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알쓸잡

[빌립보서 3장 성경 좋은 말씀] 신앙의 기쁨의 이유(빌 3:1-21)

복음의 능력 2022. 1. 4. 12:00
반응형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믿음보다는 자기의 의를 내세워 하나님 앞에 나가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의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도 않습니다. 바울도 과거에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복음으로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보고 오직 예수님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바울은 부름의 상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구원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름의 상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의 기쁨의 이유(빌 3:1-21)

 

1-9, 내가 가진 의()

옥에 갇힌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이지만 기뻐했고 또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했다. 사도 바울의 기쁨의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 때문이었다.

[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교훈은 본서신의 주요 교훈이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기쁨의 이유와 원천을 보인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쁨의 이유이시며 원천이시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건강도, 물질도, 육신의 아름다움도, 쾌락도, 세상 권세도 다 일시적이며 어느 날 없어지는 것들이다. 또 그것들을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을 때에도 그것들은 진정한 기쁨이 되지 못한다. 참 기쁨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평안 가운데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적 기쁨은 기쁨 후에, 아니 기쁨 중에도, 고통과 슬픔과 허탈이 있다.

우리의 기쁨은 그런 유의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구원 때문에, 즉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확실한 소망을 얻었기 때문에 갖게 되는 기쁨이다. 모든 슬픔은 근본적으로 죄의 결과이다. 죄가 없는 천국은 기쁨 충만한 곳이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거기서 기쁨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 안에서 기뻐할 수 있고 또 기뻐해야 한다.

바울은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너희에게 안전하다고 표현했다. 진리의 교훈은, 비록 이전부터 잘 아는 내용일지라도, 귀하고 안전하다. 새로운 교훈은 잘 분별하지 않으면 잘못된 길에 빠지기 쉽다. 그런 점에서 옛것, 곧 잘 아는 성경적 교훈이 안전하다.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개들은 도덕성이 없고 남을 물어뜯듯이 해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할례당이라는 원어(카타토메)는 ‘절단자라는 뜻으로 할례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몸만 상하게 한 자, 즉 거짓 할례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교인들을 비꼬아 한 말이라고 본다. 그들은 참 경건도 도덕성도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성도들은 그런 외식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할례의 참 뜻은 마음의 성결에 있었다. 그것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를 상징했다고 본다. 참으로 중생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이 참 할례당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도우심으로 해야 한다. 또 그들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들이다. 성도는 자신들이 죄악 되고 허무하고 무가치함을 아는 자들이므로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 기뻐하고 자랑한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의()와 거룩과 완전이시요 주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위로와 힘과 기쁨이시기 때문이다.

[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바울은 저 율법주의 교사들처럼 육신적으로 자랑할 만한 자이었다. 그는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며 베냐민 지파 족속이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고 외적으로는 흠 없는 자이었고 열심으로 말하면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한 자이었다.

[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그리스도 때문에]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사도 바울은 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들, 즉 유대인이라는 신분과 혈통, 율법을 지키는 행위의 의() 등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외모, 학력, 재산, 건강, 가문, 경력, 사회적 신분 등을 배설물과 같이 여긴 것이다. 그것들의 가치가 과연 무엇인가? 구약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헛된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전쟁이나 지진이나 무서운 전염병 등으로 죽거나 비천해질 때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더욱이 그것들은 신앙에 방해거리이다. 그것들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고 영적인 일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며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 성도들은 땅의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최고의 가치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디아 톤 크리스톤)[그리스도 때문에]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그러했다고 말한다. 성도가 가진 의()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요점이요 기독교의 진수(眞髓)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해설되고 강조된 복음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의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무가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오히려 해가 된다. 세상 것들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일 2:15-17).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데마처럼 어느 날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딤후 4:10). 아무도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하자. 성도들의 기쁨은 이 세상의 것들 때문이 아니다. 물론 세상의 것이 있으면 기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그것들이 없어지면 함께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 것들이 얼마나 헛되고 덧없다는 것을 안다. 성도의 기쁨의 이유와 원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이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에 속한 모든 좋은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자.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이 세상의 삶을 위해 어느 정도 유익이 있으나 실상 허무하고 무가치하다. 우리의 육신적, 물질적 가치들은 우리가 죽음 앞에 설 때 다 허무하고 무가치하게 된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오히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참된 경건 생활을 방해한다.

