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신약히브리어 설교말씀]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태복음 13:1-9; 18-23)

복음의 능력 2021. 2. 15.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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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신약 히브리어 설교말씀 중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천국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지 못하니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밭과 좋은 밭이 있습니다. 똑같이 씨가 떨어졌지만 결실을 맺은 밭은 좋은 밭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좋은 심령의 밭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좋은 심령의 밭이 되어 복음의 씨가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좋은 신앙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태복음 13:1-9; 18-23)

 

마 13: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예수님은 집에서 나가셔서 바닷가에 앉으셨습니다. 바닷가에 앉으셔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려고 합니다.

 

마 13: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예수님이 바닷가에 앉아 있는데 많은 무리가 모여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여들었다고 했는데 바이카할루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카할이라는 동사입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석에 철이 끌어 오듯이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고 있음을 말합니다. 카할은 구약에서 교회를 말합니다. 성도는 예배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교회로 모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여드는 것입니다.

마 13: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고 합니다. 청중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이 비유의 말씀을 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하시면서 그 말씀에 대해서 해석도 해 주셨습니다. 

마 13: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예수님은 청중들을 향하여 애쓰시며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비유로 천국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그 당시 씨를 뿌리는 농부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농부가 어떻게 씨를 뿌리는지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 13: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길 가에 떨어졌습니다. 길 가에 떨어지니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이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마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길 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한 자입니다.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런 자가 길 가 밭입니다. 길 가 밭에 씨가 뿌려졌는데 하니즈라인데 자라라는 동사입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심령의 밭에 뿌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심령의 밭의 이런 자는 악한 사탄이 와서 복음의 씨를 빼앗아 버립니다.

마 13: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흙이 깊지 않습니다. 그러나 싹은 나오고 있습니다.

마 13: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해가 올라오니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습니다. 타서라는 단어가 바이차레브인데 차라브 동사인데 그슬리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수동태를 사용합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태양에 의해서 그슬려 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 13: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마 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에 떨어진 씨

천국 운동은 말씀 운동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 선포와 그리고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것과 그리고 들은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문제, 또 그 말씀을 깊이 뿌리를 내리는가 못 내리는가 하는 문제와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도 이 세상의 삶과 관련하여 침체되는 문제, 그리고 말씀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여 지킴으로 결실하는 문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 돌밭은 산 밑의 큰 바위 위에 토사로 얇게 덥혀 있는 땅. 여기에 씨가 떨어지면 싹은 나오나 결실한 열매는 얻을 수 없습니다. 바위가 차단하여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뿌리가 없어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면 말라버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뿌리가 없는 문제입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게 차단하고 막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바위)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먼저 결과를 살펴보십시다. 무엇인가 차단하여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씨는 즉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넘어지는 자요. 누가는 배반하는 자요. 말씀(혹 천국, 하나님 나라, 신앙) 때문에 어떤 손실이 올 경우 배반하는 자입니다. 그러하다면 여기서 말하는 바위 즉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자명합니다. 즉 자아(自我)입니. 자기라는 것이 도사리고 앉아 있어서 그 이상은 뻗어 내려가지 못하게 차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는데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 곧 넘어지는 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받는 것은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뿌리 있게 박히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도 종교를 필요로 하고 또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고, 감격도 하고, 큰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피상적으로 보기엔 참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아무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잘 모릅니다. 말씀 때문에 큰 핍박과 환난이 일어나서 넘어지든지 배반할 때에야 돌밭임이 드러납니다.

 

그들이 종교를 필요로 하고 종교적 신앙을 가지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종교적 열정, 종교적 활동, 모든 것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가? 어떤 가치, 어떤 위안, 어떤 만족을 주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자기 손실과 자기를 포기하고 내놓으라고 할 때 배반하지 않겠는가? 이런 사람들도 말씀을 기쁨으로 받는다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사변적이고 학문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자에게 만족을 줄만한 가르침을 주면 무척 기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말씀이 생명의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또한 종교적 감정과 열정이 감격하게 하고 기쁘게 하고 황홀한 경지에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추구하고 요구하는 것을 얻을 때에 좋아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 길가, 돌밭, 가시떨기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았다고 해서 길가나 가시떨기보다 나을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것이지 내가 중심이 되는 것 아닙니다. 자신을 위한 모든 종교적 열정은 그것이 만족이나 위로를 주던지, 기쁨이나 감격을 주던지, 현실적으로 어떤 소득이 있던지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받을 분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릴 때에 차단하는 요소가 제거되어야 어떤 경우라도 깊숙이 뿌리를 박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로울 때만 받아들이고 손실이 올 때는 막고 차단합니다. 그것은 버린다. 어떤 결정적인 요구를 해올 때는 종교도 포기한다. 혹은 형식은 붙들고 있으나 적당히 타협한다. 신사 참배~그렇게라도 해야 문 닫지 않는다고 논리를 전개합니다. 전폭을, 전부를, 전체를 드리지 않으면 결정적일 때 배반하거나 넘어집니다. 이것은 평소부터 그 속에 바위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바위는 속에 들어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점이 없습니다.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격하는 경멸자들이 여기에 언급되고 있지 않은 사실을 우리가 알 때 이 경고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비유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만 관련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이 망한다면 구원의 설교를 공공연히 거절하는 세상에 속한 다른 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이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가는 처음부터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 씨를 표면에 놔두지만 돌밭은 처음은 받아들입니다.

