을 낮추시어 그처럼 죄 많은 사람들을 그의 아들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이다. 죄없으 신 구세주가 죄로 더럽혀진 혈통을 따라 이 세상에 나셨으므로 우리는 누구도 자신에게 소망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소망을 가져다준다.

 

 

열 네대요(1:1-17)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마 1:17절에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대러라] 라고 족보의 배열이 14대씩인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이름을 면밀히 세어보면 14, 14, 14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로14대로 나눠진 어느 한 구분은 13대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이들은 성경의 사본을 만든 필사자들이 한 이름을 빠뜨렸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본래의 본문은 마 1:11절이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호야김은 스알디엘을 낳고]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야김은 여고냐와 동일 인물이므로 마1:12절의 여호야김이 현재의 성경처럼 여고냐로 바뀌어 기록되게 되었으며, 바로 이 영향으로 마 1:11절의 여호야김도 여고냐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마 1:11절은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호야김과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로 되어야 하며 마 1:12절은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호야김(여고냐)은 스알디엘을 낳고... ]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들은 이와 같은 본문 수정을 거치면 모든 이름이 한 번만 사용되고 14대씩 잘 들어맞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본문 수정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첫째 가장 우수한 사본들이 현재의 본문을 그대로 지지한다. 둘째 마 1:11절의 여고냐를 여호야김으로 바꿀 경우 [AB를 낳고 BC를 낳고... ] 처럼 각각의 이름이 두 번씩 사용되는 패턴을 파괴하는 것이다. 1:11절에도 이런 패턴을 살리기 위해서 [요시야는 여호야김과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하고, 12절은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호야김은 여고냐(여호야김)를 낳고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의 접근 방법이 있다. 첫째 접근 방법은 다윗을 두 번 사용하는 것이. 즉 다윗을 첫 번째 14대의 마지막 이름과 두 번째 14대의 첫 번 이름으로 두 번 사용하는 것이다. Bengel의 다음 말을 들어보도록 하자. [이스라엘 왕들의 치세 때에 때때로 1년이 한 왕의 마지막 해로 계산될 뿐만 아니라 다음 후계자의 첫해로 계산되기도 했다. 마태가 여기서 같은 원리를 적용한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다윗이 처음 14대의 마지막임과 동시에 두 번째 14대의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다윗이 처음 14대에 포함한 것은 첫 번 14대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고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으므로 두 번째 14대도 다윗부터 시작하고 자신을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고냐는 두 번째 14대의 마지막으로 계산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번째 14대가 다윗서부터 계산되었고 여고냐까지 계산된 것이 아니다.

 

 

두 번째 접근방법은 다윗 대신 여고냐를 두 번 사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여고냐를 두 번째 14대의 마지막 이름과 세 번째 14대의 첫째 이름으로 두 번 사용하는 것이다. 헨드릭센은 여고냐를 두 번 포함시킨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고냐의 생애는 포로 이전과 포로 이후에 속한다. 포로 이전의 여고냐와 포로 이후의 여고냐는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본문도 1:11절에서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했는데 12절에서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라고 바벨론 포로를 중심으로 여고냐의 생애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두번째 14대와 세번째 14대의 구분은 여고냐 자신이 아니요, 그의 생애에 발생한 특별한 사건인 바벨론 포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고냐를 두번째 14대 마지막 인물로 포함시키고 세번째 14대 처음 인물로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상의 두 견해 중 어느 견해가 본문에 더 적합한가. 본 저자는 다윗을 두 번 사용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마 1:17[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대요 바벨론으로 이주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대러라]로 나와있기 때문이다.

 

 

여기 본문은 아브라함이 첫번째 14대의 선두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다윗, 여고냐가 14대의 첫 인물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첫번째 14대 구분은 유대인들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왕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예수님의 조상이 왕족의 혈통임을 보여준다.

 

 

두번째 14대 구분은 다윗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의 왕들의 이름들을 열거한다. 이는 메시아의 도래 때까지 이스라엘이 어떠한 역사를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세 번째 14대 구분은 비참했던 포로기로서 왕족이 몰락했던 슬픈 사건들을 보여준다. 다윗의 왕가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만큼 다가오고 있었다. 아울러 더 나아가 이 그리스도는 실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왜냐하면 다윗 왕가는 완전히 몰락하여 아무런 미래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오셔서 그의 아들을 주셨던 것이다. 그처럼 악한 상황으로부터라도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통해 승리를 하신다.

 

 

그러면 14대라는 숫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14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14대로 나눈 사실은 특별한 의의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히브리어 자음은 숫치를 가지고 있다. 모음은 철자로 계산하지 않기 때문에 숫치가 없다. 그래서 첫째 자음은 1의 수치를 둘째 자음은 2수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원리로 수치를 계산한다.

 

그런데 다윗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דוד로 기록한다. 이 이름을 숫치로 계산하면 ד=4, ו=6, ד=4. 전부 합치면 14가 나온다 예수의 족보를 14대로 나누어 세 그룹으로 기록한 것은 각 그룹이 다윗에 관해 설명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예수는 새로운 다윗이요, 마지막 다윗이라는 것이다.

 

 

[에스겔 33장 설교문] 이 시대의 파수꾼(겔 33:1-11)

안녕하세요. 오늘은 에스겔 33장 설교문 중에서 이 시대의 파수꾼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제목 : 이 시대의 파수꾼 성경 : 에스겔 33:1-11 에스겔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쳐들어��

skh12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