셋째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오직 우리의 의()가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최고 가치로 여기며 고백하며 살아가자. 우리의 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그를 믿는 믿음뿐이다. 그것만이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용납되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자녀가 되고 기도의 응답과 복을 받을 수 있는 근거이다.

10-16, 부름의 상을 위하여

[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그의 성육신(成肉身), 그의 독특한 인격, 그의 속죄사역, 그의 은혜와 사랑은 참으로 깊고 신비한 사실들이다. 바울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의 부활은 죽음을 영원히 이기신 부활이었다. 그의 부활체는 장차 성도의 부활체와 영생할 몸의 모습이었다. 장차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부활을 경험할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으나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한다. 예수님 믿는 우리 모두의 삶도 고난의 삶이다. 바울이 고난 중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듯이, 우리 모두도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몸의 부활은 아직 미래의 사건이다. 그것은 육신적, 도덕적 완전 상태, 곧 완전 성화의 상태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아직 불완전한 성화의 상태에 있다. 성도에게는 아직도 육신의 연약성이 남아 있다. 성도의 기쁨과 평안도 세상에서 때때로 흔들리고 일시적으로 위축된다. 사도 바울은 아직 부활을 얻었거나 완전 성화를 이루지 못했으나, 그것을 향하여 달음질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주시기로 작정하신 구원의 완성인 영광스러운 몸의 구속(救贖) 곧 몸의 부활과 영생을 향해 달려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작정된 복이다.

성도의 삶은 부활과 영생을 향한 삶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고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그 구원은 법적으로 완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위해 성실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의()는 장차 우리가 얻을 영광스런 부활과 영생을 보장하지만, 우리는 그날을 위해 현재 성화(聖化)의 길을 성실히 달려야 한다. 성도들은 천국과 부활과 영생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6:22에서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하였고, 갈라디아서 6:8에서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말하였다.

[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헨)[한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신앙생활에는 많은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한가지이다. 누가복음 10:42의 전통사본에 보면, 예수께서는 ‘한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아래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요한복음 6:27, 29에 보면, 예수께서는 다른 모든 일은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에게 참으로 중요한 한가지 일은 앞에 있는 푯대 혹은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 목표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구원의 완성 곧 영광스러운 부활과 영생이다. 그것은 이미 법적으로 얻은 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 즉 완전 성화이다. 사도 바울은 그 목표를 향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한다. 성도는 잘한 일이든지 못한 일이든지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도는 지나간 날들에 잘못된 일들을 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씻음 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도는 오직 완전 성화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하며 예배 시간을 귀히 여기고 성경 교훈대로 살기를 힘써야 한다.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는 원어(텔레이오이)는 ‘완전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6에서도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한다”고 말했다. 성도의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법적 완전이다.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법적으로 완전해졌다.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테텔레이오켄).” 물론 이 완전은 실제적인 완전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골로새서 1:28에서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성도가 법적으로 얻은 완전한 의()는 자만(自滿)이나 나태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이미 무엇을 얻었거나 이루었다고 자만하거나 나태하지 말고 뒤의 것을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도덕적 완전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우리는 같은 규칙으로 행하고 같은 생각을 가지자](전통사본).

하나님의 진리는 변함이 없다. 시대는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은 동일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성화(聖化)의 정도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의 인격 형성이 얼마나 이루어졌든지 간에, 우리는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또한 나태하거나 해이해지지도 말고 오직 신앙의 목표인 부활과 영생을 위해, 즉 완전 성화를 위해 진지하게, 성실하게 달려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의 신앙의 목표는 동일하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부활과 영생이며 완전 성화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과 죽음을 통해 능력으로 영광의 부활에 이르셨다. 우리에게도 그 복되고 영광스러운 부활이 약속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목표는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죄짓지 않고 의를 행하는 완전 성화의 삶이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우리의 생각과 마음가짐과 삶을 중시하신다. 우리는 지금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들, 즉 과거의 성공과 실패의 자취들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앞에 있는 것, 즉 완전 성화의 목표를 향해, 주께서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인 복되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향해 달려가자. 물론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인해 완전한 의를 얻었고 거룩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의롭고 거룩한 인격과 삶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