 

* 종교를 왜 필요하게 생각하는가? 종교는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인생을 풍부하게 하려고 종교를 가지는데 행복은 고사하고 네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하면 믿겠는가? 궁극적인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일진대 나에게 손실과 손해가 있을 때 이런 것들도 궁극적인 자기 유익을 얻게 된다면 희생을 하고 손해도 봐가면서 더 큰 유익을 얻기 위하여 감수하겠지만 나 자신을 내놓으라, 네 목숨을 내놓으라 할 때는 넘어지고 배반하는 것입니다.

* 길가나 돌밭이 표면상으론 다르지만 사실상 뿌리가 깊이 뻗어 들어가지 못하는 점에서는 동일함.

* 말씀의 씨가 속에 뿌리가 뻗어 나갈 수 없는 마음자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외부로 싹이 나서 가자 소망이 있는 것 같이 보이나 뿌리가 뻗지 못하여 환난이 올 때 넘어집니다. 뿌리가 없는 것이 가장 특징적인 것입니다. 뿌리가 있어야 햇빛에서 장성하고 열매를 맺을 텐데 뿌리가 없어서 큰 손실이 그를 휩쓸 때 포기하는 것입니다.

* 넘어진다, 배반한다. - 교회를 떠난다거나 출석을 안 한다거나 기독교를 포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 돌밭은 외부 사람은 물론 어떤 경우는 자기 자신도 모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넘어지기 전까지는 그가 넘어질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전체 전부를 드려야지 부분을 드려가지고는 안 됩니다

* 돌밭은 참된 자와 서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되,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생명의 도리로다. 종교적 요구에 만족할 수 있는 태도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마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습니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아버렸습니다. 가시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기운을 막았는데 마아크라는 동사인데 누르다, 꽉 죄다는 뜻입니다. 가시의 기운 때문에 눌림을 받아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시의 기운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마 13:22 가시 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예수님의 해석은 가시 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천국의 복음 말씀을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막혔는데 마아크라는 동사입니다. 피엘 강조 능동을 사용합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눌리고 마음이 꽉 조여 와서 복음의 말씀이 성장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물질 때문에 천국 복음을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운 씨

주님은 말씀을 듣는 자들 가운데서 세 번째 부류로서 말씀이 싹이 돋아 올라와서 자랄 때에 그것이 잘 자라 결실을 못하게 가시떨기가 그 기운을 막았다고 하십니다. 가시떨기는 영적 생활을 침식시키는 큰 세력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욕심과, 또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쾌락이라는 게 있어서 결실치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생의 염려라는 것은 별다른 특수한 사람들이 가진 염려라든지 혹은 어떤 죄악적인 염려라는 것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아무라도 가질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염려 어떻게 하면 살까? 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입니다. 사는 문제에 염려 안 할 정도로 생활이 안정되면 어떻게 사람답게 살까? 출세하고 살까? 하는 마음의 요구로 나쁜 의미가 아님.

재물의 욕심은 독특한 죄악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다 추구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미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저축이라는 것. 재물에 대한 표준 성경이 안 세워진 것 아닙니다. 자기가 표준을 세워. 얼마까지는 적당하고 그 이상을 보고 나가면 욕심입니다.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자리가 문제입니다. 재리의 욕심이 큰 문제는 말씀의 씨에게 자기가 주어야 할 중요한 것들을 못 주고 있는 것입니다.

