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7장에서는 유다의 심각한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안식일을 준수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렘 17:1-27)
1-8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
[1-4절]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 . . .
원문 1-2절을 다시 번역하면, “그들의 자녀들이 높은 언덕들 위 푸른 나무들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할 때, 유다의 죄는 금강석(솨미르)(KJV, NASB)[부싯돌](BDB, NIV)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도다.” 유다 백성은 높은 언덕들 위 푸른 나무들 곁에 있는 제단들에서 또 아세라들을 통해 우상을 섬겼다. 그들의 죄 곧 우상숭배의 죄는 너무 확실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판과 제단 뿔에 새겨졌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지경의 죄로 인하여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대적을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로 맹렬케 하여 영영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니라.”
‘들에 있는 나의 산’은 시온산 곧 예루살렘 성을 가리킨다고 본다. 유다 땅은 어느 한 지역만 부패한 것이 아니고 온 지역이 부패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재산과 모든 보물이 노략을 당하게 하실 것이며 산당들도 다 파괴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기업을 잃어버릴 것이다. 또 그들은 그들이 알지 못했던 이방나라로 잡혀가 그들을 섬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불같은 노를 일으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이다.
[5-8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짠기 있는, 소금기 있는]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떨기나무’는 관목(bush, shrub)이라고 하는데, 키가 작고 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불분명한 나무를 가리킨다(이것과 달리, 큰키나무는 교목이라고 함). 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것이 불경건과 불신앙이며 인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죄이다. 그런 사람은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막의 떨기나무같이 메마르고 쓸쓸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말이 반복해 강조되었다. 그런 자는 복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시다.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늘 푸르고 가뭄이 들 때에도 걱정이 없고 항상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더위와 가뭄, 곧 환난과 핍박 같은 것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시편 1편의 말씀과 같다. 거기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하였다(시 1:1-3). 참된 믿음은 순종을 가져오고 순종은 의와 선을 낳고 의와 선은 기쁨과 평강의 복을 가져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의 죄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 기억된다. 그것은 철필로 마음 판에 기록되듯이 기록될 것이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자.
둘째로, 헛된 우상숭배와 인본주의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을 죄악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들을 섬기며 사람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고 저주를 받았고 멸망하여 온 세상에 흩어졌고 포로로 잡혀가서 오랫동안 고생스런 삶을 살았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버리고 인본주의를 버리자. 시편 146:3-4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고 말한다. 이사야 2:22도,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한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의지하며 그의 계명을 순종하자. 7-8절,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살자.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성경책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가족들과 함께 그렇게 하며 성경말씀대로 행하자.
이렇게 믿음으로 살고 순종으로 사는 자들은 복된 삶과 승리적 삶을 살고 선한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그는 더위와 가뭄을 이길 것이다. 그는 모든 환난과 핍박을 이길 것이다. 그는 행복자이다. 또 그는 인격과 삶의 선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는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인내와 자비와 선함과 충성의 열매를 맺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것이며 전도의 열매도 맺을 것이다.
9-11절, 심히 부패한 마음
예레미야서의 특징적 계시 진리는 사람의 전적인 부패성에 관한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멸망 시기에 유다 백성의 심히 악하고 부패된 상황을 보고 깊이 느끼면서 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께 받아 그것을 책에 기록하였다.
[9-11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부를 얻는] 자는 자고새(메추라기 종류)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본문은 사람의 마음이 심히 부패하였다고 증거한다. 사람의 마음은 영혼의 활동이며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세 요소를 가진다. 사람의 죄악된 말과 행위들은 마음의 부패에 기인한다. 사람은 지식이 부패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의 계명과 뜻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이 없고 도리어 헛된 것을 섬기며 거기에 가치를 두고 산다. 사람은 감정도 부패하였다. 사람은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할 때가 많고, 난폭하고 격한 감정, 미움, 염려, 불안 등의 감정 장애를 가진 자들도 많다. 또 사람은 의지도 부패하였다. 사람은 바르고 선한 일을 알아도 그것을 행할 힘이 부족하고 우유부단하고 때로는 완고하고, 또 죄악된 습관에 굴복한다.
본문은 사람의 마음이 치료 불가능하게 부패했다고 말한다. 본문에 ‘심히 부패한’이라는 원어(아누쉬)는 ‘병든, 연약한, 치료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다(BDB, KB). 사람의 마음은 전적으로 부패하였다.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한 중요한 진리이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것을 증거하고 성경이 전체적으로 이 진리를 확증한다. 예레미야 13:23도,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로마서 8:7-8도 말하기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한다.