17-21, 나를 본받으라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두 가지 점을 포함할 것이다. 첫째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의 확신이며, 둘째는 완전 성화(聖化)를 향한 성실한 달음질이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우리의 구원의 내용이요 성도에게 생명과 같은 진리이다. 또 완전 성화를 향한 성실한 삶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합당한 일이다. 그것은 바로 경건한 삶이요 의로운 삶이다. 바울은 육체를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만 확신하는 복음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또 고난 중에도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힘써 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의 믿음과 그의 달음질을 본받으라고 담대히 권면한다.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는 말씀에서 보이라는 원어(스코페이테)주목하라는 뜻이다(NASB). 사도 바울을 본받는 자들이 있었다.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고 완전을 향해 성실히 달려가는 진실한 성도들이 있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힘쓰는 자들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본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18]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행함이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아야 할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의 원수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할례를 받고 율법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침으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또 그러면서 저 행위 구원론자들은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만을 전파하였던 사도 바울과 그 동료들을 핍박하였다. 저런 거짓 교사들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이 아니고 그의 원수들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해서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히 언급하며 논박하였다.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저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 대해 이미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전도의 생애는 단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바른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때때로 싸워야 하였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현실이었고 또한 2천년 신약교회의 역사이었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배교자들과 또 그들과 타협하는 불성실한 종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아니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오늘날도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은 저 배교자들과 타협자들로 인하여 사도 바울처럼 눈물을 흘린다.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 대해 몇 가지로 묘사한다.

첫째로, 그들의 끝은 멸망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 19:20은 마지막 대 심판 전에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와 같이 거짓 교사들의 결말도 지옥 불못이다.

둘째로, 그들의 신()은 그들의 배다. 이것은 그들이 육체적 욕심을 최고 가치로 알고 살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먹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며 그 외에도 그들은 물질욕, 정욕, 명예욕, 권세욕 등에 사로잡혀 그것들에 종노릇 하는 자들이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그들은 욕심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이다.

셋째로,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다. 이 말씀은 그들의 현재의 영광이 결국 부끄러움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게 참된 영광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사실상 그들의 수치이다. 마지막 날 그들에게는 큰 고통과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넷째로,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땅의 일이란 썩어질 것, 허무한 것 그리고 죄악 된 것을 의미한다. 요한일서 2:16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증거했다.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지 않는 모든 자들은 다 헛되고 죄악 된 것만을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 [이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있음이니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본문도 18절에 이어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아야 할 이유를 말한다. ‘시민권이라는 원어(폴리튜마)시민권혹은 나라라는 뜻이다. 거짓 교사들과 달리, 주의 종들과 성도들은 천국 백성이며 천국의 시민권자이다. 이것은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사실인가? 사람들은 미국 시민권을 부러워하지만, 천국 시민권은 미국 시민권보다 더 가치 있고 자랑스럽다.

우리는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으로부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천국에 계신 주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22:20). 우리는 그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목적은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구원은 하나이지만, 세 단계가 있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과거의 단계이고, 성화(聖化)는 현재의 단계이고, 영화(榮化)는 미래의 단계이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이미 얻었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거룩함을 이루어가지만, 장차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실제로 죄와 불행과 죽음이 전혀 없는 삶을 경험할 것이다.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할 수 있는 역사로](원문)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주 예수께서는 친히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전능(全能)하신 주님이시다. 그는 다시 오셔서 그의 능력으로 우리의 낮고 비천한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다. 우리가 영생하기 위해 가질 부활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같이 영광스러울 것이며 또 썩지 않는 강한 몸일 것이다(고전 15:42-44). 사람들은 비싸고 좋은 옷을 부러워하지만, 하나님의 예비하신 부활체는 그 어떤 비싼 옷보다도 더 귀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여기에 성도의 기쁨의 이유가 있다. 부활과 천국과 영생은 성도의 기쁨의 이유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경건한 종들을 본받고 또 우리 자신도 다른 성도들에게 본이 되기를 소원하자.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모범이 되자.

둘째로, 우리는 교회 안의 배교자들과 타협자들을 분별하고 그들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육신적 쾌락과 물질적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멸망이다. 그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셋째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며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천국 소망을 굳게 가지고 천국 백성답게 경건하고 의롭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시편 6편 히브리어 강해설교말씀] 다윗의 참회 기도와 용서의 확신(시 6:1-10)

 

[시편 6편 히브리어 강해설교말씀] 다윗의 참회 기도와 용서의 확신(시 6:1-10)

다윗은 시편 6편에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의 진노로 자신을 징계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의 영혼이 떨린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회개 기도한 것을 여호와 하나

skh123.tistory.com

 

반응형