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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장 슬기로운 다섯 처녀] 열 처녀의 비유(마 25: 1-13)

복음의 능력 2020. 10. 20.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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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5장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설교 중에서 열 처녀 비유에 대한 설교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

(25: 1-13)

 

주님은 우리를 10 처녀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후회하는 5 처녀가 있고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5 처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야 되겠습니까. 후회하지 않는 지혜로운 5 처녀가 되기 위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특징과 의미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1. 이 비유의 특징은 주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은 당시 행해지던 결혼을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될 일들을 24장에서 말씀하신 후에 이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갖추어야 할 성도의 신앙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유란 그 말씀의 문자에 역사성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비유가 상징하는 뜻이 중요한 것입니다. 비유를 통하여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의도를 살피는 것이 비유 해석의 방법입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부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신랑과 신부입니다. 결혼은 사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랑 없는 결혼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먼저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신랑으로 비유하신 이유는 그것은 바로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당시의 고대 사회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여 프러포즈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남자 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신부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인간을 향한 적극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8에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면서 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가득한 신랑이 바로 주님인 것입니다.

 

2.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는 교회의 성도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처녀들은 신랑을 기다리듯 마지막 때에 주님을 기다리며 믿음 생활을 하는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10명입니까. 성경에서 710은 완전수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단순히 10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특별히 교회의 성도들을 처녀로 비유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교회의 순결성을 가리킨 것입니다. 깨끗하고 정결한 성도의 모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하고 더러운 사단의 시험에 빠져서 자신의 영혼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단은 초신자들 만을 시험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기도하신 후 성령이 충만하셨습니다. 영력이 충만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그때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시험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관계없이 시험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단의 시험을 당했었던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말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근신하라는 말은 사단의 시험에 넘어져 더럽힘을 당할까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목회자든 성도이든 누구든지 근신하고 조신하지 않으면 사단의 올무에 걸려 마땅히 입어야 할 세마포의 정결한 옷을 더럽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3. 신랑은 신부와 언제 도착할 시간은 정확히 모르지만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랑이 밤에 신부의 집을 찾아가는 것은 당시 사회 풍습이었습니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온 후에 밤중에 결혼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단장을 하고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랑은 그의 부모와 당사자에게 어느 날 밤에 오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특별히 몇 시에 오는지 정확히는 말하지 않습니다. 때는 알지만 정확한 시간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 14:2-3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살전 4:16과 5:1-3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주님께서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서 강림하시는데 그 날과 그 시기는 마치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오는 도적과 같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더 분명한 말씀을 보면, 24:36"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 시기와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의 비유와 같이 신랑이 오되 어느 시기에 올지 모르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4. 신랑이 더디 오므로 10 처녀는 모두 졸았습니다.

5절에 보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생각보다 신랑이 늦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처녀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졸게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처녀는 졸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졸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 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졸며 잔다는 것은 사단이 기승을 부리는 마지막 시대에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신앙생활에 낙심과 좌절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련한 자들만이 잔 것이 아니라 슬기 있는 처녀들도 졸았다고 했습니다. 혹 잠이 깨어있는 정도는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모두가 다 졸며 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주위에 혹 믿음 생활에 낙심한 자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죄와 비난보다는 격려와 사랑의 훈계로서 대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세 시대에 살다 보면 나도 졸음이 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절대 졸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생각보다 더디 오십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서로서로 버팀목이 되어 붙들어 줌으로 함께 천국의 혼인잔치에 이르러야 합니다.

 

5. 5 처녀는 등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신랑이 왔다는 방울소리가 울렸습니다. 어서 나와서 신랑을 맞으라는 소리가 나게 된 것입니다. 처녀들은 허겁지겁 깨어나서 등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0 처녀의 손에 있는 등불에는 불이 가물가물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심지를 건드려도 불이 붙지를 않습니다. 기름이 떨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등은 올리브기름을 접시에 담고 그 안에 헝겊으로 심지를 만들어서 불을 붙이고 들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랴부랴 기름을 사러 갔습니다. 10절에 보니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그녀들이 기름을 사 가지고 왔으나 이미 신랑은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혼인집으로 뛰어가서 등불을 준비하고 왔으니 문을 열어달라고 간곡하게 외쳤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그때에 신랑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비유하기를 "미련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6. 그러나 반면 5 처녀는 등불을 준비해서 신랑을 맞게 되었습니다.

신랑이 왔다는 소리에 잠을 깬 5 처녀의 등에도 역시 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곧 준비한 기름을 등에 부어 불을 밝히고 신랑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슬기로운 5 처녀는 신랑이 늦게 올 것을 대비해서 미리 기름을 준비했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름을 준비하라는 뜻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의 핵심을 기름이 무엇이냐에 초점을 맞추고 설교를 합니다.

대부분 신학자나 설교자들은 이 기름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말세의 성도들은 기름이 충만한 것과 같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야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을 이해하면서도 자칫 교리 적인 면에서 혼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분명 미련한 처녀들도 기름이 있었습니다. 다만 충만히 준비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신약성서 어디에도 성령이 충만하면 구원받고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일단 성령께서 내주 하시게 되면 우리의 행위나 충만한 상태와 관계없이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름을 준비한다는 말씀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름에 초점을 맞추지만 성경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기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에 초점이 있습니다. 비유의 시작인 1절에, "천국은 마치 기름을 들고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고 나갔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가장 클라이맥스가 될 수 있는 7절을 보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라고 말씀합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목적도 결국은 등을 밝히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신랑을 맞을 때 기름을 들고나가야 합니까. 등불을 들고나갑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등불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등불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성경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는가를 통하여 풀어보겠습니다. 시 119:105의 말씀은 이렇습니다."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 그러므로 등불을 준비하라는 말씀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같이 인간을 멸망으로 이끄는 어두운 죄악을 밝혀서 생명의 길로 이끄는 복음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말세의 교회에는 두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 믿음이요 또 하나는 거짓 믿음입니다. 본문의 비유대로라면 많게는 50%까지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도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 알곡이 있지만 분명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영접하는 것입니다.

 

마 7:21-23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았는데 왜 나를 모른다고 하십니까라고 항의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내게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음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웠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오면서 주님을 통하여 어떤 종교적인 위로와 이익만을 얻으려 합니다. 어려울 때는 믿음 생활을 잘하다가 좀 나아지면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가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주님을 통하여 무엇을 얻을 것인 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진정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속죄의 복음을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변화는 무엇입니까. "주님 나 같은 죄인을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제 과거에는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7. 천국은 혼인잔치 같습니다.

10절에 보면 문이 닫히고 혼인잔치가 베풀어졌다고 했습니다. 결혼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목적도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의 풍성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영원한 혼인잔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1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하시고 싶으신 말씀의 결론입니다.

 

"성도들아 깨어 믿음의 등불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 저 문 밖에서부터 다가오는 신랑이 오는 방울소리를 듣지 못하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믿음의 잠을 자는 사람은 없습니까. 아직도 주님을 위대한 성인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 분입니다. 참 믿음은 말씀의 중심이며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심령 가운데 영접하여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제 깨어서 여러분의 등불을 보십시오. 믿음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마지막은 언제입니까.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때는 역사의 종말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언제 하나님 앞에 갈지 모르는 개인적인 종말을 맞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보라 신랑이로다"하는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때 밝은 등불을 들고 주님을 맞읍시다. 서로서로 격려하고 붙들어서 함께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합시다. 후회하지 않는 슬기로운 믿음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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