본문은 하나님의 감찰에 대해 증거한다.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심장’이라는 원어(레브)는 ‘마음’이라고도 번역하는 말이고, 또 ‘폐부’라는 원어(켈라요스)는 ‘신장(콩팥)’이라는 말인데 ‘영혼의 작용들, 심리적 작용들, 생각과 감정 등’을 가리킨다.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자는 사람 중에는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신다. 성경은 그것을 증거한다.
시편 7: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시편 44:21,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시편 139:1-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신다. 그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다 아신다.
본문은 하나님의 보응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그 행위를 살피시고 그 옳고 그름과 선하고 악함을 시험하시고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그는 선한 마음과 그 행위들을 장려하시고 복주시며 악한 마음과 그 행위들에 대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벌을 내리신다.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본문은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메추라기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한 대표적 죄는 불의로 재물을 취하는 것이다. 거짓과 사악과 탐욕은 죄악된 사람의 모습이다. 그 반면에 진실과 선과 의, 절제와 검소와 자족함은 참된 성도의 모습이다. 불의의 소득은 결코 복이 되지 못한다. 부도덕하게, 거짓되게, 또 탐심으로 버는 돈은 복이 되지 못한다. 잠언 20:17은,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고 말한다. 불의의 소득은 복이 되지 못한다.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마음 속에 부패된 죄성이 있음을 알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감찰하심과 공의로 보응하심을 알고 두려워하자. 불의의 소득은 결코 복이 되지 않는다. 죄를 짓는 자는 하나님의 복과 평안을 누릴 수 없고 그의 엄한 징계와 징벌을 피할 수 없다.
셋째로,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성경말씀과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 바르고 선하게 살자.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사람은 속죄의 은혜와 성경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 수 없다.
12-18절, 선지자의 기도
[12절]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2절을 다시 번역하면, “태초부터 있는 영화로운 높은 보좌는 우리의 성소로다”(KJV, NASB, NIV).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다. 창조 이전 세계는 사람의 이해를 넘어서는 영원 세계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태초부터 있는 영화로운 보좌이다.
그는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다. 보좌는 통치권을 상징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만물을 친히 다스리신다. 시편 93:1-2는,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영화로운 분이시다. 그의 보좌는 영광의 보좌이다. 세상의 그 어떤 영광도 하나님의 영광에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가장 최선의 방식, 가장 최상의 방식으로, 가장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고 섬기며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하늘 보좌는 우리의 성소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이며 장차 하나님과 교제하며 섬길 수 있는 곳이며 그의 충만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지상의 성전이나 교회는 그 영광의 천국의 한 모형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누릴 자들이다.
[13절]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며 또 우리 모두의 소망이시다. 죄와 불행과 죽음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사람의 참 위로와 소망도 오직 하나님께로서 나온다. 슬픔과 절망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 우리의 위로와 힘이 되신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는 자는 허무하고 불행케 될 것이다. 본문은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원문에는 “나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리라”고 말하였는데(KJV), 그것은 선지자가 갑자기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의 말씀을 대언한 것이며, 선지자의 독특한 영감성을 보인다. 흙에 기록되는 것은, 돌에 새기는 것과 달리, 지워져 버리는 것을 뜻하며, 허무하고 무가치하고 불행한 삶을 의미할 것이다. 악인의 삶은 허무하고 불행할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는 자가 그렇게 되는 까닭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생수의 근원이시다. 몸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따라서 사람의 건강과 연약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지만, 특히 영생은 하나님께 있다. 그는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자는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고 그와 분리되면 영생을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더욱 힘써 알아야 한다. 호세아 6:3은,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꼭 붙잡고 따라야 한다. 신명기 10:20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친근히 하라[그를 꼭 붙들라]”고 말한다.
[14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고백한다. 그는 “나를 고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아뢴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병도 고쳐주실 수 있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병은 영혼의 병, 즉 죄 문제이며, 죄 문제의 해결, 곧 죄책의 해결과 죄성의 극복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우리는 구원을 얻고 고침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은 다 죄인이며 심히 부패된 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면 죄인이 의인이 되고 죄성을 가진 자가 변하여 거룩하고 선한 인격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 신약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곧 십자가 보혈 공로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으로 얻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의 은혜이다. 예레미야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한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찬송”이라고 고백한다.
[15-16절]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좇았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악한 자들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보게 하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그는 낙심치 않았다. 그는 목자의 직분, 곧 선지자의 직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하였다. 그는 재앙의 날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같이 그 날을 원치 않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입술에서 나온 설교들은 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선포한 것이었다. 그는 선지자의 사역이 어렵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하지 않았고, 또 회중의 귀를 즐겁게 하려 하지 않았다.