쾌락 행복추구도 ~다 변호될 만하고 이 세상 사람들은 부적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없습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는 모든 사람이 가진 기본적인 권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바라는 것은 사람의 기본권리입니다. 이런 것들이 왜 나쁘냐?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라도 선덕이라도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어 가는 일을 저해하고 그것을 질식케 해서 마음 기울임과 에너지와 정성을 그 선덕이라는 것 그 유가치하다는 것 때문에 자기 마음에 도사리고 앉아서 흡수해 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여야 할 자기의 정성이나 자기의 노력에는 시간이 없고 여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었던지 적게 벌었던지 그것이 최종의 문제가 아니라 이생의 염려, 행복추구에 주의를 기울이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지 못해서 열매를 못 맺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만 이 세상에서 중시되는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들의 생활양식, 생활양태 그 속에서 나타나는 까닭에 독특하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띠고 발휘되지 않으면, 이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활양태와 구별됨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씨를 품은 사람은 많아도 열매 맺는 사람은 적습니다. 마음만 가지고 있어선 하나님 나라가 형성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백성들의 그러한 생활로 표현이 돼서 사회를 형성해 나가는데 의미를 가집니다.

 

열매 안 맺어도 하나님 나라라고 집어넣고 적당하게 내 맘대로 교인 생활 잘했으니까 그 사람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못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렬하고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렬해도 마음과 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강렬하게 나타낼 수 있는 말씀의 사역이라는 것은, 즉 하나님 말씀에 정당한 장성과 그로 말미암은 결실이라는 것은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그 사람이 전생활과 생명을 오직 거기다가 기울이고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마음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에도 마음을 주고 그렇게 해서는 열매를 못 맺습니다. 아무 열매를 맺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들포도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책망을 받습니다. 세상 것은 조금만 해도 잘 자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전 정열을 기울이지 않으면 자랄 수 없고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마 13: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마 13: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해 주셨는데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천국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으니 결실을 맺게 됩니다. 깨달았다고 했는데 히브리어 빈이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식별하고 분별하다는 뜻입니다. 히필 사역 능동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시니 복음의 말씀을 분별할 줄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지금까지는 말씀을 듣는 자들 중에서, 또는 듣고 어느 정도 깨닫고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결실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도 말씀을 들으려고 사모하고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고 천국 말씀을 들었으나 여러 가지 저해요소가 있어서 마침내 결실하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좋은 땅입니다. 좋은 땅은 무엇인가? 풍성한 결실을 하는 땅입니다.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으나 수량의 차이는 있습니다. 질은 똑같으나 정도의 차이는 있는 것입니다. 100배가 아니고 30배나 60배도 있습니다. 30개 맺었다고 악한 열매나 못 된 열매는 아니고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천국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는 사람은 좋은 땅과 같은 것이고 듣기는 했으나 열매를 못 맺는 사람은 좋은 땅이 못 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만큼 마음을 기울이고 정성을 기울이고 힘을 쏟아야 합니다. 몇 가지 단계적인 조치가 필요합니다.

토질이 비옥해야 합니다. 눅 8:15, 착하고 좋은 마음. 본래부터 좋은 토질도 있으나 나쁜 땅을 개간하여 퇴비를 넣고 갈고 손질을 잘해서 좋은 땅을 만들기도 합니다. 타락한 인생은 본래부터 착하고 좋은 마음은 없습니다. 황무지와 같고 우거진 가시밭과 같습니다. 묵은땅과 같습니다. 10:12, 4:3. 너희 묵은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물론 우리 스스로 묵은땅을 갈아 결실할 수 있는 좋은 땅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결실할 수 있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열매는 우리가 맺어야 하며 열매를 맺는 일에 우리의 책임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못 맺는 것은 하나님이 안 해 주셔서가 아니라 우리의 무책임과 태만과 정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 5:1- 심히 기름진 산,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 심고 망대를 세우고 술틀을 팠다. 4절을 보면 내가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그런데 들포도를 맺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파종이 필요합니다. 씨도 뿌리지 않고 열매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즉 말씀을 뿌려야 하는데 이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우리가 밭일진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지도 않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길가처럼 단단한 마음, 강퍅하고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마음을 갈아엎어 부드럽게 만들고 뿌리를 뻗지 못하게 차단하는 마음을 깨뜨리어 뿌리를 깊이 박을 수 있게 만들고 가시떨기도 뽑고 잘라내어 말씀이 싹이 나고 뿌리를 박고 줄기가 튼튼히 자라서 결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태를 숨김없이 들어내 놓고 회개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 부단히, 끊임없이 결실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여 열매 맺을 수 있는 여건을 구비해야 합니다.

 

19장의 부자 청년처럼 재물 때문에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천국을 포기할 만큼 값지거나 귀한 것은 없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같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천국의 그것과 비교하거나 견줄만한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 포기하고 잃을지라도 전심을 다하고 전부를 다 드려 결실해야 합니다. 열매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지키어 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당연히 그 나라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마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합니다. 샤마 동사는 들으라는 것인데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여 영적인 귀가 열린 사람은 계속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천국복음을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천국 복음을 듣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22장 히브리어 주석강해] 모리아 산의 이삭 번제(창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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