[17-18절]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 하시고 나로 수욕을 당케 마옵소서. 그들로 놀라게 하시고 나로 놀라게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예레미야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재앙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두려움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는 재앙의 날에도 하나님께서 그의 피난처이심을 고백한다. 그는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이 수치와 해를 당할지언정 자기가 수치와 해를 당하지 않게 하기를 구한다. 그는 악인들로 놀라게 하시고 자신은 놀라지 않게 해달라고 말한다. 그는 재앙의 날에 악인들이 철저하게 멸망을 당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왕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심을 알자.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영광의 보좌에서 세상을 통치하신다. 신명기 33: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며 섬기자.
둘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자.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 있고 그에게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육의 모든 문제들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해결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무슨 어려운 문제가 있든지 하나님께 구하며 아뢰자. 시편 50:15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씀하셨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우리의 직무를 다하자. 예레미야는 고난 중에서도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 증거한 후,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하였다(15:58).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 고난 중에서도 우리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9-27절, 안식일을 지킬 것
[19-27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 . . .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의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그들은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청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아니하면 다윗의 위에 앉는 왕들과 방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영히 있을 것이며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남방에서 이르러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의 희생을 가지고 여호와의 집으로 오려니와,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안식일에 대해 친히 강조하셨다. 19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20절,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21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24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귀한 것이며 절대적 권위를 가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면 그것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강조하셨다. 그들은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고 안식일에 집에서 짐을 내지도 말고 아무 일도 하지 말아서 안식일을 거룩히 해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열조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치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않고 교훈을 받지 않았음을 상기시키셨다. 또 그는 만일 그들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왕들과 방백들이 유다 백성과 함께 예루살렘에 드나들며 이 성이 영영히 있을 것이며 사람들은 제물을 가지고 이곳에 와 하나님께 제사드릴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지 않으면 그가 친히 예루살렘 성문에 불을 놓고 예루살렘 궁궐들을 삼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내산 언약의 내용인 십계명 안에 제4계명으로 명시되어 있다. 출애굽기 31:13, 16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라고 말한다.
안식일 계명은 제7일에 휴식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출애굽기 20:8-10,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애굽기 23:12, “너는 6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7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안식일은 종들과 가축들까지 쉬는 날이다. 출애굽기 34:21,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7일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니라.” 발 갈 때나 거둘 때는 농부들이 1년 중 가장 바쁜 때이겠으나 그때에도 쉬어야 했다. 출애굽기 35:3은 안식일에는 모든 처소에 불도 피우지 말라고 명하였다.
안식일은 또한 공적 예배회로 모이는 날이다. 레위기 23:3,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聖會)라.” 성회는 공적 예배의 모임을 가리킨다. 모든 백성은 그 날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했다.
구약시대에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매우 필수적이어서 그것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며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이었다. 출애굽기 31:14-15는,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7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한다.
느헤미야는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여러 가지 짐을 지고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식물을 파는 것을 보고 유다의 모든 귀인을 크게 꾸짖었다(느 13:17-18).
구약의 안식일은 예표적이었다. 율법이 명한 모든 절기들은 성막과 제사 제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 사역을 예표했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속죄 사역을 이루셨을 때 성취되었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는 믿는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셨다(마 11:28). 골로새서 2:16-17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이었다.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 요소는 오늘날에도 지켜져야 한다. 그것은 7일 중 하루의 구별과 육신의 휴식과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 예배 등이다. 특히 신약성경은 교회의 공적인 모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히브리서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 율법의 성취는 위축된 방식으로가 아니고 풍성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신약성도는 온 몸을 하나님께 바치며 모든 시간과 모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토요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되었으므로, 신약성도는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과 공적 예배의 날로 구별하여 지킨다. 그것이 안식일 계명 속에 담긴 도덕적 요소이다. 주일를 거룩히 지키는 것은 신약성도들에게 복된 의무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하신 주일을 거룩히 지켜 주 안에서 쉬며 교회로 모이며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유익과 복을 누린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주일은 내 날로 사용하거나 세속적 날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신약성도는 주일을 구약시대의 안식일처럼 엄격한 법에 의해 지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함과 자원함으로, 그러나 구약보다 더 풍성하게, 한 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과 유익을 위해 거룩히 구별하여 쉬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지켜야 할 것이다.
[이사야 11장 성경 강해 말씀] 이새의 한 싹 메시아 시대(사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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